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257회 아이를 독립된 개체로 잘 키울 수 있는 방법

Buddhastudy 2013. 1. 25. 05:01

출처 YouTube

  

애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까? 우리 애가 이런 애가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 욕심이거든요? 엄마는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지 나를 먼저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아이를 한 사람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애완용 동물로 키우는 거요. 강아지 목욕시키고, 강아지 이발하고, 강아지 옷 해 입히고, 털에다 색깔 칠하고. 이거 강아지를 위해서 해요? 나를 위해서 해요? 그런데 그거 강아지 위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애에게 요런 옷도 입히고, 저런 옷도 입히고, 요거도 공부시키고, 저거도 공부시키고, 그게 애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우리 애는 요런 애가 됐으면 좋겠다. 저런 애가 됐으면 좋겠다. 다 자기 욕심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아기가 엄마한테 사랑을 못 느껴요. 엄마가 자기 욕심으로 하는데. 애를 하나의 자기 취향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어떻게 거기에 사랑을 느끼겠어요? 어린아이는 사랑을 먹고 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뭐 유아교육은 어떻게 해야 되느니, 무슨 교육은 어떻게 해야 되느니. 이것은 올바른 거 아닙니다. 엄마들이 그런 거를 보고 욕심을 내면, 즉 딴 엄마 얘기를 듣고. 이거 했다가 또 했다가 안 했다가. 했다가 안 했다가. 엄마가 이렇게 마음이 왔다갔다 왔다갔다하는데 애가 어떻게 마음이 진중한 그런 독립적인 인간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꾸셔야 되요.

 

그러니까 그런 것보다는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 절하면서 남편한테 하루 잘못한 거 있는지 돌아보고 참회하고. 그래서 늘 남녀가 뭐 차이가 나서 남편은 하늘이고 나는 땅이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려면 서로 존중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늘 남편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남편 몫이지. 내가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게 내 몫이란 말이에요. 남편이 어떻게 하든 그건 내가 간섭할 필요가 없어요. 나로서는 항상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고 사랑하고 그것이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이 된다.

 

그리고 남편이 늦게 들어오거나 남편이 내 맘에 안 들거나 한다고 불평하고 그러면 아이 인상에 엄마는 아빠에 대해서 불평하는 인상. 그러면 아이 마음에 아빠가 나쁜 사람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인상을 주면 다 아이가 마음이 당당하지가 못해요. 제 아빠가 나쁜 사람인데 어떻게 애가 당당해지겠어요? 그래서 엄마가 항상 아이에게 아빠의 훌륭한 점을 얘기해주고. 애가 오히려 왜 아빤 늦게 오는데?”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면 덩달아서 글쎄 말이야.” 이러면서 그러지 말고.

 

아빠 보고 싶지? 그런데 아빠, 너랑 나랑 이렇게 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오늘 이렇게 늦단다. 지금 너는 이해 못 하는데 네가 크게 되면 아빠를 이해하게 될 거야.” 이렇게 항상 두둔해 줘야 돼. 그런데 오히려 자기가 애 조그만 애 데리고, 애한테 하소연해요. 자기 불평을. 그래서 그 조그마한 애 하나라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이것은 엄마답지가 못하다. 그래서 이 과보를 나중에 다 받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첫째 기도를 할 것. 이것은 특히 애가 어릴 때일수록 더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 아이가 눈을 딱 새벽에 뜨면 엄마가 자기보다 먼저 깨어 있을 . 그리고 그것이 한결같아야 됩니다. 눈을 딱 뜨니까 엄마가 늘 기도하고 있다. 눈을 딱 뜨니까 엄마가 공부하고 있다.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되요. 애가 볼 때 어떻게 이렇게 폼 잡고 하는 게 아니라. 그래야 아이가 뇌리에 엄마의 존재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어진다. 이 말이오.

 

그래서 지금 제일 좋은 것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할 것. 아이 보란 듯이 하라는 게 아니에요. 하면 세월이 흐르면 아이가 저절로 알게 돼요. 그래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부부가 화목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설령 갈등이 생길 만한 일이 있더라도 아이에게는 아이고~ 엄마가 부족해서 이번엔 조금 시끄러웠다.” 하고 아빠를 두둔해 줄 것. 그것이 아이에게 대한 최고의 교육이다.

