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본질: 마음은 '공'이라고 불리며, 영화 속 인물이 영화 밖을 알 수 없듯이, 현상 속에서는 마음의 본질을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고 합니다.
- 현상과 마음의 관계: 현상계는 마음 안에 펼쳐져 있으며, 마음은 '의식', '각' 등으로 표현됩니다. 이 세계의 재료는 '식'이며, 이것이 인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 깨달음의 중요성: 깨달음은 여기저기 찾는 것을 멈출 때 일어나며, 먼저 깨달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은 현상 속에서 구할 수 없으며, 꿈에서 깨어나듯이 깨달음을 통해 가능합니다.
- 의식의 작용 원리: 의식은 현상 의식과 본질 의식으로 나뉘며, 현상 의식은 생각, 감정,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질 의식은 바탕이며, 현상 의식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 마음 필름: 마음에는 '식'이라는 필름이 있으며, 무명과 분별심으로 인해 필름에 새겨진 대로 세상이 펼쳐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감사할 일이, 쪼들리는 마음에는 쪼들리는 일이 생기는 원리입니다.
- 마음의 역할: 마음은 세상을 펼쳐내는 눈과 같아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펼쳐집니다.
- 악몽의 의미: 악몽은 의식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꾸는 꿈으로, 현실에서의 사고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 깨달음의 과정: 깨달음은 존재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몸과 함께 존재하는 의식을 자각하고, 그 의식이 온 세상을 덮는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 마음 챙김: 현재의 깨어 있는 느낌에 집중하고 에너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 무명, 주지, 번뇌: 무명(분별심)은 본질을 잊게 하고 분별 세계에 빠지게 하며, 주지(집착)는 번뇌를 일으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이 칼에 집착하면 베이듯이, 인생에서도 마음에 뺏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공간 이동의 효과: 고민이 있을 때 몸을 다른 장소에 두면 정신이 번쩍 들고 고민이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 마인드 리셋: 필름에 새겨진 것을 리셋하기 위해 꿈에서 깨어나고, 남아있는 잔재를 정리하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 수행의 끝: 수행을 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는 자신이 이미 본질 안에 있으며,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가?”
“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아까 이거 설명하다가...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질문을 하지만
뭐라고 하면 다 틀린 말이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공]이라고 불러요.
지금 상황 이해되죠?
영화 속의 인물이 영화 밖에
꿈속의 인물이 꿈을 꾸는 자가 어떻게 생겼을까?
아무리 상상해 봤자,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깨달을 수는 있다, 이거예요.
깨달을 수는 있다.
/그리고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마음은 이 현상계 안에 있지는 않죠.
그러나 이 현상계가 마음 안에 펼쳐져 있어요.
무변_ 끝이 없는 무변허공이
각소현발, 각이 이렇게 나타난 거다.
원각경에 나오는 말이거든요.
무변_ 변두리가 없는 허공, 자체가 이 의식
각소현발_ 각이 나타난 바다.
그러면 무변허공 속에 있는 우리들은
당연히 각이 인연 따라 이렇게 나타난 거죠.
그러면 나타난 것은 생멸하지만
각 자체는 불생불멸이다.
각, 식이라고도 하고
의식을 지금 이 세계의 재료
파리바게뜨에 수많은 빵이 있는데 재료는 같다. 밀가루다.
그 재료 이 세계의 재료
식이라고도 하고, 지금 각이라고도 하고, 광이라고도 해요. 광, 빛이라고도 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것 하나가
인연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가 돌아가고 있고
나타났다가 돌아가고 있어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어디서 왔을까?
여기서 왔어요.
그럼 죽은 뒤에 어디로 갈까?
여기로 가요.
만법이 귀일
근데 그 하나가 어디인가?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현상 속에서
이건가 저건가 해서는 영원히 못 깨닫는다.
이해되세요?
현상 속에 있지 않아요.
카테고리 미스테이크 하지 맙시다.
그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을 찾는 꼴이다.
카테고리가 다르다.
그래서 현상 속에서는 가만히 있어야 돼요.
가만히 있으면 이 자리야.
이 말도 들어옵니까?
가만히 있으면 이 자리예요.
그리고 이 자리 아닌 곳이 없어.
그러니까 그거를 깨닫는다는 거예요, 깨닫는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는 것은 멈춰야 돼요.
