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246회 아들이 며느리따라 성당에 나가서 괴롭습니다

Buddhastudy 2013. 1. 17. 04:35
출처 YouTube

 

. 제일 간단한 방법은 아들 따라 성당 가버리면 제일 간단해. 왜 안 돼? 성당에 가도 성당에서는 제사 다 지내잖아요. . 그런데 말이 모순이잖아. 그렇게 부처님께 기도해서 아들까지 얻었는데 그런 정도의 혜택을 입어놓고 스님을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를 찾든지 찾아가지고 승복을 딱 해드려야지. 아들이 집 나가 잊어버렸으면 몇 번 찾아보고 없다고 안 찾겠어. 아들이 그 스님하고 인연해서 됐는데 아들이 잊어버린 것만큼이나 신문에 광고를 내든, 조계종에다 부탁하든, 다 어디 흥신소에 부탁을 해가지고.

 

그 스님 주소, 그때 그 스님 그 절 찾아가 이름 찾고, 다 찾으면 어느 절에 있든지. 안 그러면, 어디 속퇴를 했던지. 속퇴를 해서 결혼을 해도 상관없는 일 아니오. 그죠? 그러면 스님이 돼 있으면 승복 한 벌 해주면 되고, 속퇴를 하서 결혼해 있으면 양복을 한 벌 해주면 되고. 지금이라도. 어쨌든 찾아서 첫째 해줘야 돼. 그러니까 그 절에 가서 38년 전에 그 스님이 어떤 스님인지 이름 찾고.

 

오케이. 그러면 그 스님 그때 나이가 얼마쯤 돼 보였어? 그러면 한 25됐다 치고, 그러면 거기다 40년을 더하면 지금 65쯤 됐겠네요. 아니 아들 나이가 40더하면 65되잖아. 그러니까 그럼 첫째 무조건 찾아서 한 벌을 해주든지. 아니면 다섯 벌을 해가지고 60된 스님을 찾아가지고 아무나. 그 스님이라고 생각하고 그 절에 갖다 주세요. 이자 치면 다섯 벌 넘잖아. 모순은 왜 보살이 모순이냐 그러면.

 

내가 그렇게 불심이 있는데 첫째 딸이 교회 다니든 둘째 딸이 성당이든 관계없이 내가 법문 딱 들으러 갈일 있으면 딱 법문을 들으러 와야지 첫째 딸이 교회 가자.” 그런다고 둘 사이에 끼어가지고. 아니 둘 사이에 끼어서 법문을 안 들어왔다니까 그게 신심이 없다는 반증이야. 워싱턴에서 안 온 이유를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큰딸이 그렇게 할 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절에 가야 된다.” 이렇게 해야 신심이지. 그 사이에 끼어가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얘기 들으니까 신심이 없어. 그러면 성당이나 가세요.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엄마만 성당에 가면 되잖아. 일이 간단하잖아. 그 둘을 다시 끌고 오려면 힘이 드는데 나만 가버리면 간단하게 끝나버리잖아. 그런데 별로 신심도 없고 은혜도 안 갚는데 뭐, 절에 뭐 하러 있어? 그러니까 승복 다섯 벌 해주고 그냥 성당에 가버리면 된다니까. 가라니까 죽어라고 안가네. 하하하. 아이 가라는데 왜 안 가는데? 수행이라는 건 가기 싫다.’ 그래도 스님이 가라.’ 그러면 . 알겠습니다.”하고 가버려야지. 하하하.

 

첫째는 빚을 갚아라. 빚을 갚는 거는 스님을 위해 서에요? 나를 위해 서에요? 그래. 그러니까 보살이 묻는데 보살을 위해서 알려주지 뭣 때문에 내가 딴 스님 이름도 모르는 스님을 위해서 해 주겠어요. 첫째 빚을 갚아라. 두 번째는 종교문제는 내가 성당에 가버리면 깨끗하게 해결이 되고 제일 쉬운 길이다. 그렇지. 제일 쉬운 길이다. 두 번째 내가 성당에 가버리는 길이 있다.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죽어도 성당에는 못 가겠다 싶으면 내 신앙을 앞으로 내가 확실히 지켜라.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이러지 말고. 스님 말을 잘 들어야 돼. 스님이 왜 불교 신자를 천주교 가라 그러겠어. 신앙을 못 지키면서 괴로워할 바에야. 어차피 신앙을 못 지키니까 그러면 성당에 가서 가정이라도 화합하는 게 낫지 않느냐 이 말이요. 어차피 못 지키고 있으니까. 대한민국 헌법에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돼 있는데. 그건 며느리라도 안 돼. 헌법에 보장된 건데. 그건 안돼요. 법에 보장된 걸 마음대로 자식이라고 하면은. 그러면 안 돼.