 

그리고 아이를 좀 자립적으로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다. 아이는 뭐를 잘하게 키우고 싶다. 이런 생각 하지 마세요. 내가 자립적이고 독립적이냐? 그러면 아이가 자립적이고 독립적이 됩니다. 내가 자립적이지 못하고 남편한테 늘 의지하고, 마음이 왔다 갔다 하고, 이웃사람의 얘기에 귀가 얇아서 마음이 흔들리고 하면 아이도 고대로 닮습니다.

 

콩을 딱 심어놓으면 거기서 떡잎이 나오고 자라죠. 콩의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열매가 딱 맺히는데 보면 심은 콩하고 똑같이 돼요. 알았어요? 내가 하는 행동이 고대로 아이의 심성이 돼서 자랄 때는 모르는데 나중에 고대로 모양새가 드러납니다. 이걸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외할머니 모습을 기억해 보세요. 외할머니 모습. 엄마하고 외할머니하고 다르지? 그런데 엄마가 한 70쯤 돼보면 외할머니하고 똑같습니다. 모습도 비슷해지고. 하는 짓도 비슷하고 똑같이 됩니다.

 

여러분도 엄마 흉보지 마라. 늙으면 엄마하고 똑같이 됩니다. 이게 까르마, 업식이라는 거요. 몸뚱이만 닮는 게 아니오. 몸뚱이보다 더 닮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는 엄마를 닮는 거거든요. 애가 자립적이도록 하고 싶다 하면 여러분이 자립적이야 돼. 자신의 삶이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다음에 애를 데리고 애가 자립적이 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돼. 집안에서 너 자립적으로 되라.” 이런다고 애가 자립적으로 안 됩니다.

 

아이의 특징은 따라 배우기거든요. 엄마 하는 거 고대로 아빠 하는 거 따라 배우는 것.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다소곳하고 효도하면 아이도 나중에 나한테 그렇게 하고. 내가 거기에 막 욕하고 이렇게 하면 애 엄마 편들지만, 애도 크면 똑같이 그렇게 하고. 우리 부부가 싸우면 애도 나중에 결혼하면 싸우고, 우리 부부가 이혼하면 애도 나중에 크면 이혼하고. 아버지가 술주정하면 애도 나중에 크면 술주정하고.

 

그 반대로 반발을 해서 반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그거는 아주 극히 드문 경우고. 나는 저렇게 안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거요. 안 해야지 하는 거는 의식이고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되는 게 무의식이에요. 그게 업식이 거든요. 그래서 내가 우선 정진을 하면 그렇게 특별히 무슨 기술적인 노력을 안 해도 된다는 것. 두 번째 아이가 좀 자립적이기를 원하거나 검소하게 살기를 원하면 아이를 데리고 여행 같은 걸 하세요. 그래서 아이가 혼자서 뭔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엄마가 늘 따라다니지 말고 아이를 아이들끼리 노는데 보낸다든지. 어떤 캠프에 보낸다든지. 집에서도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이불을 자기가 개도록 한다든지. 청소를 자기 방을 자기가 치우도록 한다든지. 그러려면 늘 엄마가 방을 먼저 치우는 모습. 엄마 치우는 것을 아빠가 거들어주는 모습. 그러니까 애 거를 어릴 때는 도와주지마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이불을 개면 애기가 베개라도 들고 오게 한다든지. 엄마가 상을 차릴 땐 애가 수저라도 차리게 한다든지.

 

그 때 시키는 게 아니라 도와달라고. “엄마 힘드니까 좀 도와줄래?” “배게 좀 갖다 줄래이래서 이불을 넣으면서 애가 배게 들고 오면 잘 한다칭찬해주고. 그렇게 해서 너가 한번 개어봐라. 이렇게 하고. 이런 식으로 자꾸 아이가 자기 일을 자기가 할 수 있도록 자꾸 안내해 줘야 돼. 그런데 엄마가 성질이 급하면 그렇게 안 되죠. 애 하는 게 늦고 잘 못하면 저리 비켜라. 내가 할게.” 확 밀쳐버리고. 이런 식으로 되면 앞으로 과잉보호가 되죠. 애는 경험할 기회가 없어요.

