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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과테말라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2. 24. 19:21

 

 

1. 소개

과테말라로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The Republic of Guatemala' 과테말라 공화국입니다.

 

과테말라의 국기는 맑은 파란 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파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하양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나타냅니다.

가운데 있는 문장은 과테말라의 국장으로 총과 칼, 국조인 케찰, 월계수 잎

그리고 ‘1821915일 독립이라고 쓰여 있는 두루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테말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총,

그리고 정의와 주권을 상징하는 칼이라고 하는데요.

국조인 케찰은 자유와 독립, 2개의 월계수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1821915일 독립이라고 쓰여 있는 두루마리는

중앙아메리카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기념일을 의미합니다.

 

과테말라 공화국은 북서쪽으로는 멕시코, 남동쪽으로는 엘살바도르와 접해있습니다.

면적은 약 10로 한반도의 약 1/2 수준이며, 수도는 과테말라시티입니다.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17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칠레, 네델란드와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테말라의 1년 총 GDP2017년 기준 약 750억 달러.

이는 세계 67위로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는 도미니카 공화국, 케냐를 꼽을 수 있습니다.

과테말라의 민족 구성은 23개 부족의 원주민이 약 43%, 스페인계 백인과 인디언 혼혈인 메스티소가 약 50%, 그리고 백인 등 기타가 7%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외에도 약 23개의 마야 토착언어가 존재합니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 주요 종교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세가 줄어들고 있고

복음교회나 기독교, 강림교파 등도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야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적 측면을 보존하고 있으며

때때로 양자가 혼합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2. 역사

현재 과테말라 지역은 찬란한 마야문명을 꽃피웠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과테말라라는 이름도, 마야어로, “나무의 땅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고대의 마야문명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6세기까지 융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후 9세기경. 마야문명은 과테말라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본거지를 포기하고

멕시코로 이동하였으며,

1524년 스페인에 정복될 때까지 뿔뿔이 흩어져 작은 부족 단위의 왕국을 형성하며 살았습니다.

 

실제로 마야문명은 기원전 9세기 이후 급작스럽게 쇠퇴하게 되는데요.

마야족이 어디로부터 도래해서 약 1000년간 융성한 문화를 이루다가

왜 갑자기 소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스페인은 1521년 멕시코를 정복한 뒤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 장군을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과테말라 정복에 나섭니다.

 

3년 뒤인 1524, 과테말라 지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이후 스페인은 1821년까지 약 300년 가까이 과테말라를 통치하였습니다.

 

1543년 스페인은 과테말라 지역에 중앙아메리카를 다스리는 총독령을 설치하여

중앙아메리카 전 지역의 행정, 사법, 교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프랑스 혁명에 자극을 받아 과테말라에 살고 있는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과테말라는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의 여타 중앙아메리카 4개국과 함께

중미연방공화국을 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중미연방공화국 체제는

구성국 간의 이해 대립으로 인해 1838년 연방이 해체되었고

과테말라는 1847년 정식적으로 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공화국을 선포한 뒤로 과테말라는 적극적으로

미국의 자본을 도입하여 도로건설, 광업개발 등 국가개발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주요 경제 및 권익이 미국 자본에 종속되는 부작용을 낳았고, 독재정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945년부터 진보주의 성향의 대통령이 정권을 잡게 되는데

, 이에 대한 반대하는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감행하여 한동안은 우익 군사 정권이 수립되는 등

대립과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과테말라는 1960년대 초부터 1996년까지

36년간 정부와 게릴라군 사이의 지독한 내전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1996년 드디어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취임한 알바로 아르수(Alvaro Arzu) 대통령은 반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1997년 게릴라 단체를 공식 인정하는 등 대국민 화합을 전개하면서

민주국가 건설 및 경제발전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여러 대통령 체제를 거치면서 과테말라는

전반적으로 치안 회복과 빈부격차 해소 등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정책을 꾸준히 펼치고 있습니다.

 

 

3. 정치 & 경제

1990년대 초. 미소 냉전의 붕괴로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19961229일에 과테말라 정부와 민족혁명연합 사이에 평화합의가 성립됩니다.

 

평화합의의 일환으로 내전시 정치적 범죄에 대한 면책을 인정하되

2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학살, 고문, 실종에 대한 죄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법이 제정됩니다.

 

화해법 초기에는 역대 정치 지도자와 주요 군간부에 대한 기소면제가 예상되었지만

2000년 대에 들어서면서 관계자들이 국내 재판소에 서게 됩니다.

 

이후 펠리페 쿠사넬로 전 대령은

농민들의 실종에 관한 죄로 징역 150년 형을 받게 되고

에플라인 리오스 몬트 전 장군은 원주민 1,800명을 살해한 죄로 80년 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엄청난 규모의 원주민 학살을 세상에 알린 리고베르타 멘추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으며

최근 과테말라 사법부는 학살을 자행한 군인들에게는 징역 12,000년을 선고하게 됩니다.

 

12,000년이라고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상징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형을 내린 거라고 볼 수 있겠죠.

 

과테말라는 공화국을 선언하고

국민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임기 4년의 대통령에게 집행권을 부여합니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시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은 대통령, 국회의원과 함께 4년에 한 번 선거로 선출됩니다.

 

중남미의 많은 나라처럼 과테말라의 정치권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는데

코미디언 출신인 지미 모랄레스가 2015년에 치러진 대선 투표에서

70%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됩니다.