여기저기 찾는 것은 멈춘다.
멈추면 깨달음이 일어난다.
근데 그냥 가만히 멈춰서만 있어서는 안 되고
사실은 먼저 깨달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지.
그러면서 자각이 일어나는 거죠.
“아, 그렇구나. 이치가 그렇구나.”
그래서 하여튼 공부는 크게 하셔야 돼요.
크게 한다는 말은
현상 속에서 쪼물락거리지 말고
이 통째로 이거 전체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다.
이 구조 자체를 깨달아야 돼요.
세계의 존재 원리 자체를 깨닫는다.
그래서 말끝에 항상 당부드리는 말씀은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공부를 하다가 뭔가에 집중하고 애를 쓰면
거기에 따른 현상이 일어나요.
쪼으면 현상이 일어난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그 어떤 현상이라도
영화 속의 일이에요? 아니면 영화 밖의 일이에요?
그 어떤 경험과 그 어떤 체험을 했다.
-나는 뭐 이런 걸 했다, 알았다.
100% 전부 다 꿈 속의 일이다, 이거예요.
그 꿈을 깨는 거지.
왜냐하면 우리 공부의 목적은 고통의 소멸이에요.
고통의 소멸.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조금 고통이 사라지고 좋아졌다 할 때
좋아진 것이 원인이 되어서
다음 고통이 또 따라온다는 걸 우리가 알잖아요.
그러니까 고통의 소멸을
현상 속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 하는 게
부처님의 깨달음이에요.
6년간이나 고생을 했는데도 안 되더라.
결국은 고통의 소멸은 꿈에서 깨어야
꿈속의 모든 고통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거죠.
하여튼 저는 제가 꿈을 꿔봤기 때문에
이런 기준은 처음부터 잡혀 있었어요.
꿈속의 고통은 깨야지 사라지는 거지
꿈속에서 아무리 진통제를 좀 맞아봤자
그 속에서 또 조금 뭔가 반짝 해봤자
그건 다 헛일이구나
그래서 꿈에서 깨야 되는구나.
그래서 공부를 딱 타깃을
어떤 수행의 끝에 일어나는 어떤 경험을 붙잡으면 안 된다.
그건 꿈속에서 잠시 좋은 경계를 취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꿈에서 못 깬다 이거예요.
그래서 꿈 깨는 데 관점을 두어서 공부를 크게 하자
그런 메시지를 공유하겠습니다.
꿈 깬 세계가 아예 없는 걸까요? 아니면 그게 정상일까요?
그게 정상이잖아요.
정상으로 돌아가는 거지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다.
이 본질 자체가 우리의 본래면목이에요.
누군가? 할 때
달마가 모양을 가지고 나타난, 꿈속에 나타난
주관으로서의 모양을 가진 그게 자기가 아니라
본래면목은 그 꿈을 꾸는 의식이에요.
그렇다면 ‘초기화’라는 말은
의식은 스스로 항상 초기화하고 있어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오케이?
그러면 지금 우리가 초기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여러분 의식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방법
어떤 작동 원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내느냐?
안 궁금해요? 궁금하죠?
설명 드릴게요.
한 개 의식이
현상의식과 본질의식으로.
근데 본질의식이 바탕이고
현상의식은 인연 따라 그때그때
팝업_ 착 펼치고 거둬드리고, 펼치고 거두어드리고
그러고 있어요.
그러면 본질의식은 지금 요 칠판
현상의식은 이 글씨
비유지만 이해되시죠?
자, 그러면 현상의식을 이루는 것은
주로 생각과 감정이에요.
당연히 몸도 들어가죠.
여러분 몸도 재료는 의식이에요.
식이에요, 식.
이 물질들도 우리가 지각을 해야만 존재하잖아요.
우리가 지각하는 물질은 식이라고요. 오케이?
아까 각, 식, 광이라고 표현한 것들.
그러면 생각, 감정, 몸은 전부 현상의식이다.
이럴 때 의식이 본질의식이라고 하는 화면 위에
현상의식을 가지고
이 세 개(생각, 감정, 몸)를 만들어내죠.
그러면 원리는 뭐냐 하면
이거를 지금 우리가 몸과 마음 할 때 마음은
생각, 감정을 마음이라고 지금 불러요.
