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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그리스 역사: 솔론의 개혁

Buddhastudy 2023. 3. 2. 20:09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미케네 문명 시절 때는

아테네는 존재감이 거의 없던 중소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는 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뒤

그리스 암흑시대에도 도시국가로서 망하지 않고 버텨냈으며

이로 인해 고대 아테네인들은 큰 자부심을 지니게 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보다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있듯이

암흑기간동안 수백년을 버텨오던 아테네는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 무렵부터

스파르타와 함께 고대 그리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폴리스가 되었죠.

 

아테네라는 이름을 보다보면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인

정의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떠올릴 수 있는데요.

 

신화를 들여다보면, 이 지역에 도시가 생길 때

도시를 탐내는 포세이돈과 아테네가

서로서로 자신이 이 도시의 수호신이 되고 싶어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더 유용한 선물을 주는 쪽이 수호신이 되자고 약속을 하게 되었죠.

 

포세이돈은 호수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말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호수의 물을 마신 사람들은 바다의 신답게

호수가 소금물이 되어 있어, 짠내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아테나가 준비한 선물은 올리브 나무였고

시민들은 이를 선택하여

지금까지도 올리브와 포도가 유명한 지방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도 얘기드렸다시피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상당히 쪼잔합니다.

승부는 아테나가 이기면서, 도시국가 이름이 아테네가 되었는데

이에 승복하지 못한 포세이돈은

해일을 일으켜 아테네 연안을 쓸어버리게 되죠.

 

결국 제우스가 중재하면서 아테네에서는

아테나를 가장 먼저 숭배하고

두 번째로 포세이돈을 숭배하게 됩니다.

 

포세이돈만 한 성격할 뿐만 아니라

아테나 또한 그리 성격이 좋지 않았는데

아테나는 평소 포세이돈을 흠모해서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포세이돈은 아테나가 여성답지 못하다 하여

그녀를 떼놓기 위해

일부러 메두사와 아테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그 장면을 본 아테나는 메두사를 괴물로 만들기도 해버렸죠.

어쨌든 이로써 아테네는 두 명의 성질고약한 신들을 신봉하게 됩니다.

 

그리스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기원전 7세기 쯤 왕의 존재가 있긴 했으나

그 힘이 매우 미약하여 9명의 집정관이 통치하는 귀족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법안이 귀족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되니

이에 아테네 시민들이 불만을 품어 정치개혁을 요구했고

드라콘이 법을 강화하며 성문법 체제를 만들게 되는데요.

이는 기준이 명시되어 있는 성문법이긴 했으나

흉악죄 뿐만 아니라 경범죄에도 웬만하면 사형을 선고해버려

가혹한 형별의 드라콘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매우 엄격한, 가혹한뜻을 지닌 영어단어 draconian

이 법에서 유래한 단어죠.

불륜 등의 경범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사형이 남발되자

시민들의 불만은 더욱 쌓여갔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집정관 솔론이 등장합니다.

 

 

소크라테스 시절 이전 철학자들 중에는

7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탈로스와 함께

아테네를 대표하는 현인으로 솔론이 있습니다.

 

솔론이 활동할 당시 기원전 7세기 아테네는 사회가 상당히 불안했는데요

시민들이 먹고 살아야할 농경지와 수자원들이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농경지들도 일부 지주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식량은 줄어들었고

그와 함께 빈부격차가 커지며 경제 양극화를 겪게 되죠.

평민들은 자신들이 일궈낸 농산물의 20% 정도를 지주에게 바쳤는데

기록에 따라 20%를 제외하고 바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점점 생계유지가 힘든 사람들이 늘어나며

아테네는 빈민층으로 가득 차게 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가족을 팔거나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하기도 했죠.

 

결과적으로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되면

노예로 팔리게 되거나 몰래 도망을 가서 아테네를 떠났습니다.

여기에 법마저 강한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배고파 도둑질을 하다 걸리는 날이라면 사형을 면하기 힘들었죠.

 

그런 와중에 국가의 영웅이 등장하는데

당시 있었던 전쟁영웅이기도 하며

국내외적으로 능력을 보인 솔론은

모든 계층에게 지지를 받으며 아테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정치인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어지러운 정국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솔론이 되어야 할 것이고

국가에 만연해 있는 가계부채 해소와 토지의 편중현상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죠.

 

솔론은 출신부터가 아테네 마지막 왕인 코드로스 왕의 후계자로

귀족계층에게도 신용이 두터웠으며

빈민층에게도 다른 악독한 귀족이나 지주와는 달리

정직한 사업가에 빈민층의 입장을 공감하는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집정관에 취임하면서 이러한 취지의 말을 하게 됩니다.

평등은 분쟁을 낳지 않는다.”는 말이었죠.