 

만약에 ‘5살짜리 애가 그네를 탄다.’ 하면 애가 그네 타다 떨어질 위험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 그럼 엄마가 늘 잡고 있으면 애는 그네를 평생 못 타는 거요. 애기가 그네를 탈 때 엄마가 안 보여야 되요. 잘 타든 못 타든. 떨어져서 팔이 부러지더라도. 그래서 조금 다치면 안 나타나야 됩니다. 피가 좀 나는데 혼자 울다가 아무도 없으면 어때요? 다 자기가 알아서 삽니다. 아시겠어요?

 

개구리도 다 지가 알아서 살고 메뚜기도 지가 알아서 사는데 왜 사람이 자기가 알아서 못 살겠어요? 그런데 엄마가 있으면 어리광을 피우죠. 그러기 때문에 크게 다치면 어떠냐? 보호해야죠. 이웃집 아이도 다치면 지나가다 보고 많이 다치면 병원에 데리고 가야죠. 강아지도 많이 다치면 어때요? 치료해줘야지. 그런 것처럼 내 자식이다.’ 하는 걸 넘어서서 보살펴야 할 것과 내 자식이기 때문에 과잉보호하는 거를 구분해야 됩니다. 그래야 애가 경험을 해요. 그러니까 시행착오를 할 기회를 줘야 된다.

 

쉽게 두 가지에요. 하나는 모방이거든요. 따라 배우기. 그래서 좋은 모습을 보여서 자꾸 따라 배우게 하는 것. 하나는 자기 나름대로 뭘 해서 시행착오. 자꾸 실수하면서 그것을 경험해서 아~ 이러면 안 되겠다. ~ 이러면 나한테 손해구나. ~ 저건 뜨겁구나. 저건 위험하구나. 자기가 자꾸 경험해서 자기 것이 되도록. 그걸 전부 부모가 보살펴서 해 놓으면 온실에서 자란 사람처럼 돼요.

 

나는 자립적으로 키운다고 키웠지마는 하나도 자립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 말이요. 그건 엄마가 그런 자기중심이 서야 아이를 이렇게 키울 수 있어요. 자기는 뭐 낭비하고 살면서 애보고 검소해라 이건 불가능합니다. 고대로 따라 배우기 때문에. 그래서 아이가 검소한 것을 가르치고 싶으면 엄마가 스스로 검소하게 살아야 됩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그래서 애가 어릴 때는 자가용이 있더라도 가능하면 애하고 같이 갈 때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렇게 대중생활을 해서 자꾸 연습을 시켜야 됩니다. 그러고 먼 길을 갈 때도 버스 타거나 기치를 타고. 그런데 우리 안 그러잖아요. 애들이 귀하니까 자기는 버스 타더라도 애 갈 때는 택시 태우고. 자기는 택시 타더라도 애 갈 때는 자가용 태우고. 자기는 버스 타더라도 애 갈 때는 비행기 태우고. 그게 애를 망치는 길이오. 애가 삶에 그 평범함. 어려움. 이런 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주잖아요.

 

그래서 옛날 다 왕자나 부잣집 아들이 망나니가 된 이유가 그렇잖아요. 너무 가난해서 보살펴야 할 애를 못 보살펴서 제대로 못 자라게 하는데도 문제가 있고. 너무 부유해서 애가 인간으로서 경험해야 될 것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를 안 줘서 또 망치는 경우도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 어린애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할 거 없이 대부분 과잉보호에 의해서 망칩니다. 엄마의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려면 이렇게 한번 법문 듣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법문을 늘 듣고 늘 기도하고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 돼요.

 

자꾸 기술적인 문제, 학원에 어떻게 보내면 될까? 뭐 될까? 그런 건 부차적인 거요. 물론 이제 뭐 태권도를 배운다. 하면 배울 수도 있죠. 한두 개 그죠? 옛날에 우리 자랄 때 학원이 어디 있었어요? 엄마가 뭐 요즘처럼 그렇게 무슨 유아교육이 어떻고 그런 게 어디 있었어요? 그냥 낳아가지고 그냥 마당에 내버려 놓고, 갔다 오면 닭똥이고 뭐고 주워 먹고 살고, 어떤 사람은 엄마가 밭매다 콩밭에 낳기도 하고. 그것도 7~ 8~ 10명 줄줄이 낳아가지고 내버려 둔 것 같죠.

