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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마야 문명, 미노스 문명

Buddhastudy 2023. 2. 22. 19:05

 

 

문자로 기록이 가능해진 문명의 출현을 기점으로

문자가 나타난 이전은 선사시대,

이후는 역사시대라고 하는데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4대 문명이라는 말은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량치차오가 정의한 개념으로

지난 영상까지 다루었던 이집트 문명을 비롯한

네 지역의 문명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4대문명은 이미 학계에서 여러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대 사회에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문명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많이 있는데요

아즈텍 제국의 전신인 마야문명이라든가

잉카 제국의 전신인 안데스 문명

혹은 아프리카쪽에서도 이집트가 아닌

사하라 이남 지역의 문명 등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문명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고고학계의 연구들과는 다른 예제로

북한에서는 1990년대부터 대동강 문명설을 주장하며

세계 5대 문명이라고 해서, 4대 문명에 추가하였는데

이 경우는 진지하게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세계 4대 문명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지역의 4대 문명은

규모면이나 세계사에 끼친 영향도 아주 크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시 여기고 있기는 합니다.

 

오늘은 4대 문명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서

메소아메리카에서 번성한 마야 문명과

크레타섬에서 발생한 미노스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아메리카 대륙에는 15세기 무렵부터

유럽 백인들과 당시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로 구성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요.

그럼 이전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

아메리칸 원주민의 기원은 어떻게 될까요?

 

여기에도 여러 가지 아메리카 이주설이 존재합니다.

10분상식 세계백과에서 노르웨이 편을 보시면

인물 파트에서 노르웨이 고고학자

토르 헤위에르달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그가 주장한 폴리네시아인 항해설에 대한 이야기는

10분상식 세계백과 노르웨이편을 참고해주시구요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 아메리카 이주설로는

베링 육교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오랜 옛날 지금으로부터 약 3만년 전에 지구는 빙하기였고

대략 1만년마다 빙하기가 찾아왔는데요

빙하기 때, 태평양 북부의 베링해에 수위가 낮아져

다리처럼 연결된 베링 육교를 건너서, 몽골계 종족들이 알래스카로 이동한 뒤

북아메리카 전역에 퍼져 살게 되었다는 설입니다.

 

이후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고대 문명을 가지게 되는데

대표적으로는 마야 문명,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이 있었지만

1500년대부터 스페인이 고대 문명을 멸망시키고

이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를 삼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초기에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400년경까지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문명에는 올멕 문명이 있었습니다.

 

올멕 문명은 메소아메리카에서 나타난 최초의 문명 중 하나고

이후에 생겨나는 문명들에게 많은 영향을 남기게 되는데요.

 

종교 활동에 있어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이 있었고

올멕인들의 문자와 달력 체계는 이후 마야 문자와

숫자, 달력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죠.

 

세월이 흘러 화산활동과 지진 등으로 인해

올멕의 중심지였던 해안가 지대의 인구 감소가 되고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다른 문명들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마야 문명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로

마야 문명은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하여

지역마다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크게 발전한 도시들로는

과테말라의 티칼, 온두라스의 코판, 멕시코의 팔랑케가 있는데

마야라는 이름은 이후, 학자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마야문명은 고대 문명 중에서

고도의 철학적, 평화적 문명이라고 믿어왔지만

이 역시 세월이 지나며, 차차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마야문명의 특징으로는 정연한 문자 체계로

과학적인 마야문자, 그리고 역법

태양과 달, 금성을 정밀 관찰하는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건축적인 면에서도 도시들과 거대한 신전, 피라미드, 석비등을 세우며

수천년전부터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야 문명의 천문학은 특히 유명하여

마야인들은 기원전부터 지구와 금성의 태양 공전 궤도를 계산하여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조각품과 건축물에서는 주로 석기를 활용하며

청동기나 철기 문화의 발달은 느렸고

마야의 유물 중에 바퀴가 존재했지만 실용화하지 않고

물건을 이동시킬 때는 인력으로 운반했다고 합니다.

 

수천년전부터 일찍이 놀랍도록 진보한 역법, 천문학 관련한 지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마야 문명대국은

평화롭고 철학적이고 세련된 문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는데요.

 

특히, 20세기 마야 연구의 일인자였던 에릭 톰슨은

마야 문명의 사람들은 분명히 온순한 기질로 지니고 있어

평화로운 문명을 이루고 살았을 것으로 주장하며

마야 문자 해독 연구에 대해 많은 반대를 했습니다.

 

당시, 에릭 톰슨의 영향력은 학계에서의 권위가 워낙 커서

그가 사망하는 70년대에까지 마야 문자 연구는 진행되기가 어려웠고

결국 그가 죽고 난 이후에야 본격적인 문자 해독을 시작하며

마야 문명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숫자와 문자, 건축, 천문학의 발달에는 뛰었지만

종교적 행사에 있어서는 사람을 제물로 쓰는 인신공양 기본이며

마약 같은 환각제들이 다수 사용되기도 하며

여러 도시들이 존재했던 만큼 전쟁이 빈번히 발생했죠.

