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적 관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며, 깨달음은 고통의 소멸을 목적으로 합니다 [01:30]. 현실의 불만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실이라는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03:28].
- 깨달음의 과정: 깨달음은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도 안 되는 돌이킴을 통해 얻게 됩니다 [05:11].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며,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09:09].
- 본질의 중요성: 현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변하지 않는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12:46].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
불이라는 말이 깨달음이죠.
부디즘
/깨달음은 우리 마음이 집을 떠나 헤매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홍수가 난 강에서 떠내려가지 않고 다리를 뻗어
자기라는 섬에 올라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 유훈으로
“자기라는 섬에 귀의하라”
자귀의라 할 때
그때 부처님이 쓰신 단어가 원전에는 섬이라는 뜻이에요.
자기 안에 있는 섬에 귀의하라.
섬으로 올라가라, 홍수에서
그런 이제 부처님의 유훈입니다.
/섬이 어딘가?/
우리가 지금 들어앉아 있는 이곳이에요.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여러분 정신이 나갔어요? 정신이 있어요?
정신이 있죠.
그 정신이 섬이에요.
/이 섬을 발견한다./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중요해요.
지금 이미 우리는 자기 정신 속에 이렇게 있어요.
자기 정신 속에 이렇게 있어요.
이거를 한번 발견하는 것이 섬에 올라서는 것이다.
/고집멸도/
그러니까 불교의 목적은 고통의 소멸이죠.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것도
일종의 목적으로 가는 수단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최종 목적은 고통의 소멸이에요.
그런데 깨달아야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고
하여튼 우리가 이걸 혼동하면
깨달음 지상주의가 되면 안 되는 거죠.
목적이 고통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되죠.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부처님이 그 고통이란 불만족이라고 그랬어요, 불만족.
물론 거기에는 생로병사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원하지 않은 사람 자꾸 만나게 되고
그리고 이 몸을 가지고 사는 한은
몸에 오온이 자꾸 쌓여서 그것도 고통이고
세분해서 말하면 고통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하면
-존재 자체가 불만족스러운 것
-항상 헐떡이는 것
-뭔가에 지금 2%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
그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거죠.
그 고통은 이 현실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함몰되어서
이 현실이라는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끝내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을 작동시키는 원리가 이분법이기 때문에
100% 완벽하고, 100% 완전하고 이런 건 없다 이거예요.
그게 현실의 법칙이에요, 이분법이다.
그래서 이분법이기 때문에 현실 안에서는 100%라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100%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현실에서 한번, 현실이라고 하는 이 꿈에서 한번 깨어나야 된다.
그래서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가르침을 듣고, 다섯 비구가 차례로 깨달았다./
부처님하고 같이 수행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교진녀로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다 깨달아요.
그래서 교진녀의 별명이 ‘아야 교진녀’인데
아야라는 말이
부처님이 당신 말 듣고 교진녀가 깨달으니까
야 너무 반가워서 ‘아야 교진녀’ 했거든요.
이 말은 뭐예요?
이렇게 언제든지 깨닫는 기회는
언제든지 설법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잘 귀담아듣고 있으면
적어도 이 다섯 비구는 부처님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공부했던 사람이라서
그래서 쉽게 깨달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깨달음은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깨닫고 싶으시죠?
예. 깨달음은 이렇게 일어나요.
뭐냐 하면 깨달음을 처음에는 깨달으려고 노력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뭔가가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안 되네”
혹은 나름대로 이렇게 저렇게 지금 깨닫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이것이 이렇게 하니까 안 되네” 하는 그런 돌이킴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깨닫는 방법은
노력을 해서 깨닫는 게 아니고
노력을 해서 깨달으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가면
“이렇게 하면 안 되네” 하는 그런 돌이킴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그래서 “어디가 잘못되었을까?”를 찬찬히 한번
그 제가 쓰는 표현으로는
바둑을 두고 나면
고수들 바둑을 둘 때 보면
끝나고 난 뒤에 자리에서 바로 안 일어나고
그 부분을 이렇게 다시 한 번 또 보죠.
이긴 사람은 여기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대개 이긴 사람이 복기하기보다는 진 사람이
“여기가 패착이구나” 하고
그리고 끝나면 옆에서 관전하던 다른 기사들이 들어오잖아요.
그럼 평소에 같이 대화 나누던 기사들하고 몇 명이 모여서
그런 광경을 저는 많이 봤거든요.
바둑 끝나고 난 다음에는
그 판 중에서 여기가 패착이라고 하는 거를
각자 의견을 말해서 결론을 내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복기를 해보고
어디가 잘못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그게 깨달음,
그래야 실력이 늘 거 아니에요
다 끝나고 그냥 그냥 떠나버리면
자기가 패배한 원인을 모르고 하면 그걸 반복할 텐데
어디가 잘못되었는가를 확실히 확인을 하고 돌아간 다음에
그것도 끝나는 게 아니고
각자가 속해 있는 기원이나 이런 데로 돌아가면
거기서 계속 이거를 두면서
그 잘못을 아주 깊게 찾아내는 거죠.
그 과정이 실력을 우리가 향상시키는 과정인데.
자, 그렇다면 깨달음의 방법은
처음에는 노력을 하다가
‘노력하다가’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노력해요.
적당히 배운 지식을 얼기설기 모아서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노력을 해요.
그러다가 돌이킴이 오죠.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하는
왜냐하면 지쳐 떨어지는 것도 있고.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 분은 부처님이에요.
부처님도 6년간이나 선정도 닦고, 고행도 닦아서
이 두 가지 분야에서는
당대의 가장 깊은 수준까지 가봤다 이거예요.
그래도 깨달음이 아니더라.
부처님의 목적은 생로병사의 해결이었으니까.
