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깨달음... 그 이후의 선택! 침묵과 연민. [낭독20회]

Buddhastudy 2022. 11. 16. 20:01




오쇼의 [신비신학]입니다.
오늘 함께할 내용은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깨달은 자가 그 깨달음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구요.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이 사라진다는 내용입니다.

깨달은 자를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깨달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침묵하고 사라지는 자들을 ‘아르하타’라고 부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말을 하는 사람을 ‘보디사트바’라고 부른다고 해요.

내용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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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위로 올라갈 때, 먼저 간결함이 온다.
그대의 진술은 수트라가 된다.
그런 다음 완벽한 침묵이 온다.
단 한 마디를 말하는 것조차도 무엇인가 잘못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자는 말한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거짓되게 한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피했다.
그는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보여줬다.
신에 대해 암시는 했지만 결코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신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7일 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드문 경우였기 때문에 신들이 안달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깨달았다.
“그는 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안 할 것인가? 
만일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귀중한 보물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붓다에게 절을 하고 말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선생님, 말을 하십시오. 이것은 아주 드문 경험입니다!
붓다가 되는 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붓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연민을 가지십시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당신의 말 한 마디가 그들에게는 감로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침묵했다.
신들이 끈질기게 주장하자 그가 반박했다. 그가 말했다.
“7일 동안 나는 말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항상 도달했습니다.

우선, 어떤 말도 내 경험을 담기에 충분할 만큼 적절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내가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오해받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을 때, 누군가가 무엇을 말하면 나 스스로가 그를 오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불필요하게 진리를 거짓되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혼동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 번째로, 백 명 중에서 99.9퍼센트는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똑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0.1퍼센트는 혜택을 입을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만한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지혜로워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조만간에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스스로 발견하도록 놔두지 말아야 합니까?
어쩌면 조금은 더 오래 걸릴 것이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세상은 무한합니다.”


신들도 그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그를 어떻게 설복시킬 것인지에 대해 
많은 토의를 했다.
이 사람은 옳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가 말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그들이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몇몇의 사람들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당신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적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백만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을 이해할 만큼 지혜롭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발견할 정도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경계선에 있습니다.
조금만 밀어주면 그는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밀어줄 사람이 없다면 그는 뛰어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되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가 성취한 것을 다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세속으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런 사람들의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의 말을 통해 붓다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충분한 것 이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탁하기에 충분한 이유입니다.”

붓다는 그 점에서 마지못해 승낙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무엇이나 매우 함축되어 있다.

법구경은 단지 몇 개의 수트라일 뿐이다.
그것은 상세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씨앗이다. 그것은 피어나야 한다.
그들은 신비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숨겨져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한다.
“우리는 말이 간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침묵과 무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과 무지가 그의 특별함이며 
그가 신비주의의 역사전체에 독특하게 기여한 바이다.

붓다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안 것을 말할 수 없다. 
어떤 말도 그것을 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시우스는 말한다.
“그것은 무지의 상태다. 그러니 어떤 말이 그것을 담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앎의 상태라면 일부는 담겨질 수 있다.
어쩌면 더 큰 말이 발견되거나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럴 수 없겠는가?
우리가 아름다움과 사랑과 지극한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진리나 열반이나 모크샤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왜 만들어내지 못하겠는가?

말은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대상이 무지의 상태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때 그것은 전혀 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말이 없는 가운데서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겠는가?
그것이 무지의 상태이기 때문에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그는 모든 붓다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갔다.

-여기서 말은 보편적 실재에서 개별적 개체로 하강한다.
하강함에 따라서 그것은 사물의 다양성에 따른 비율로 증가한다.
그러나 이제 진리 속에서 그것은 개별적 개체에서 보편적 실재로 상승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면서 올라가는 것은 물러난다.
전체적인 상승 후에 그것은 내면으로 침묵하게 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개별적 개체는 표현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은 표현에 있어서 매우 정밀하다.
그것은 완전히 명확하게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H₂O를 보자.
이제 거기에 아무것도 더해질 수가 없다.
오해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H₂O는 H₂O를 의미한다.
과학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학적인 언어를 찾아냈다.
과학의 관심은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개별적 개체에서 보편적 실재로 올라갈 때, 그대는 모호하게 된다.
더욱더 많은 안개가 그대를 둘러싼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하나가 된다.

이 단계를 기억하라.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첫 번째 단계는 무지의 단계다.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로부터 내려오면, 두 번째 단계는 모호한 앎이다.
그대는 그대가 무엇을 안다는 사실을 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아침 일찍 태양이 떠올랐지만 아직 여명이 둘러싸여 있는 것과 같다.
그대는 멀리는 볼 수 없지만 약간은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둠도 아니고 밝음도 아니다.

인도에서는 신비가의 언어를 저녁 언어라고 부른다.
그것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
그것은 중간에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어떤 것은 어둡고 어떤 것은 밝다.

그래서 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한다.
“밝은 어둠, 투명한 어둠.”

첫 번째 단계는 무지의 단계다.
아무것도 그것에 대해서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그대 안에 연민이 일어난다면….

붓다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아르하타라고 부르는 아라한이며 
다른 하나는 보디사트바라고 부르는 보살이다.

아르하타는 무지의 상태에 남아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붓다가 7일 동안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는 아르하타로 남아있는 것을 생각했다.
아무도 그에 대해서 들은 사람이 없고, 아무도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전달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멀리 숲속 깊은 곳의 꽃처럼 홀로 꽃을 피울 것이다.
아무도 그것의 향기를 맡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 꽃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어떤 벌도, 어떤 나비도 거기로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를 그는 보디사트바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말하는 사람이다.
신들이 그가 보디사트바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는 모든 비구, 산야신들이 애정을 갖고 연민을 갖기를 바랐다.
진리에 도달할 때, 그대의 가슴이 연민으로 가득 찬다면 그대는 보디사트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가슴에 어떤 연민도 없다면
그대가 사막처럼 메마른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대는 진리에 도달했을지 모르나 아무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저편으로 건너가겠지만 혼자 가게 될 것이다.

아르하타는 무지의 상태에, 아그노시아 속에 머무른다.
그는 뒤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보편적 실재 속으로 사라진다.
아무도 그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보디사트바는 그 높이에서 내려온다.
그는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삶의 어두운 계곡 속에서 애쓰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다시 내려와 골짜기로 들어온다.

이것이 하강이다.
무지로부터 그는 모호한 앎으로 하강한다.
모호한 앎으로부터 정밀한 앎으로 내려온다.
정밀한 앎으로부터 표현으로, 언어로, 말로 내려온다.

말과 언어를 통해서 그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도달한다.
그러면 듣는 사람의 마음은 그것을 해석한다.
그리고 들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일곱 단계가 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단계에 도달할 때가 되면 많은 것이 분실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붓다는 말한다.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고맙습니다. 오쇼의 <신비신학>이었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현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