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281회 어르신들께 법회를 열어드리는 마음 1편

Buddhastudy 2013. 2. 13. 05:06

출처 YouTube

  

좋은 법을 만났다. 이렇게 좋은 법을 만나게 되면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거를 전해주고 싶어요. 어디 경치가 참 좋은데 봤다. 그러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잖아. 그죠? 어디 가서 음식을 맛있는 거 먹었다.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거 한번 맛보게 해주고 싶다. 그런 것처럼 이렇게 좋은 법문 들으면 자기 좋아하는 사람한테 ~ 이 법문 좀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러분이 깨달음장에 같은데 갔다 오면 길가는 사람 붙어서 보내는 게 아니란 말이오.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 ‘~ 우리 어머니도 갔다 왔으면 좋겠다.’ ‘우리 아들도 갔다 왔으면 좋겠다.’ ‘우린 남편이 갔다 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요. 개중에는 물론 남편 저게 좀 고쳐져야 된다.’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누구를 고치려 고가 아니라 내가 해보니 너무 좋으니까 당신도 한번 해보세요.” 이렇게 돼야 돼. 그래서 지금 질문자도 자기가 좋으니까 아~ 우리 어머니도 이 법문 듣고 좀 더 집착을 놓고 아름답게 사시다가 생을 마감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돌아가실 때 집착하시고 그렇게 했더니 마음이 걸린다.

 

그러나 이때 수행자는 지나간 것은 놔야 됩니다. 지나간 것은 놔야 된다. 지나간 것을 잡는 것은 공부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좋은 법문을 듣고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 누군가를 생각해야지.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 좋은 생각 같은데 그게 효도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그 생각은 내려놔야 할 일이지.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자꾸 하면 지나간 일이 후회됩니다. 내가 법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으면. 이것도 후회거든요.

 

지금이라도 내가 알았기 때문에 좋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그래야 미래지향적이 되는데. ‘아 내가 젊었을 때 이 법문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는 자기 살아온 인생을 망치는 생각이 된다. 자기 살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놓아야 됩니다. 두 번째 그래서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법을 전하겠다. 좋은 얘기에요. 부모님 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하지 말고, 지금 노인분들이 이걸 듣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좋은데, 틀어주니까 듣는 둥, 마는 둥 이래.

 

그러면 ~좀 듣지 왜 그럴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좋지 그분은 좋은지 안 좋은지 몰라요. 나는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는데 그분들은 지금 들을 귀가 준비가 안 돼 있어요. 귀 막혀있어. 눈을 감고 있어. 그러기 때문에 그 좋음이 나처럼 안 돼요. 이럴 때 상대를 깨쳐줘야 되겠다. 이렇게 집착을 하면, 이것은 우리 아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 돈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우리 부모 나한테 유산 좀 많이 물려줬으면 좋겠다. 이거나 똑같은 거요. 대상만 바뀌었지, 종류만 바뀌었지. 그 기본 집착하는 마음은 똑같다.

 

그러기 때문에다만 기회만 제공하면 돼요. 그런데 이제 무조건 대학생들 질문한 거 틀어주면 이러면 안 돼요. 금강경 강의한 거 틀어주고 이래도 어려워요. 반야심경 강의는 더 어렵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스님 법문 중에 오늘 조금 전에 한 거 같은, 그런 거를 부탁을 해가지고 영상실에 부탁하든 중앙사무처에 부탁해서 그런 걸 어디 어디 찾아야 되요. 노인이 들어도 될 만한 거, 그것도 특히 시골노인. 시골 노인들은 이런 종교심이란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런 걸 찾아가지고 틀어주고, 그중에 한 두 마디 알아들으면 다행이고 못 알아들어도 그냥 넘어가야 되요. 거기다가 기억까지 하기를 바라는 거는 그건 말이 안 돼요. 그냥 그때 조금이라도 듣는 동안이라도 기분이 좀 좋았다. 그 정도면 대성공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다 좁아져있기 때문에 눈으로 봐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효대사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무슨 공이 어떻고 대승기신론이 어떻고 그렇게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저 사람들 뭘 좋아하나 보니까 광대가 와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니까 그저 좋아 박수치고 좋아하더라는 거요. 그래서 원효대사가 그걸 딱 보고 아~ 저렇게 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자기 아는 게 아무 소용없어. 아는 소리 100번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다 버려버리고 표주박 하나 들고 일인광대극을 했단 말이오. 일인 쇼를 했단 말이오. 원맨쇼를. 그러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러니까 모여서 박수치고 해해거렸단 말이오.

 

그 가운데 아무 내용 없으면 광대하고 똑같죠. 거기에 바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르도록. 그래서 쓸데없이 이 세상에 집착을 끊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저 나무아미타불 하도록.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한테 그저 나무아미타불을 하도록 하고, 가끔 이렇게 웃기고 재미있게 해주면서 그럴 때 잠깐잠깐은 법문을 넣어야지. 한번 틀어줬다고 또 바꾸고 자꾸 그러지 말고. 괜찮은 거 몇 개 있으면 오늘 내가 법문한 거 이런 거를 딱 30분짜리로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씩 틀어주는 거요.

 

그러면 들을 때 좋다 해도 잊어버려. 다음에 틀면 아~ 젊은 사람 같으면, “전번에 틀었다잖아.” 그런 소리 안 해요. “아이고 좋다.” 하고 또 들어요. 이렇게 해서 근기에 맞아야 돼. 그 인연에 맞아야 돼. 그렇게 첫째 내가 노력할 건 그거고, 그다음에 그게 없으면 없는 대로라도 틀어줘요. 안 듣는 거보다는 나으니까. 그 반응은 중요시하면 안 됩니다. 졸아도 그냥 두고, 안 들어도 그냥 두고, 딴소리해도 그냥 두고, 잊어버렸다 해도 그냥 두고,

 

잊어버렸다. 그러면 아이고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 괜찮습니다.” “법문은 기억하는 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안 듣고 와가지고 딴짓해도 그거 법문 듣겠다고 오란다고 와 있는 거만해도 굉장한 사람 아니오. 딴 사람은 오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 이렇게 조금 조금씩 물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 두북에도 같은 시골에 계셔도 그 법문 어쨌든 한 달에 한 번씩 들으러 오는 사람은 안 오는 사람하고 차이가 많이 나죠.

 

스님에 대하는 태도도 차이가 많이 나고, 절에 가도 차이가 많이 나고, 부러 다 배우는 게 있어요. 그래서 욕심내지 말고 하세요. 돌아가신 부모님은 탁 놓고, 부모의 생각이 있다면 남의 부모, 동네 사람에게 할 것. 동네 사람한테 할 때는 할 뿐이지 집착을 하면 안 된다.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부모에게 탁 법문을 전한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나고 부모하고 싸우게 됩니다. 이 좋은 법 전해줬는데 우리 엄마가 이거 안 듣고 딴 짓하면 싸웁니다. 아시겠어요?

 

동네 사람이 안 들으니까 그래도 넘어가지. “엄마 그럴 수 있느냐.” 이렇게 야단하고 그렇게 되요. 그래서 딱 듣던지 안 듣던지 그건 그들의 자유니까 내식대로 한다. 나는 나 대로한다. 이렇게 하면 되고, 세 번째 사업은 편안한 마음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야 돼. 한결같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