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 외국에 살면서 생기는 공허함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요? (2023.09.02.)

Buddhastudy 2023. 11. 27. 19:10

 

 

병이 있으면 치료를 해야 되겠죠.

만약에 병이 없다면 치료할 일이 없겠죠.

질문자가 지금 고민하는 것이 고민할 만한 일이라면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찾아봐야 하지만

고민할 일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아무런 할 일도 없겠죠.

 

예를 들어, 비둘기, 펭귄, 타조, 세 마리가 있다고 합시다.

펭귄과 비둘기가 아무리 잘 달려도 타조만큼 못 달립니다.

그렇다고 비둘기와 펭귄은 열등한 존재입니까?

펭귄과 타조가 아무리 잘 날아도 비둘기만큼 잘 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타조와 펭귄이 열등한 존재입니까?

타조와 비둘기가 아무리 헤엄을 잘 쳐도 펭귄만큼 잘 칠 수는 없겠죠.

그렇다고 타조와 비둘기는 열등한 존재입니까?

 

...

 

그런데 왜 우리는 누가 나보다 잘 달린다고

수학을 잘한다고, 기억력이 좋다고 해서

내가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을 할까요?

이 세상에는 열등한 존재도 없고, 우월한 존재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헤엄치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펭귄이 일등을 하게 되고, 비둘기와 타조는 꼴등을 하게 되어있는 거예요.

나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펭귄과 타조는 꼴등이 돼요.

달리는 것을 기준으로 잡으면 펭귄과 비둘기가 꼴등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런 기준이 몇 개쯤 있을까요?

수천, 수만 개가 있습니다.

 

학교 교육의 문제는

그중에 한 서너 개만 기준으로 잡아서 줄을 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국어, 수학, 영어, 세 가지 과목만 선택해서 줄을 쫙 세운 후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를 평가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가 사회에서는 잘 살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그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물론 사회로 나왔을 때 잘 산다는 기준도 명확하게 말하기가 어렵지만요.

 

그래서 사실은 열등할 것도 없고, 우월할 것도 없어요.

우주를 기준으로 잡으면 질문자는 티끌 같은 존재가 되고

원자나 분자를 기준으로 잡으면 질문자는 우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질문자는 티끌같이 작은 존재도 아니고,

우주 같은 큰 존재도 아니고

다만 나일 뿐이예요.

 

하나를 기준으로 잡으면 편견이 됩니다.

우주를 기준으로 잡고 나는 티끌 같은 존재라고 규정하면

하찮은 존재라는 편견이 생기고

원자를 기준으로 잡으면

나는 우주 같은 위대한 존재라는 편견이 생깁니다.

 

우리는 양쪽을 같이 봐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과 동시에

티끌 같은 존재예요.

이것을 같이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한쪽만 보는 것이 편견입니다.

 

부모님이 점점 늙는다는 것은

질문자도 늙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질문자가 늙으니까 부모님도 늙을 수밖에 없지요.

내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이 자꾸 생긴다는 이유는

하느님이 내 주위에 재앙을 주어서 그럴까요?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내가 늙어서 그럴까요?

 

...

 

내가 늙으면 내가 아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 세대가 죽고, 형님 세대가 죽고, 친구 중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이유는

주위에 죽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늙으면 주위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지요.

이것은 전생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재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헤엄을 못 친다고

타조는 열등하다고 생각하거나

달리기를 못 한다고

펭귄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인 겁니다.

 

부모가 늙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질문자의 도움이 필요하면 가서 도우면 됩니다.

자연생태계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은

종의 유지를 위한 생태 원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늙은 부모를 돌봐주는 것은 선택사항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자연생태계를 한 번 보세요.

늙은 어미를 돌봐주는 동물이 있습니까?

성인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지켜야 하고, 때가 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생명은 돌봐주지 않으면 종이 끊깁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자연의 원리이고,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선택사항입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부모님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하면

가서 돌보면 됩니다.

자기 일이 중요해서 부모를 돌보지 못한다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면 됩니다.

불효라고 생각하면서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불효에 대해서는 매우 자의적인 해석을 하기가 쉬워요.

굳이 불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가진 것을 뺏거나

부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자연 생태계에는 없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살면 이방인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이 독일에 와서 살면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한국 사람이 독일에 와서 살게 되거나

독일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살게 되면,

그걸 이주민이라고 하죠.

이주민은 소수이기 때문에 소외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이방인이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이란 원래 없습니다.

 

질문자가 독일에 왔다는 것 자체가

이방인이 되려고 온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왜 나는 이방인이냐고 묻는다면

진짜 웃기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질문자는 본인이 독일에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이 되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 놓고 왜 나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방인인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이주민이 소수라서

가난과 소외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미래 사회에서는 이주민이 주류가 될 겁니다.

오히려 토착인이 소수인 사회가 곧 다가옵니다.

 

지금 서울은 이주민이 주류입니다.

서울 토박이라고 해서 이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은 국민 대다수가 이주민이기 때문에

토착인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오히려 소수자인 원주민이 차별을 받죠.

그러니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문제 삼는 것들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마치 자다가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도망을 다니면서

지금 저에게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제가 볼 때는 눈을 뜨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눈을 뜨고 꿈이었네!’ 하면 끝입니다.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꿈에서 깨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러니 빨리 꿈에서 깨세요.

 

물론 지금 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꿈에서 깨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눈이 감길 거예요.

계속 꿈을 꾸는 거죠.

그럴 때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자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류가 되고 싶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독일에서 자꾸 주류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한국말을 하고 싶으면 한국으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교민 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것은

한국 사람이 극소수에서 소수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조금씩 더 늘어나게 된다는 뜻이지요.

한류 바람도 불면서 한국인이 점점 주류로 나아가게 될 겁니다.

 

50년 전에 한국에서 독일로 이민을 오신 간호사 분들은 진짜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독일에서 살면서 외롭다고 하면

그분들이 듣기에는 웃을 일입니다.

미쳐도 유분수지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 당당하게 사세요.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