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41회) 자녀의 말썽

Buddhastudy 2010. 12. 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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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애가 무슨 마약을 하는것도 아니고 폭행을 해서 감옥에 가는것도 아니고 그냥 애가 TV만 보고 있는데 그게 뭐가 문제요?

그런데 만약에 부모로서 아이 끼니를 내가 먹일 수가 없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 내 앞에서 아이가 굶어 죽어간다. 영양실조가 심각하다. 이렇다면 어떻겠어요?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그렇죠.

 

그런걸 상상해 보지 못했듯이 내가 결혼할 때, 애기 어릴 때, 아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으리라고 상상을 못해봤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걸 겪어 보니까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을 둔 부모들의 마음이 어떤지. 만약 우리아이가 학교에 가서 공부도 잘하고 이랬다면. 애가 말썽을 피워서 부모가 가슴 아픈 거 이거 내가 생각도 한 번 안 해봤을 거 아니오. 애가 왜 그래?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니오. 그죠?

 

그러나 내가 이걸 겪어보면서 아이들이라는 게 다 그렇게 반듯반듯만 크는 게 아니구나. 내 아이가 이렇게 말썽을 피우리라고는 내가 꿈에도 생각 안 해 봤잖아요. 내가 어쩌다가 저런 자식을 낳았냐? 내 자식이 어떻게 저렇게 되냐? 이렇게 아우성을 치고 원망을 할게 아니라. 뭔가 어떤 원인 있으니까 저런 현상이 일어날 거 아니냐 첫째.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 그 원인이 왜 그럴까? 그것은 첫째는 내가 남편에게 결혼해서 남편이 볼 때 지금 엄마처럼 이유 없는 아내의 반항있다 이 말이오.

 

불평, 불만, 내가 볼 때는 마땅히 있어서 하는 얘기지만은 남편이 볼 때는 이유가 없다 이 말이오. 아이도 지금 자기 마음 속에서 물어보면 이유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겠지. 그런데 엄마한테 말을 잘 안 해. ? 얘기 해 봐야 못 알아 들으니까. 그럼 이 세상에 많은 아내들도 남편에게 다 얘기를 못하는 거는 얘기 해 봐야 안 들으니까. 그러니까 말 못하고 속을 끓인다 이거야. 나도 자식에게 얘기를 다 못하는 이유는 얘기 해 봐야 안 들으니까.

 

그런 나의 심리적인 불만, 이런 것들이 아이 가졌을 때나 아이를 키울 때 그런 심성이 이렇게 아이에게 형성되는 거요. 그것이 소위 잠복기라는 게 있다 이 말이오. 그런 것이 형성 되지만은 아이가 자라면서 그게 무슨 초등학생이 그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시간이 지나서 첫 번째 나타날 때가 언제 나타나느냐? 사춘기 때 나타나. 더 밑에 숨겨진 것은 다음에 언제 나타나냐? 결혼하면 나타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연애할 때도 상대편 몰랐는데 결혼해서 살다 보니까 남편한테 이상한 게 나타나고 아내한테 생각도 못한 게 나타나는 거요. 그러니까 그 깊이 무의식의 세계에 있던 것은 자연스러울 때 이게 드러나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지금 이게 드러나는 거요. 그러니까 첫 번째 내가 지은, 내가 어떤 원인을 지어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냐는 생각 안하고.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되느냐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자초한 거다 이거야.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하느님의 징벌도 아니고. 전생의 죄도 아니고. 남편의 잘못도 아니고. 자식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잘못 마음을 쓰므로 해서 그것이 결국은 이렇게 일어났다 이 말이야. 첫째, 이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마땅한 과보다. 천주교로 말하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다. 이런 얘기에요. 큰 나쁜 짓을 지었다는 게 아니오. 오히려 아이는 아이가 이러한 심리를 선택한 건 아니라는 거요. 그렇게 자신의 심리가 형성됐다는 거요.