 

나는 부패하지 않았고 도둑도 아니다.’ 라는 선거운동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후 여러 비리혐의가 밝혀지면서 단순히 코미디언인 줄 알았는데

실제 정치행보도 코미디를 한다는 비웃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는 노동인구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업생산물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농업국입니다.

열대기후와 비옥한 화산회 토양을 바탕으로 고도차에 따라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합니다.

 

주요 농산물로는 옥수수, 사탕수수, 바나나, 커피, 콩 등이 있고

이런 농업들은 미국의 대기업에 의해

대형 플랜테이션 형태로 경영되고 있습니다.

 

과테말라는 2017년 기준 매년 약 23만 톤의 커피를 생산하는 세계 11위 커피 생산국입니다.

과테말라의 커피는 주로 화산지역에서 경작되며

고급 스모크 커피의 대명사인 안티구아(Antigua)가 대표적입니다.

 

1750년대에 처음 커피가 과테말라에 소개되었으나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국토 대부분이 미네랄이 풍부한 화산재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후 또한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며

일교차와 습도차가 커서 커피 재배에 아주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합니다.

 

특히 태평양 연안지역은 33개의 화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어

타는 듯한 향을 가진 스모크 커피의 대명사인 안티구아를 생산하는데요.

국가 경제에서도 커피 생산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1960년 커피 법(Coffee Law)을 제정하여 국가 차원에서 우수한 품질의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테말라는 소득불균형이 심각한 편으로

인구의 65%가 빈곤층이며 그 중에서 절반은 극빈곤층입니다.

2000년 이후 세계 경기침체로 저성장기조를 유지했으나

대미 FTA 체결, 보세가공산업 회복, 경기 부양책에 힘입어

2004년부터 평균 3%이상의 성장을 지속했습니다.

 

산업은 원당, 섬유및 의류, 가구, 화학, 석유, 금속, 고무 등의 제조업과 관광업이지만

농업부문의 과잉인구를 충분히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실업문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과테말라의 국토는 해안지방부터 최고 4,000m의 산악지대에 걸쳐 있어

다양한 기후분포를 보입니다.

해안지방이나 저지대는 연평균 기온이 약 28도 내외의 열대성 기후를 보이는 반면,

수도권을 비롯하며 1,500m 이상의 고지대는

연평균 기온이 18도에서 20도 내외의 온대성 기후를 보입니다.

 

온대성 기후는 상당히 시원하고 쾌적해서

인구의 대부분이 중앙 수도권 부분과 고지대지역에 집중해 있습니다.

 

과테말라는 우기철에 내리는 집중호우로 인한 자연재해

또 화산활동과 지진으로 인한 재해에도 취약한 편입니다.

이뿐 아니라, 총기 합법화로 인한 사고 등으로 인해

치안이 극도로 안 좋은 국가로 악평이 유명합니다.

 

이처럼 치안이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 등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도 많은 해외관광객이 찾는 국가이기도 한데요.

이 때문인지, 과테말라는 중앙아메리카에서도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파나마 등과 함께 관광업이 꽤 발달한 나라입니다.

 

과테말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는 티칼(Tikal)을 꼽을 수 있는데요.

북부 저지대 열대우림에서 위치한 티칼은

고대 마야문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그대로 남아있어

과테말라 최고의 관광명소로 꼽힙니다.

 

한때는 25만 명이나 살던 거대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둘러싸여 국가의 철저한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티칼 지역을 자세히 관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일 정도는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다음으로 사랑받는 관광지로는 아티틀란 호수(Lago de Atitlan) 가 있습니다.

이곳은 유명한 영국 소설가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다라고 묘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과테말라시티에서 서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위치에 있는 칼데라 호수 주변으로

여러 아름다운 산들이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2곳이 과테말라의 역사적인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명소였다면

마지막으로 소개할 관광명소는 치치카스떼낭고 시장입니다.

 

치치(Chichi)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는 이 시장은

과테말라시티에서 남서쪽으로 약 2~3시간 거리에 위치한 시장인데요.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로 큰 종족인 마야 키체족의 마을 안에 위치한 이 시장입니다.

 

교통 오지에 속해있어 아직도 그 전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작은 마을에서 목요일과 일요일, 장이 열리면 인근에 사는 원주민들이 모두 모여

일용품부터 의류, 가면, 목재제품, 도자기 등 여러 물건들을 사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중앙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밝고 활기가 넘치는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5. 인물

과테말라의 유명인으로는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Miguel Angel Asturias가 있습니다.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 언론인, 외교관으로

196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스투리아스는 세계문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기여를 한 인물로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과테말라의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과 구전되던 민담을 예술적으로 함께 풀어내면서

단순히 현실 고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의미를 조망함으로서

세계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중남미 문학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선지자 역할을 했습니다.

 

1899년 과테말라시티에서 태어난 그는

산 카를로스 데 과테말라 대학을 졸업, 같은 해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유학을 했습니다.

소르본 대학에서 고대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문명 연구를 진행하며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후 <과테말라의 전설>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고국으로 귀국한 후로는 언론인과 외교관으로 근무합니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가 발표한 소설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는

1892년부터 1922년까지 과테말라를 통치한 독재자 정권을 다룬 1946년작 <대통령 각하>가 있습니다.

이 책에 아스투리아스는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았습니다.

 

이후 그는 1954년 과테말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아르헨티나로 망명해서 그곳에서 8년 동안 망명 생활을 보내다가

이후 1996년에 과테말라 정부로부터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인디오의 전통과 과테말라의 특성에 뿌리박은 작품을 다수 발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스투리아스는

1974년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