여기까지 따라오십니까?
그러면 부처님이 12연기에서 무명- 행- 식- 명색, 이렇게 나가잖아요.
[무명]은 분별심, 무명의 내용은 분별심이에요.
그러면 분별심이 이 존재 원리 자체를 가려버린다.
왜냐하면 이거다 저거다 하는 순간, 현상계에 폭 떨어져 버려요.
그래서 분별심을 가지면 현상계의 폭 떨어진다.[행]
그래서 현상계에 들어와서 그 안에 사로잡혀서 현실인 줄 안다.
그래서 정보가 쌓인다.[식]
그때 요 정보(식)가 생각 감정이다.
이거는 매칭이 됩니까?
여러분이 가만히 있어 보면
어떤 생각은 계속, 계속 나와요.
반복해서 계속 일어나는 생각이 있어요. 맞아요?
그거는 뭐냐 하면
마음에 [식]이라고 하는 [필름]이에요. 필름
원래 필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명으로 인해서 분별심의 습관이 반복해서 행을 일으키면
그것이 필름의 모양이 생겨버려.
그러면 필름이 생기면 명색을 투사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세계가 한 개 의식인데
이 의식이라고 하는 화면 바탕 위에
이 세계라고 하는 주관, 객관으로 형성된 이 세계가 펼쳐지잖아요.
이 세계가 펼쳐지는 원리가, 세계가 명색이에요.
이름과 물질로 만들어져 있는, 명색으로 만들어져 있는 이 세계
오케이?
식으로 인해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식은 필름이에요.
그러면 투사된 영화지요.
영화관에 비유를 한다면
영사실에 영사기가 있고 필름이 담겨 있죠.
그러면 무명- 행으로 인해서 필름이 만들어져 있다.
자기 안에 필름이 만들어져 있다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가만히 있으면 그 필름이 계속 떠올라, 내용이. 오케이?
생각과 감정으로 주로.
물론 욕망이니 뭐 이런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생각과 감정이에요.
그러면 이미 그 필름이 만들어져 있다.
오케이?
무명으로 인해서.
그래서 필름이 이미 되어 있으면
빛을 비추면 필름을 통해서 스크린에 영화가 펼쳐지죠.
지금 영화가 이렇게 펼쳐진다, 이거예요.
마음으로 인해서, 지금 생각 감정을 마음이라고 불러요.
마음에 새겨진 대로 이 세계가 펼쳐진다.
이 [마음]을 [눈]이라고도 불러요.
그래서 돼지 눈에는, 돼지 식에는 돼지 명색이 펼쳐진다.
부처 눈에는 부처의 명색이 펼쳐진다.
이때 눈을 마음이라고 한다면
돼지 마음에는 돼지 세계가 펼쳐진다.
사람 마음에는 사람 세계가 펼쳐졌다.
이 영화가 펼쳐지는 원리예요.
내가 노래하는 대로 필름에 새겨져.
그리고 그대로 펼쳐져. 상황 이해되지요?
그래서 옛날에 그러잖아요.
매사에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감사할 일이 자꾸 생겨.
근데 “왜 이래 쪼들리지?” 하면
계속 쪼들릴 일이 계속 생겨.
그러니까 정말로 내 마음 필름에 어떤 내용을 내가 새기느냐에 따라서
고대로 세상은 펼쳐져요.
그러니까 정말로 일체유심조예요.
그러니까 이런 원리를 안다면
기왕 이 영화를 찍어야 된다면...
지금 우리 영화 찍고 있죠?
각자가 자기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영화를 지금 찍어야 된다면
기왕이면 좋은 영화 찍는 게 좋잖아요.
그럼 내 마음을 좋게 만들면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만들어 놓고는 집착하지 않아야 되죠.
그러나 ‘좋은 영화를 찍는다’ 이 말은
사실은 보살이 되어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런 영화 찍으면 좋잖아요.
어차피 환이지만, 어차피 알지만
찍을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만들어야 된다면 좋은 영화를 찍자.
좋은 영화를 찍는 방법은
내가 지금 일으키는 생각 감정을
좋은 것으로 내가 일으키면 환경이 그대로 만들어진다.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활용하면 돼요.
그래서 양수겹장
-하나는 본질에 단단하게, 내가 딱 나의 중심을 본질에 두고 살기
-그리고 또 현상은 기왕 찍는 영화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영화를 찍자.
