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의식의 궁극

Buddhastudy 2024. 11. 25. 19:55

 

 

나무를 잘라 보라.

나는 그곳에 있으며

돌을 들춰 보라.

그러면 거기서 나를 발견하리라.

-도마복음

 

 

우리는 인식론 시리즈를 통해

의식의 발생과 변화,

그리고 그 회귀 과정을 통한 깨달음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의 개념에 대해

그 영역과 작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그리고 자아의식의 출현과 세계의 성립

분별, 의식의 발생으로 인한 번뇌와 고통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고

고해의 바다인 생멸문을 떠나

깨달음의 길인 진여문으로 들어가는

지도의 방향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바다는 어디이며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산은 어디인지를 알고자

의식의 수준, 세계와 존재, 존재와 인식을 주제로

지도를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아직 길이 완전히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목적지는 지도 위에 분명하게 그려졌다는 것이죠.

그곳을 부르는 이름은 많지만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거기로 가는 것을

우리는 깨달음 공부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존재의 최고 상태이고

또한 모든 존재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즉 진화의 목적지이자 진화의 바탕, 동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식학을 통해

의식이 비롯된 것과 의식을 발생시키는 힘

그리고 분열이 그치고 자유로운 비춤이 되는 경지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실재이자 조건이고

드러난 것이자 감추어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목적지에 대한 많은 묘사들은

신화와 전설의 수준에서

심령의 표현과 이성의 정의로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진여, 천국, 절대, 궁극, 불이, 참나, 해탈, 열반, 브라만 같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지도의 목표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는

그것을 두 번째가 없는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것 말고는 없고, 거기서 분리된 것도 없으며

그것과 다른 것도 없습니다.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인 불성, 신성, 성품은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감싸안으며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또한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에서 분명히 지적했듯

묘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지극히 단정적이고도 유추적인 암시일 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론이나 설명이 유용하지 않습니다.

언어와 논리를 초월해 있는 것을

상징과 기호로 붙잡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실체인 것처럼 말하면서

또한 그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작용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묘사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불교의 중간 사상이 밝혔듯

실체를 가리키는 모든 명제가 타당하지 않게 되는

이원적 언어, 논리의 문제이지

실제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진여이다라는 말은

체험적인 계시에 해당하지

결코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마주 볼 수는 있지만

앞에서 보아도 머리를 볼 수 없고,

뒤에서 보아도 꼬리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론적 접근 방법은 여기서는 사실상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체험할 수 있으나 입증할 수 없고

논리나 관념으로 추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궁극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징 언어로는

묘사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신성을

개념을 통해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금까지 유지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이원적 상징으로는 묘사와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죠.

반대로 그런 불가능함을 무시해야만 소통을 할 수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이원적 관념을 활용해

존재론과 인식론을 펼쳐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상징과 암시를 통한 유추이지만

우리가 이런 알쏭달쏭한 묘사를 한 번쯤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이원성에 깊이 물들어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상징적 암시가 아닌 직관을 따라 그것을 보게 하는 묘사법은

선불교의 선문답 정도가 그나마 실용적인 공부 방법인 것인데

I AM THAT 채널은 지속적으로

선공부의 내용을 제시하며 그 길 역시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징적인 묘사를

똑같은 상징적 언어로 받아들여

서로 맞추고, 그 관념을 언어적인 표피에서 피상적으로 수용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대무변이라는 것은

공간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경계가 없도록 넓다는 것은

아주 큰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원이라는 것은

무한하게 긴 시간이 아니라 무시간성입니다.

 

피상적인 관념의 수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념은 현실 세계에서 대입하거나 대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묘사는 우리에게 상당한 관념적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성질이

우리 생각의 틀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모든 시점에 완전하게 현존하며

따라서 바로 지금이고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공간은

지점이나 차원이 없는 하나의 공간입니다.

차라리 그것은 무공간이어서 공간과 다툴 이유가 없고

형태나 모양을 가질 수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당연히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던 관념을 해체하려는 듯

괴상한 묘사가 난무하지만

모래알 하나에 전 우주가 들어있다는 묘사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을 기가 막히게 잘 설명하는 선언입니다.

 

나뭇잎 한 장에 영원히 응축되어 있어서

모든 것에서 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 아무 곳에서도 신을 보지 못합니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겁니까?”라는

항의가 나올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찾아가려는 그곳에 대해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닷물을 손으로 잡으면서

그 느낌을 설명해 바다를 묘사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이런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의식의 궁극에 대해 뭐라도 말해야 한다면

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단지 뭐라도 말해야 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무소부지하고 전지전능한 그곳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비밀은

우리는 그곳에 절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뭐라고요?

이런...

 

그리고 하나 더

우리는 그곳을 떠난 적도 없습니다.

황벽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이미 부처와 하나였으니

이런저런 수행으로 이러한 하나임을 얻을 수 있는 척하지 말라.”

 

스승들은 말합니다.

만일 진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진아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획득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새롭게 얻은 것은 또한 잃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인 덧없는 것일 것이다.

영구불변의 것이 아닌 것은 추구할 가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진아는

도달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곧 진아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우리는 사실 떠난 적도 없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무언가를 얻겠다고 열심히 근두운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려는 손오공들입니다.

그렇게 획득할 수 있는 것,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는 궁극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찾던 그곳이 아니라는

역설에 부딪히게 됩니다.

 

붙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찾으려 하면 사라지며 두드리며

닥치는 이 상황을

우리는 [비이원의 기이한 성질]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수고를 해도

의식의 궁극적 상태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그 의미는 바로

그것이 이미 완전하게 현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토록 명백한 것을 못 보는 이유는

깨달음의 지식이 갖고 있는 기이한 성질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사물을 이원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없고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아예 접근하지도 못합니다.

 

내 손목을 잘라야

이게 내 손이었구나라고 아는 것이 우리의 상태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론 공부는

궁극의 의식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며 결론을 맞이합니다.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원래부터 그것이라, 찾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착각과 집착을 걷어내면 원래 있던 그것입니다.

궁극의 인식은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시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면

깨달음 공부에는 헷갈릴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 곳에도 없지만

그것이 없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플로티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