 

여기서 받아들이는 계층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는데

귀족층은 능력의 기준에 따라 나누는 평등을 염두했고

빈민층은 수량에 따라 나누는 평등을 염두했던 거죠.

 

솔론은 가난과 혼란한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는 뜻의 세이사크테이아라는 정책을 시행하게 됩니다.

 

솔론의 이 정책에 귀족들도 반발 없이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부채를 탕감해주겠다는 어감이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자선 행위를 해주는 듯한 느낌을 주니

부채를 탕감해주는데 있어서 생색을 낼 수 있었던 거죠.

 

이외 여러 가지 법과 규제들을 제정하거나 수정했는데

대부분의 처벌이 사형이었던 드라콘의 법을 폐지하여

사형 대신 죄의 형량에 따라 벌금을 부과합니다.

 

그리고는 잘 알려진, 금권정치를 시행하게 되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귀족 중심의 정치참여가 이제는 계급이나 출신이 아니라

경제적 수준에 따라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차등 자격을 부여하게 되었던 거죠.

 

최하위계층도 참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면서

이후 민회는 아테네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솔론은 당시 아테네에 있던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로 변경되는 인신담보 대출을 금지시키게 되는데요

또한 평민들이 압류당했던 농경지도 다시 돌려주며

빚을 갚지 못해 노예 신분이 된 시민들도 해방시키게 되죠.

 

하지만, 이러한 급진된 변화는

지주와 귀족계층에게 반발을 사게 되고

더군다나 빈민층에게도 불만이 쌓여 지지를 잃게 됩니다.

 

당시 빈민층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으로 땅을 나눠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솔론의 정책은 담보로 압류당한 토지를 돌려주었을 뿐이었던 거죠.

 

결국 양쪽 진영의 만족감을 모두 들어주려고

중간 지점을 시행하던 솔론은

되려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불만을 사고,

결국 물러나게 됩니다.

 

 

솔론이 정치계에 발을 담는데는

그의 이종사촌이자 동성애의 연인관계로도 알려져 있는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솔론이 집정관이 될 때만 하더라도

솔론을 지지하며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었죠.

 

당시 당파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었는데

과두정치를 주장하는 평지당

중용의 정치를 주장하는 해안당

그리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끄는 시민 중심의 산지당이 있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초기에는

솔론을 지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평민들의 요구에 대해 과감하게 들어주지 못하는데 불만감을 드러냅니다.

평소 좋은 사람이라고 이미지 관리를 하던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서 스스로 참주가 되는데요.

 

참주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분을 뛰어넘어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지배자를 뜻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좀 더 과격한 뜻으로

폭군이나 독재자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7세기 경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복활동과 식민지 활동을 펼쳤는데

아테네 또한 상공업 중심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해

식민활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많은 노예들로 생산력이 증대된 아테네는

평민 중에서 부를 축적하는 자가 생기고

마침, 솔론의 금권정치를 통해 부에 따라 정치참여가 가능해지니

귀족중심 사회에서 차차 평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죠.

 

이 상황에서 좀 더 혁신적인 개혁을 이루고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곤봉잡이라 불리는 정치깡패들을 몰고와

기존의 귀족들을 내쫓으며 참주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는

용병으로 무장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했지만

그가 집권하고부터의 아테네는

실용적인 발전과 시민들의 인기를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이전에 개혁을 단행했던 솔론의 국법을 유지하며

돈이 없는 자들에게 농사자금을 대부하여 농업을 장려했고

그로 인해 국가 생산력 기반을 탄탄하게 갖췄는데요

상업적으로도 폐쇄적인 국내인끼리만의 교류가 아닌

외교적으로 무역을 활성화 시키며

이 때부터 아테네는 크게 번창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당시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종교에 대해서도

적절한 처세를 보여주기 위해

올림포스 신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아크로폴리스에 아테네 신전을 건축했습니다.

 

이 신전은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 이전에 지어졌던 건축물로

구 파르테논 신전이라고도 하는데

나중에 페르시아 군에 의해 파괴됩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문학과 예술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구전되어오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에는 아들인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가 그 뒤를 잇게 되는데

권력의 중심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나자

아들대에 이르러 눈치를 보던 주변인들은

노골적으로 반발하여

히파르코스는 암살당하고 히피아스는 축출당하게 되죠.

 

아테네의 정국은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숨죽이고 있던 귀족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며

귀족과 민중간의 갈등이 대치상태로 이어지게 되지만

독재정치를 겪어본 아테네는

이제는 독재를 막아보고자 교과서에 등장하는 도편추방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오늘은 고대 그리스 역사 두 번째 시간으로

도시국가 아테네 이름의 기원과

솔론의 개혁부터 참주정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