 

남아메리카만 하더라도 중국 면적의 2배가 되는데

그 큰 넓은 면적에 다양한 도시들이 있었으니

마야 문명 안에서도 수많은 전쟁과 영역다툼이 있었던 겁니다.

전쟁을 통해 그 중 가장 힘이 쎈 종족이

위대한 왕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지배를 하는 체제였죠.

 

서기 700년 무렵, 8세기 쯤부터 해서

고전기 마야의 도시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지게 되는데요.

명확한 규명은 밝혀내기가 어려우나,

마야의 쇠퇴에는 당시에 나타난 소빙하기가 1차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합니다.

 

남아메리카에는 녹색으로 덮여진 열대우림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실 녹색 사막이라고 불려질만큼 식량 생산량이 낮습니다.

열대 우림의 다양한 동식물들이 존재하지만

이것이 곧 식량이 많다는 걸 의미하진 않았던 거죠.

독이 있는 식물들도 다수 있고

심지어는 대형 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목숨걸고 사냥을 해도 얻을 수 있는 고기도 적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매우 적어

면적은 컸지만 그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진 땅이라고 할 수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 마야 문명에 찾아온 소빙하기는

원래 우기에 유카탄 반도에 내려야 하는 비구름이 찾아오지 않아

최악의 가뭄이 찾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소 저수시설을 만들 필요성도 느낄 수 없었던 마야 문명은

정글 한 가운데 그대로 방치가 되어

농사가 안되는 것은 물론, 수분 섭취까지 충분하지 못했죠.

 

고대 마야가 몰락한 후, 10세기에서 16세기 초까지

치첸이트사 등의 몇몇 새로운 도시들이 극소수 나타나

마야 문명을 부흥시키며 후기 마야를 이어가지만

스페인 인들이 당도할 때 쯤에는

고대 부흥기의 화려했던 모습이 아닌

힘이 약한 마야인들에 불과했던 겁니다.

 

 

마야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이번에는 유럽쪽으로 무대를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집트 문명이 나일강 유역에서 진행되고 있을 무렵

지중해에 흩어진 크고 작은 섬에서도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는 그리스에 가까운 곳에

에게 해라 불리는 아름다운 바다와 크레타 섬이 있었는데

크레타 섬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문명이라고도 하는 미노스문명이 있었습니다.

 

대략 기원전 2700년경에서 1500년경에 있었던 문명으로

미노스 왕의 전설과 연관된 문명이라서

미노스 문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요.

 

크레타 섬 사람들은 해양 민족으로 유능한 상인들이었고

농업과 무역의 발달로 생활이 점점 풍요로워지면서

매우 크고 우아한 크노소스 궁전이 건축하게 되었는데

1,000개 이상의 방과 높은 곳은 5층이나 되며

수많은 벽화들로 장식되기도 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에 있는 벽화에게서는

동물, 식물, 인물까지 자유롭고 생생하게 그리며

건축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벽화중에서는 여성도 염소를 바치는 제물의식에 참여하거나

여러 가지 활동에 남성과 같이 참여하는 모습들도 있어

당시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했다는 것을 추측되기도 합니다.

 

크노소스 궁전에는 복잡한 미궁이 있었는데

여기에 미노스 왕과 얽힌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노스는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자신이 크레타 섬의 왕이 되고 싶어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간청을 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신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소를 보내준다면

답례로 그 소를 잡아서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지내겠다고 했죠.

 

그러자,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약속을 믿어보기로 하고 소를 보내게 되었고

미노스는 왕으로 추대받아 강력한 크레타의 함대를 구축하여 아테네를 정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힘을 얻게 된 미노스는 포세이돈에게 받았던

그 소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제물로 바치지 않았죠.

 

화가 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에게 사랑의 주문을 걸어

소를 이성으로서 사랑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소와 미노스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소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르스였죠.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르스를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크노소스 궁전의 일부일지도 모르는

아주 복잡한 미궁 속에 넣어 미노타우르스를 가둡니다.

 

그리고는 미노타우르스의 먹이를 필요로 했는데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로부터

9년에 한 번씩 청년 7, 처녀 7명을 강제로 데리고 왔습니다.

 

아테네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던 도중

용감한 청년으로 성장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그 세 번째 제물 중 한 명으로 끼였죠.

 

그런데, 건장한 훈남인 테세우스을 보고서는

미노스의 딸인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반하게 됩니다.

그가 미궁으로 들어갈 때, 실을 풀며

빠져나올 때는 실타래를 타고 나오라고 했죠.

시간이 지나,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서는

실타래를 타고 탈출하게 됩니다.

 

미노타우르스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구요.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어

2000년 정도 존속하다 기원전 1200년경에 사라졌으며

이 시기부터는 미케네 문명이 시작되게 됩니다.

 

오늘은 잘 알려진 4대 문명 이외의 문명인

마야 문명과 미노스 문명에 대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