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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선과 깨달음, 초심자의 선문답 이해

Buddhastudy 2024. 11. 26. 19:41

 

 

선에는 문자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래가 좀 오래된 것이긴 한데

선 공부의 이런저런 경우를 많이 보고

또한 질문과 해답을 겉모습으로 판단해

그에 맞게 이해를 가진 답을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과 글을 떠난다는 선의 취지에 반하기 때문에

비록 문답이 있고

때로는 정말 그럴듯한 해제가 있지만

그런 경우는 올바른 선이 아니라는 뜻으로

문자선이라고 하는 것이죠.

좋은 뜻으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 공부를 처음 하면서

아예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 공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분위기에 젖기도 힘들고

막막하게 혼자 선문답을 본다고 방법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는 선에 익숙해지기 위해

맞고 틀리고 하는 것을 떠나

따라해 보기도 하고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이해도 해보고 하면서

친숙해질 필요는 있습니다.

 

저는 초심자들이

문자선으로 선을 이해하려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주 보라고 하죠.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해설도 필요합니다.

 

대사가 말했다.

무릎엔 허물이 있고, 묻지 않아도 어긋난다.”

어떤 중이 나와서 절을 하니 대사가 때렸다

겨우 절을 했을 뿐인데 왜 때리십니까?”

대사가 말하길

네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 무엇하랴?”

 

대사님은 사실 성품을 알면

드러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묻거나 묻지 않거나 어긋난다는 말이 그것이죠.

뭐라도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안다는 표시로 누군가 나와 절을 한 겁니다.

그런데 묻지도 않고 때립니다.

 

분명 나와서 절을 한 이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절을 하며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왜 절하는 이를 때린 걸까요?

 

이 경우에는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 슬쩍 떠본 것입니다.

 

이렇게 겉모습만 배워 흉내내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 본 것이죠.

사실 절하는 것이나 때리는 것이나

모두 동작으로 드러내는 거라서

거기서 끝나야 합니다.

 

하지만 맞은 이는 왜 때리냐고 묻습니다.

이런, 이런 대답이라면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신발로 바닥을 때리는 시늉을 했을 겁니다.

스님처럼 저도 보시했습니다.”

 

대사님이 화가 나서 때린 것이 아니죠.

왜 때리느냐고 하는 이가

절하던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입증했으니

당연히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서 못하겠느냐?”

하고 답하는 겁니다.

사실 대사님은

이 사람이 처음 절하는 모양새를 볼 때 이미 알았을 겁니다.

그런 게 눈으로 보이거든요.

 

이렇게 간단한 선문답의 상황은

상황을 설명하는 글로 풀면 꽤 긴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선문답의 형식에 약간 익숙해져야

선 공부를 처음 하면서 앞이 팍 막힌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점을 알면 됩니다.

이런 해설을 계속 바라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문자선에 익숙해져 버리고 맙니다.

 

이해하기 쉽고, 설명하기 쉽고

내 머리로 쏙쏙 들어와

내가 안다는 느낌과 보람을 주는 것이 문자선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선문답마저 글로 공부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정보통신 시대에 살다 보니

모니터나 휴대폰에 활자화된 글로 접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도 그 상황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질문을 듣고 답을 하는 원칙은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아예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선이 주로 어떤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는지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주 보고 많이 접하되

항상 깨어 있기

이것이 선의 정신으로

선 공부를 하는 비결 아닌 비결입니다.

 

하나만 더 보도록 하죠.

어떤 것이 문채가 나기 전의 일입니까?”

그대가 먼저 말하라. 내가 나중에 말하겠다.”

그 중이 섰기만 하니 대사가 말했다.

그대는 뭐라 했는가?”

중이 말했다.

제가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까?”

 

아마도 스님이 자기 이름인 문채를 들며

내가 나기 전의 일이 무엇인지 묻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런 것들은 좀 껄끄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참아야 합니다.

 

묻는 스님에게 대사가 먼저 말하라고 합니다.

부모미생전 화두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대답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아마 그 행동이 대사님 눈에 미적거리는 걸로 보였으면

뭐라도 한마디 했을 겁니다.

그런데 대사님은 다시 질문을 합니다.

뭐라 했냐?”

그러자 이 스님이

제가 말 안 했나요?”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말없이 서 있는 그것으로 대답을 했다는 것이죠.

대사님이 다시 질문하고, 답을 받으면서

스님의 경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아마도 대사님은 미소를 짓고 계셨을 겁니다.

 

대부분의 선은

그것이 문답일 경우에는

이런 형식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도대체 무슨 경우인지 알 수 없는 상황도 펼쳐지지만

이 정도만 알아도 당황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대화의 상황이 아닌 것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먼 길을 오기에 어려웠겠군.”

움직여 걷다 보니 어느덧 당도해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걸음을 옮기지 않는 이도 있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중이 대답이 없자 대사가 꾸짖었다.

 

앞선 문채 스님의 사례와 형식은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대사님은 왜 먼 길을 오는 스님을 꾸짖었을까요?

 

길가에 걷지 못하는 돌도 나무

다 성품이라 들었는데,

이 양반 도대체 뭘 묻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