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노자가 전하는 지혜의 말씀, 타인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법

Buddhastudy 2023. 2. 2.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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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것 같지만

그 쓰임은 부족하지 않다.

 

완전히 채워진 것은 빈 것 같지만

그 쓰임은 끝이 없다.

 

완전히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완전한 비교는 서툰 것 같고

완전한 언변은 어눌하다.

 

급한 움직임은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은 더위를 이긴다.

고요함과 평온함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든다.

 

좋은 행동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말을 능숙하게 하면 실수가 생기지 않는다.

 

이해가 빠르면 계산기는 필요 없고

문단속을 잘하면 문을 잠그지 않아도 열 수 없게 된다.

 

성인은 사람을 잘 도와주기 때문에

버리는 사람이 없고

물건도 잘 사용하여 버리는 물건이 없다.

이것을 밝은 지혜라고 한다.

 

잘하는 사람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잘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있어도 항상 제자리이다.

이것은 중요하지만 알기가 힘들다.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하고

보통 사람은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그들이 비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다.

고정된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고

최상의 덕은 낮은 골짜기와 같다.

 

매우 흰 것은 더럽혀진 것 같고

넓은 덕은 모자란 것 같고

건실한 덕은 믿음직하지 못하다.

 

참된 덕은 변한 것 같고

크게 모난 것은 모서리가 없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만이 만물을 잘 돌보아 이루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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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현상 뒤에 있는 의미를 보면서 살기가 힘듭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도

내가 직접 그 사람의 이면을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동의하여 결정해 버립니다.

평판은 매우 편리하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가 이런 점을 꼬집어 말합니다.

장자에게는 친구 혜자가 있었는데

물건의 쓰임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친구 혜자가 말합니다.

이 박은 너무 커져버려서 바가지로 쓰기가 힘들겠군1

누가 이렇게 큰 박을 들수나 있겠는가

그리고

저 나무는 허리가 잔뜩 구부러져서 반듯한 목재로는 쓸 수가 없겠네

이번 겨울에 땔감으로 났으면 다행이겠구만

 

혜자는 사람들의 쓰임에만 익숙해져서

커다란 박과 굽어버린 나무의 가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

 

이것이 우리가 편리하게 쓰지만

때로는 대상의 본질을 잊지 못하게 가로막는 통념입니다.

 

습관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내 생각처럼 쓰는 것이지요.

 

이에 장자가 대답합니다.

이보게 저렇게 큰 박은 구하기도 힘든 귀한 것이네

저 박은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크니

호수에 띄어 배처럼 사용한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저 휘어진 나무도 들판에 옮겨 심는다면

여러 사람이 더운 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네.”

 

이렇게 장자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

사물에 새로운 본질을 찾아보라 권합니다.

 

통념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이 많이 쓰고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어서 사용할 뿐이지

최선의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이 너무 익숙해지면

이제는 어느덧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무시를 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통념이었던 것이

상대에게는 통념이 아닌 경우도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이 소통하기를 꺼려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내가 없는 곳에서

꼰대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물건에 대한 태도는

사람에 대한 태도로 이어집니다.

 

예전에 통념은 조직과 회사의 나를 맞추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통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통념을 쥐고

여전히 사람을 조직에 맞추려고 하다가

mz세대의 것은 반발의 곡소리를 내는 건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통념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합니다.

 

물건과 사람에 대한 쓸모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정한 잣대는 모든 일에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처럼

한계를 짓습니다.

그로 인한 차별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며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하지만 자연이 정한 잣대는 이런 한계와 차별을 무색하게 합니다.

어느 한편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순환하며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도의 특성에 따르기 때문이죠.

 

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사물의 다양한 측면이 종합적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도 귀하게 대하지만

선하지 않은 사람도 소중히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만의 통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통념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상대방의 통념에도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그러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낼 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역할은 다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모자란 듯 처신하지만

빈틈이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큰 그릇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노자는 도가 이름 없이 숨어 지내는 것처럼

도를 닮은 인격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책임을 지는 자리에 서면

때로는 단호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단호하고 분명한 말은

듣는 사람이 시원하고 후련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환호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항상 소수의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거대한 악의가 되어

결국 그 사람을 한 방에 쓰러트리게 됩니다.

 

단호할 때는 선을 그어야 하겠지만

항상 다른 통념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와 다른 통념을 무시하면

언젠가는 나에게 큰 해를 입히게 될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그 뜻이 깊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경험만큼 새롭게 다가오는 힘이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뜻대로

자연처럼 살기 위해 속세를 떠나기 전

국경검문소에서 한 번에 도덕경을 썼다고 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염증을 느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고독과 사색을 즐기려는 것은

비단 노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의 철학자 쇼펜하우와 니체도

혼자 지내는 시간을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