이 두 개를 딱 가지면 천하무적이 되는 거죠.
부처님이 이거 가르친 거죠, 결국은.
무명, 무명은 분별심이에요.
반드시 분별심은 치구심을 낳아요.
분별심은 반드시 좋다 나쁘다를 분별한 다음에는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은 싫어해서 없애려고 하는 치구심을 낳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에 시달리느냐?
분별심, 치구심에
치구심이 행이에요, 사실은
끊임없이 뭔가를 구하게 만드는.
그래서 그 결과 좋은 필름이 안 새겨지겠죠?
하여튼 요즘 영화들이 그렇게 난폭한지 몰라요.
여러분 난폭한 영화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에요.
하여튼 가끔 악몽 꾸시죠?
악몽을 왜 꾸느냐 하면
이것도 하나의 지혜예요.
우리의 의식이 가만히 보니까
이 친구가 마음 필름에
생각과 감정이 부정적인 게 많아.
그러면 현실이 그대로 투사되니까
그 사람의 환경이 굉장히 부정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겠죠.
맞아요?
근데 우리 속에는 이 본질의 지혜가 들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두면
생각과 감정의 부정을 온통 만들어버리니까
현실이 아닌, 현실의 복제판 꿈을 꾸게 해서
혹은 악몽의 영화를 보게 해서
그 영화 속에서 이 생각 감정을 해소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꿈에서 악몽을 꾸는 이유는
현실에서 사고 칠 일을, 꿈속에서 치게 해.
상황 이해되세요?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친구가 그대로 있으면 현실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감방 가게 생겼어.
그때는 꿈속에서 그걸 하게 해서
그래서 꿈속에서는 감정이 그걸 저지르고 해소가 일어나면
현실에서는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아니면 강도가 현저히 줄어들어. 상황 이해되세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그런 꿈들이
역설적으로 우리들의 특히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화수분 역할을 한다.
오케이?
그래서 악몽 꾼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걸 잘 보고 있으면
지혜롭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직지인심이다./
지금 여러분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의식이 있죠?
하여튼 깨달음이라는 것은 제일 먼저 구체적으로는
이런 말은 존재의 구조 자체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드린 거고
그 구체적으로 이 존재 자체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를 돌아보면
눈앞에 현상이 펼쳐지죠.
맞아요?
근데 자기 눈앞에 현상만 있지 않아요.
자기 눈앞에 이런 현상만 있지 않아요.
표현할 수가 없네, 이거.
진짜 꿀먹은 벙어리 같은데
이게 깨어 있는, 이렇게 빛같이 반짝이고 있는, 깨어 있다, 살아있다.
좀 빛이 나고 있다, 좀 밝다,
무색투명한데 좀 이렇게 환한 느낌을 주는
이 한 개의 깨어 있는
할 수 없이 저는 의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요.
그런데 여러분은 저의 말을 또 잡으면 안 돼요.
한마디로 저한테 속으시면 안 돼.
의식이라고 하는 걸 잡으시면 안 돼.
대신에 각자의 깨어 있는 이것을 한번 돌이켜 보셔야 돼요.
그래서 가장 쉬운 구호는
“여기 몸이 있다.”
몸만 있는가?
이렇게 지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몸을 움직이고 있는 이 의식이 있는데
이 의식은 형상이 없어서
처음에 의식을 처음 느끼는 사람은
요 자기 주변이, 좀 이렇게, 의식이 주변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근데 암두라고 하는 스님이
덕산의 제자인 암두가 유명한 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이 의식이 자기 주변에서 좀 환한 느낌
이렇게 오지만, 이게 가슴이 열리면서
이 의식이 온 천하를 온 세상을 다 덮는다.
그래서 이 의식이 자각되면 될수록
모든 것이 여기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어디를 가도 여기인 것.
그러니까 지금 다시 말하면
우리가 몸뚱이를 어디다가 갖다 놓아도 자기 의식 속이다 이거예요.
깨달음의 바다에 이 둥근 태양이 딱 떠 있다.
그러니까 텅 비어 있는데
의식이 텅 비어 있는 바다처럼 넓은데
여기에 항상 밝은, 밝은 것이 이렇게 환하게 이렇게 드러나 있다.