 

그래도 엄마가 아이를 위해선 자기 목숨이라도 버릴 것같이 그렇게 아이를 보호했지. 엄마가 아이를 제 욕망에 맞도록 어떻게 이용하겠다.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몸매 나빠진다고 젖도 안 먹이고. 어쩐다. 이건 엄마의 자세가 아니잖아. 아이를 위해서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란 말이오. 사랑이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진솔한 사랑, 이것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하다.

 

점점점점 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춘기에 들어가면 이제부터 집착을 끊어줘야 됩니다. 가능하면 아주 큰 사건 아니면 큰 잘못 아니면 관여 안 하고 외면해주고 그래서 자꾸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지금 6살이라고요? 그럼 아직은 보살펴야 될 나이에요. 정성을 기울여서 보살펴야 된다. 지금 뭐 매를 들고 애를 바르게 키운다고 훈련시키고 그럴 때가 아니에요. 그냥 무조건 보살펴야 될 나이인데.

 

따라 배우기 하니까 버릇을 잘 길러야 되잖아 그죠? 그러니까 늘 엄마가 데리고 같이 뭘 하는 거. 조그마한 일도같이 해야 됩니다. 제 기억에 어릴 때 기억에 보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한국 나이로 8살에 초등학교 들어가니까 67살 이러면 요즘 유치원 나이 아닙니까? 그때 봄에 부모가 보리밭 매면 호미 들고 다 똑같이 따라다니고 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 본 사람 없나?

 

다 봄 되면 들에 나가서 소 풀 캐고 아무리 어려도 초등학교 다니면 다 일하죠. 망태 매고 가서 풀 베고 산에 소 먹이러 다니고. 사실은 어른과 똑같은 일 다 합니다. 좀 솜씨가 서툴고 양이 적어서 그렇지. 그런 것이 다 자립적으로 자라나는 기초요. 그런데 아이가 그렇게 인생을 경험할 기회를 여러분들이 다 봉쇄해버린 거요. 그래서 아이가 어른이 되지. 어릴 때 유치원 때 보면 똑똑해서 천재같이 되는데 중학교 대학교 다니는 애들 보면 바보같이 돼 있잖아.

 

왜 어릴 때 똑똑했느냐? 어릴 땐 잘 가르쳐서 그런 거고. 왜 애가 크면 바보같이 되느냐? 과잉보호해서 그렇다. 새가 새끼를 할 때도 어릴 때는 무조건 물어다 주잖아요? 그러다 점점점점 새가 크면 어미가 입에 안 넣어 줍니다. 새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물고만 있어요. 그럼 새끼들이 그걸 달라고 막 아우성을 치다가 먼저 기어 나와서 어미 가까이 오는 놈한테 먼저 주거든요. 다음에 물고 왔을 때 고루 안 나눠줍니다. 항상 먼저 기어 나온 놈이 먼저 먹도록.

 

그렇게 해서 이게 털이 날 때쯤 되면 크기가 족~ 달라집니다. 성장 속도가. 그리고 어느 정도 날개에 털이 다 나고 퍼덕덕 거리고 할 때는 멀리 떨어지면 그걸 먹기 위해서 막~ 몸부림치는 게 바로 뭐다? 나는 연습을 시키는 거란 말이오. 날개 근육을 키워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한 마리 한 마리 날아가는 거요. 그게 사랑이 없어서 그럴까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기다려주고 인내하고 가슴 아프지마는 기다리는 그게 사랑이란 말이에요.

 

어릴 때는 조건 없이 보살펴주는 게 사랑이고. 이제 자라면서는 집착을 떼 주는 게 사랑이다. 그런데 여러분들 어릴 때 보살피는 것이 부족하고. 조금씩 커 가면 집착을 떼 줘야 되는데 집착을 못 떼는 것. 이래서 자녀교육을 다 망친다. 그럴까? 그거를 보상해 주기 위해서 맛있는 거를 사주거나, 좋은 옷을 사 입히거나, 유학을 보낸다. 뭐 한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 이거 다 사실은 한 사람으로서 바르게 키우는 법은 아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우선 기도 열심히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