“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계곡천이 깊으니 물자루가 길구나.”
선종은 교조를 양나라 때 입국한 달마에 대고 있습니다.
달마는 인도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교조가 서쪽에서 온 뜻이라고 하는 것은
꽤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액면 그대로
달마가 중국까지 와서 전하려 한 것은 무엇인지
묻는 뜻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성이 이미 모두에게 있는데
굳이 법을 펴고 따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며
마지막 질문에 해당하는
마음 둘 곳이 어디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후대로 오면 관용구로 굳어져
도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무슨 뜻이냐?”
어떤 스님이 마조에게 와서 묻자
마조가 도로 묻습니다.
상황에 따라 선문답은 색깔을 달리하지만
그것이 묻고 답하는 형식은 떠나지 않습니다.
도로 묻는 마주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이미 그 답이
묻는 이에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 질문을 하러 마조를 찾기로 했던 때와
오랜 시간을 들여 마조에게 오면서 품었던 의문과
이제 당도하여 마주 앞에서 내놓는 질문에 대해 마조는 묻습니다.
지금은 무슨 뜻인지.
생각은 계속 변합니다.
변했다는 것을 본인은 몰라도
그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변하듯 생각도 변합니다.
사람들은 언어로 생각합니다.
언어는 상징입니다.
상징은 추상이고
추상은 그 의미를
사람들이 합의해 바꾸지 않는 이상
같은 뜻을 오래도록 가집니다.
아버지라는 역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지만
나의 직계 조상이자
나를 낳은 두 사람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이라는 추상적 의미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처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도 추상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것으로 질문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추상입니다.
그런데 그 추상적 의미를 일순간 걷어내면
조사는 조사이고, 서쪽은 서쪽이고
왔다는 이야기는 왔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뜻이냐?”라는 답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대화를 활용한 가르침은 매우 많습니다.
서양의 플라톤, 인도의 우파니샤드, 우리가 잘 아는 논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활용한 가르침 법을 이용합니다.
선문답도 문답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래서 문답 형식을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선문답은
묻고 답하는 형식 외에는 전혀 문답이 아닙니다.
질문과 답변이 서로를 인용하지 않거나
인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하거나
범주 밖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죠.
한마디로 서구 논리학자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됩니다.
수로 화상이 처음 마조를 찾아와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절하라”
수로가 막 엎드려 절을 하는데 마조가 한번 밟아버렸다.
이에 수로가 크게 깨닫고는
일어나 박수를 치며 크게 웃고는 말했다.
“허 참으로 신기하다. 신기해
온갖 삼매와 헤아릴 수 없는 묘한 뜻을
다만 한 발끝 위에서 근원까지 알아버렸구나.”
수로 스님은 나중에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조 스님에게 한 번 밟힌 이래로
지금까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구나.”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이 상황에서
질문과 답이 오갔다고 생각할 철학자는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선불교의 맥이 대승불교
대승 중에서도 중관론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면
왜 이러한 논법이
하나의 전통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고, 있고, 가고, 오는
존재론적 생각을
16개의 논리적 공격을 통해 제거합니다.
우리에게는 상식적인 ‘있다’ ‘없다’ 하는 생각 자체가
논리적 허점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이 아니라고 논박합니다.
짧게 예를 들면
‘비가 내린다’라는 말에서
‘비’와 ‘내린다’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요?
‘내가 간다’라고 할 때
가는 작용을 떠난 내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이미 가고 있는 내가 또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처럼 상식적인 생각의 틀을 연기법의 틀로 바꿔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불교는
말로써 말을 버리도록 하는 방편을 구사하며
선문답은 대화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말을 버리도록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선사께서는 어떤 마음을 써서 도를 닦으십니까?”
“노승은 쓸 마음도 없고 닦을 도도 없다.”
“그럼 왜 날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을 배우고 도를 닦으라 하십니까?”
“노승에게는 혀도 없거늘 언제 사람들을 권했다 하는가?”
말을 버릴 각오가 없으면
선은 공부로 별 소용이 없습니다.
말이 쉽지 말을 버린다는 것은
때로는 스스로의 존재를 깡그리 부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말을 버리기는 생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로는 전 존재를 걸고
쉽게는 몸으로 하는 일입니다.
“선사께선 마주 보면서 거짓말을 하십니다.”
“노승은 사람들을 권장할 혀도 없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저는 선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노승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
혜능을 잡기 위해 쫓아온 혜명이 묻습니다.
“나를 위해 법을 한마디 해 달라.”
그러자 혜능은
모든 인연과 생각을 일단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렇게 말합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스님, 은행들이 파산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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