혼이 있어요? 혼이 나갔어요?
혼이 있죠?
그 혼이 다 이거예요.
몸만 있지 않다. 혼이 같이 있다.
이걸 말을 뭐라고 하든, 말에 구애받지 말고
혼이라고 부르건, 의식이라고 부르건, 마음이라고 부르건, 정신이라고 부르건
그 말에 끌려다니지 말고
지금 깨어있는 느낌
아주 간단하게 이 순간 깨어 있는 이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이 느낌을 알아채고
여기에 계속 에너지를 주면 이것이 점점점점 구체화된다.
그래서 이렇게 물질보다도 이 의식이 먼저 자각이 돼요, 언제나.
아침에 눈 떠 보세요.
아침에 눈 뜨면 눈 뜨기 전에도 의식부터 자각이 돼요.
그리고 그 자각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침에 그 자각 속에서
집에서는 침대하고 방이 보이고
그때그때 이 자각의 바다 위에, 자각의 거울, 자각의 홀로그램 위에
이 현상이 그때그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한 생각을 일으켜서
제가 살았던 마드리드 거리를 가도
여기서 일어나고 있고
꿈을 꿔도 꿈도 여기서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요즘은 자기가 이때까지는 너무나 리얼하게 느껴지고 살았어요.
자기 몸이.
그런데 이 자각의 장이 구체화되면 될수록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 사이에는 우열이 없어지게 돼요.
다시
이 TV 화면이 구체화되면 될수록
그 TV에 화면에 나타나는 영화가
이 영화 저 영화 사이에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 현상이니까.
그래서 꿈의 무게하고
한 생각 일으켜서 소설을 쓰면 그 소설의 무게하고, 생각의 무게하고
생각 속의 세계의 무게나
내가 꿈을 꾸는 그 세계의 무게나
지금 이렇게 나타난 이 생시라고 하는 이것의 무게가
결국에는 같아져요, 비슷해져.
그러면 이 생시에 대한 집착이 현저히 줄어들어요.
이 말도 한 가지만 소개를 드리죠.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
택암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다쿠안이에요. 그냥
다쿠안이에요.
다쿠안 선사가 그 일본의 무사계급, 귀족들한테 선을 가르칠 때
첫 문장이 그 책에 <부동지신묘록>
부동지가 아까 말한 제 8지잖아요.
보살의 8지, 부동지, 움직이지 않는 경지의 신묘록
신통하고 묘한 기록
<부동지신묘록>이라고 하는 다쿠왕 선사의 참전 교과서
일본 사무라이 귀족들에게 가르친 그 교과서의 첫 문장이에요.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
무명에 의해서, 분별심에 의해서
분별심을 일으키는 순간
본질은 까먹고 분별되는 세계로 빠진다.
분별을 일으키는 순간 본질은 잊어버리고 무명이 되고
그리고 분별세계로 빠져서 좋다 나쁘다 해버린다.
그래서 문명에 의해서
주지 주_집착하는 거 머무르는 것, 머무르는 땅, 집착하는 대상이에요.
이때 지_ 현상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번뇌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번뇌에 대한 정의를 굉장히 이렇게 아주 심플하게 내렸어요.
다쿠안 선사의 <부동지신묘록> 책의 첫 문장이에요.
그래서 칼을 쓰는 사람은
그 칼이 현상계의 어디에도 집착하면 묶여버린다.
스피드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상대방한테 베인다.
칼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를 알아야 한다.
그 뭔가를 대할 때
내 마음이 어디에 뺏기는가?
이 현상계에서 어디에 뺏기는가?
뺏기면 죽는다, 이거예요.
칼과 칼이 마주칠 때
상대방 칼이 페인트를 써.
그러면 그쪽으로 딱 마음 가는 순간
빈틈으로 칼이 들어온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칼 대신에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친다면
상대방을 만날 때 모든 상대방이 페인트를 쓴다.
그럼, 그 페인트에 내가 마음을 뺏기는 순간
나는 굳어버린다, 그러면 베인다.
그게 번뇌 속의 인생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분별심이 바로 치구심을 일으키고
치구심이 자기도 모르게 현상 속에서 이상을 만들고
이상을 탐하는 순간
그 이상을 잃어버릴까 봐 무지막지한 공포가 생겨서, 두려움이 생겨서
욕심은 바로 뒤집으면 공포예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시면
내가 어디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가?