 

본이 가면 제일 쉽다니까. 그러니까 첫째 어차피 본인이 신앙을 못 지키니까. 신앙을 앞으로 못 지킬 바에야. 스님 말을 잘 들어. 스님이 농담하는 거 아니오. 신앙을 내가 진실하게 못 지킬 바에야 내가 성당에 가서 가족 화합이라도 하는 게 차선책이다. 이 말이오. 못 지킬 바에야 가족화합이라도 하는 게 낫다. ‘가라이 말이오. 두 번째 가족화합보다도 나는 더 중요한 게 신앙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둘이는 성당에 다니게 놔 놓고 나는 그냥 불교를 믿으란 말이오. 이럴 때 상대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불자가 타인에게 신앙을 강요하면 그건 더 이상 불자가 아니다. 이 말이오. 어차피 내가 보기에 보살님 신앙은 진실한 신앙은 아니오. 고집스러운 신앙이지. 그러니까. 아이고. 그건 고집이오. 고집이 안 변하는데 뭐. 고집은 변하는 게 좋은데 고집을 움켜쥐고 있잖아. 그러니까 진실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고집 피우지 말고 천주교로 가서 그냥 가족이 화목한 게 좋다.

 

그런데 내 신앙이 이제라도 내가 진실한 신앙자가 되야 되겠다.’고 하면 절에 40년을 다녔더라도 지금 불교를 새로 공부를 해야 돼. 그래서 정말 부처님 법에 귀의하도록 기도를 새로 해야 돼요. 그렇게 해서 둘은 성당에 다니도록 놔 놓고 나는 내 신앙을 새롭게 가지고 정진을 한다. 그래서 내가 불법에 바르게 귀의하면 아들딸이 저절로 돌아옵니다. 아들딸이 안 돌아오면 항상 내 신앙이 부족한 줄 알아야 돼.

 

그러니까 싸워가지고 안 된다.” 고함쳐가지고 못 가게 하지 말고, 내가 모법을 보여가지고 ~ 성당에 다니는 거보다는 절에 다니는 게 더 낫겠다.” 이렇게. 그러니까 둘째 딸은 스님 법문 듣고 감동하니까 성당에 다녀도 엄마보고 절에 다니라 그러잖아. 그러니까 그것처럼 그 아들딸도 그런 감동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오. 그 엄마 감동을 만들어라. 이 말이오. 지금부터 다시 기도해서. 아들 낳아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할 때처럼, 절에 돌아오라고 기도하지 말고.

 

은혜 갚는, “내가 은혜 갚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진실한 불자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은혜를 안 갚았는데도 벌을 안 주시고 이렇게 참 살게 해주셔서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요렇게 기도하면서 내 신앙만 지키세요. 그러면 아들 신앙이 더 강하면 내가 그쪽으로 갈 거고, 내 신앙이 더 강하면 아들이 이쪽으로 올 거고, 그거 갖고 따지지 마라. 이 말이오.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자식이라고 종교를 강요합니까? 강요는 안 돼. 미성년자면 몰라도. 미성년자라면 보호차원에서 그런 얘기할 수 있지마는, 이미 성년이 되면 모범을 보여서 따라오도록 하는 건 좋지마는, 이렇게 제재를 가하는 거는 맞지 않다. 불자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거 자체가 이미 비불자, 보살이 불교 신앙이 믿음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진짜 신앙이 딱~ 견고하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믿음을 갖고 정진을 하면 저 애들도 언젠가 부처님 품에 올 거다. 이렇게. 믿고 정진을 해야지. 그걸 시어머니 권리를 갖고 해결을 하려고 그래. 종교를. 그럼 안 돼요. 그러면 종교 싸움만 나요. 그럼 불교 이미지만 나빠져. “~ 우리 시어머니는 절에 다닌다더니 결국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만들어.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