 

자기도 자기 컨트롤이 안되는거요. 그러니까 첫 번째 아이가 피해자에요. 그러니까 아이에게 미운 마음을 낸다는 것은 책임을 내가 회피하는 거요. 일은 내가 벌려놓고 피해는 아이가 받는데 그걸 아이 책임으로 돌린다 이 말이오. 그래서 첫 번째 그것을 나의 책임으로 돌려와야 된다. 그래서 그 아이의 아픔을 내가 한 때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해서 아이가 저 아픔을 겪고 있구나. 이럴 때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거요. 내가 아이를 사랑해야지 라고 해서 사랑이 안 되요.

 

이게 내가 지은 내 어리석음에 의해서 일어난 결과임을 확연히 깨쳐야 알아야 그 아이의 아픔에 대해서 내가 책임의식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지금 그게 없다 이 말이오. 그게 없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이 안되는거요. 내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미운 거요. 남편이 내 맘에 안들 때 내가 미워지듯이 똑같이 일어난다 이 말이오.

 

성당에 다니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이 만 중생의 죄를 다 대신 짊어 지고 십자기에 못박힌 걸 생각하면, 이 아이 죄 하나 내가 짊어지고 가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눈에 눈물을 뚜둑뚜둑 흘리고 난리냐 이거야. 그러니까 신앙이 진실하지 못하다. 입으로는 주님주님하면서 마음에서는 주님을 안 받아들였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모든 것을 내가 짊어 지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랑이 아이에게 전달이 된다 이거야.

 

그렇게 탁 마음을 바꿔버리면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텔레비를 보든 뭘 하든 사고를 쳐도 우선 내가 동요를 안 하게 된다.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내가 보게 된다. 어린 양이라고 무조건 봐 주는 거 아니잖아. 잘못된 게 있으면 채찍을 휘두르고 성전에서 내 쫓고 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 식으로 그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고 하는 나의 태도는 있지만은 그게 내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에 화가 나서 야단을 치고 짜증을 부리고 하는 식은 안 된다는 거요.

 

그것을 다 내 책임으로 수용한 위에 아이와 같이 붙들고 울면서 인생의 바른길을 가려고 하는 그런 몸부림이 있어야 되요. 우리 불교식으로 얘기 하면 기도가 좀 간절해야 된다. 매일 108배를 하시면서 그것이 관세음 보살을 부르면서 108배 하는 게 성당에 다녀서 마음에 걸리면 성모마리아를 부르면서 아니면 예수님을 부르면서 기도를 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 108배 절을 하면서 남편한테 참회기도를 해야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아~ 저게 내가 지은 어리석음의 잘못이구나 해서 수용이 되는데 이 수행을 안 하면 어떠냐? 그게 안됩니다. 생각을 갖고 의지만 갖고 안됩니다. 간절한 이 무의식으로부터 힘이 나와야 전달이 되요. 우리가 어떤 사람은 입에 발린 소리 갖고 전달이 안되잖아요. 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힘이 그 파장이 엄청나게 세거든.

 

그런 자기 희생에 그런 사랑이 있어야 아이가 어떤 계기에 감동을 하게 되요. 그러면 이 형성된 업장이 녹고. 우리로 말하면 무의식의 세계가 바뀌기 시작하는 거요. 그런데 이게 사춘기 기간에 이때는 엄마의 전적인 희생과 기도가 아이를 변화 가능하지만은 일단 이 시기를 놓쳐버려서 이 아이가 결혼해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 아내의 자극을 또 받게 되거든. 그러니까 어려워져요 갈수록. 그러니까 정말 간절하게 자기를 버리는 그런 기도를 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한 100일쯤 해야 자기가 그런 아이를 보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걸 넘어야 아이하고 대화가 되기 시작합니다. 지금 자꾸 무엇 때문에 그러냐? 얘기해라. 이래서 안 되요. 내가 그렇게 완전히 이걸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이하고 대화가 꾀를 써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저절로 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