자기 마음 뺏기는 곳이 있다.
근데 거기에서 뺏기지 않고
부동지_ 본질에 딱 자기 마음이 가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다.
상황 이해되세요?
그리고 관찰하게 되면
이 현상은 그때그때 바뀌는 거예요.
특히 어떻게 바뀌는가?
몸뚱아리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그러니까 지금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몸뚱아리만 다른 장소에 갖다 놔도
정신이 번쩍 들어요.
왜냐하면 그 몸뚱어리가 있는 그 장소에 있는 업이 있거든요.
거기 있으면 계속 그 업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중남미 어느 도시에
지금 여러분이 어떤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다.
그 사람을 비행기 태워서 중남미 이상한 도시에 탁 떨어뜨려 보세요.
당장 먹고, 숙박하고, 그 말 안 통하는 세계 속에서 살려면
정신이 바짝 들겠죠.
그리고 지금까지 고민하던 문제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 몸뚱이 하나를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서
벌써 세계가 달라져 버려요.
그리고 고민하던 그 세계는 꿈이에요.
그 몸뚱이만 옮겨놔도 꿈에서 깬다, 이거예요.
그래서 고민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공간이동부터 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공간이동은
좋은 카페에서
그것도 그냥 카페 말고 디저트 카페 그래서
달달한 거를 먹이면서 기분 전환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이렇게.
그러니까 조금 집착이 심한 사람은 공간을 좀 멀리 이동한다.
상황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현실이나 꿈이나 같아요.
하여튼 여러분이 지금 푹 빠져 있는 것이
무명 때문에 집착하고 있는 그 자리가 번뇌의 땅이다.
그런 말이에요.
이런 말을 살펴보면
지금 자기를 돌아봐서
내 필름에 이게 지금 좀 진하게 새겨져 있구나
이게 투사되면서 계속 현실이 나타나는구나.
그래서 자기 필름을 보고 한번 원위치 시킨다.
이게 지금 마인드 리셋.
붓다의 유훈이
자기 필름에 새겨져 있는 것을 한 번.
필름을 리셋하려면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하나는 꿈에서 깨야 되고
또 하나는 다시 꿈꾸게 만드는 그 필름이
아직 무늬가 남아 있으면
계속 다시 꿈을 꾸게 만들어.
그래서 꿈에 깨는데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정리를 해야 돼요.
그럼 어떻게 정리를 하는가?
다행스럽게도
“아직 필름에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는 신호가 계속 와.
재고 조사가 돼, 저절로.
그러면 자기를 돌아보고 재고 정리를 해야 되죠.
그런 사람은 수행을 해야 돼요.
오늘 메시지는 그거예요.
수행을 열심히 하다 하다 보면
수행할 수가 없게 되는 때가 온다.
왜냐하면 수행은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
아무리 봐도 집이야.
대혜종고라고 하는 간화선을 만든 스님이 세 번 깨달아요.
그 대혜종고의 마지막 깨달음이
“아 나는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오히려 집에서 나갈 수가 없구나.”
이게 대혜종고의 세 번째 마지막 깨달음이에요.
처음에는 자기 집을 발견하고
두 번째 깨달음은 집에서 있으려고 노력을 한 건데
세 번째 깨달음은 역설적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을 쳐도
현상계에 있는 나가 본질 자체를 벗어날 수가 없구나.
그러니까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모든 노력이
끝장이 나버린 거예요, 여기서 상황이 그래요.
우리 공부가 그래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계속 노력을 해야 돼.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무명주지_ 무명에 의해서 현상에 집착해서 번뇌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면 고향을 발견해야 되고
본질을 발견해야 되고
본질에서 머물려고 노력을 해야 되고
근데 하다 하다 보면
어느새 힘이 붙어서 깨달음이 오는데
그 깨달음의 내용은
역설적으로 내가 집 나간 타향이 따로 있고
고향이 따로 있어서
돌아가려고 하는 이것이 이 두 조각이 난 결국 세계였구나.
그래서 하나를 깨달음으로써
내가 하나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그래서 모든 노력이 끝이 나는
수행이 불가능해져 버리는.
우리가 하나 속에 있어요.
역설적으로 하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게 마지막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거예요.
자,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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