부처님 당대에 있는 모든 수행법은 다 해본 거예요.
열심히 하고
열심히 안 하고도 안 한 사람이 안 되더라 하면 안 돼요.
열심히 해보고.
근데 방법을 모르고 하는 거잖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배워서 자기 생각을 또 붙여서
이렇게 해보는데
그 방법이 제대로 된 방법인 걸 모르고 하잖아요.
그래서 아무튼 부처님도 6년간이나 열심히 했는데 안 되었기 때문에
“안 되더라” 하고 놓은 것이
그게 이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그러면 놓고 나니까
뜻밖에도 지금 이 순간에 확인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
그게 핵심이라는 거예요.
깨달음은 이런 자각과 함께 오거든요.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가예요.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깨달으려면 “내가 어디서 잘못했는가?”를 빨리 알아채야 돼요.
그러면 보통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대부분의 상식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나는 지금 중생이고 열심히 해서 부처가 된다.”
이거 자체가 틀렸다는 것
이게 이제 부처님의 깨달음이에요.
뭐가 되려고 했던 게 가장 큰 잘못이다.
그러면 되려고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있고
이 내가 시간적으로 뭘 해서
미래에 뭐가 된다.
시차가 있어서
내가 무엇이 된다고 하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발견한 게
본질이, 그 사고 방식 자체가
기존에 부처님 이전에 인류의 거의 전체적인 사고 방식이
내가 중생으로 물들어 있고
이 물들어 있는 걸 정화해서
창조주, 혹은 신, 혹은 본질, 절대, 이름을 뭐라고 붙여도 좋은데
나는 지금 물들어 있고
피조물로 물들어 있고
그리고 지구의 존재는 청정한데
내가 이 물들어 있는 것을 정화해서
청정하게 되어서 본질하고 하나가 되겠다 하는 사고 방식이
인류를 지배해 왔어요.
근데 부처님의 깨달음은 거기에 대한 혁명이라는 거예요.
내가 바꾸어서 본질하고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있는 현상으로서의 이 모양 이대로인 것은
완전할 수가 없다.
왜냐?
현상은 상대 세계라서
이분법의 세계라서.
상대 세계라서 내가 절대적으로 청정할 수가 없다, 현상에서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근데 그 현상은 다 다르지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본질은
모든 것이 평등하게 완전히 본래 청정하다, 완벽하다.
그 점을 깨달은 거죠.
그러면 나의 정체성은 현상보다도 본질이 나의 본래 면목이고
이 본질은 현상과 상관없이
‘이대로 완전하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별 보고
별을 보는 자기의 보는 것, 별을 보는 것
그것이 본질인데
그것이 완벽하다는 걸 깨달은 거죠.
자기를 바꿔서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상은 완벽하게 만들 수가 없어요.
현상은 돌아가는 거예요, 생멸이에요.
근데 깨달음은
“내가 누구냐?” 할 때 생멸하는 현상이 아니라
불생불멸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거죠.
그래서 항상 여러분께서 깨달으시려면
깨달음을 미루면 안 돼요.
자기를 돌아본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알아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기존의 상식대로
깨달음이나 고통의 소멸을 미래에 두고
계속 미룬다는 거예요.
그걸 상정해 놓고 내가 거기로 간다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 잘못이라는 것.
지금 여러분께서도 똑같이 ‘있는 그대로’를 알아듣기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이 현상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현상은 진짜 있는 그대로인데, 진짜 있는 그대론데
그거를 바꾸려고 하는 그 욕망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만족 못하고, 불만족, 그게 고통이다, 이거예요.
있는 그대로를 불만족스러워하고 따라서 고통스러워하고
그리고 어떤 현상을 완전한 상태로 바꿔서
깨달음이나 마음공부를 성취하겠다 하는 전제가 틀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지금 멀쩡하게 깨어 있는
지금 정신이 나갔습니까? 안 나갔습니까? 할 때
여러분이 “정신은 안 나갔습니다.” 하죠.
집 안 나가는 그 정신은 이거는 완벽한 거예요.
이 현상과 본질에 대한
이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한
어떤 발견이 그때 일어났다.
왜냐?
한 생각을 바꾸니까
그 기존의 전제를 바꿔버리니까
그러니까 기존의 전제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자유로운 발상 하에 완전히 새로운 통찰이 일어났다.
본질의 발견이죠.
야망을 가져라, 그리고 이상주의라는 게 있잖아요.
각자 나름대로 이상을 가지고 산다, 이거예요.
그 이상에 속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이상을 설정하고
그 이상을 추구하려고 달려가는 인생
이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를 고통에, 항상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고통의 원인이 딱 거기에 있는 거예요.
어느 스님이 깨달은 분한테 가서
“열반이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열반을 구하고 있거든.
“열반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큰스님이
“생사가 없는 곳이니라” 이렇게 답했어요. 맞죠?
“열반이 무엇입니까?”
“생사가 없는 곳이니라”
“어떻게 하면 생사가 없을 수 있습니까?”
질문의 순서가 맞죠?
“열반이 무엇입니까?”
“생사가 없는 곳이니라”
“어떻게 하면 생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답변이
“지금 네가 공연히 일으키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참 요 말이
본래 본질은, 우리의 본질은 본래 청정한데
그것은 본래 갖추고 있는데
한 번도 이거를 돌아볼 생각을 안 한다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양말 신고 계세요?
그렇게 신고 있어요.
본질을, 그렇게 딱 이 살에 붙어서.
근데 양말 못 느끼죠? 양말의 존재를 못 느끼죠, 거의?
너무 당연해서, 너무 친숙하고, 너무 익숙해서 못 느끼잖아요.
그래서 놓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자기를 두고 멀쩡하게 밖에서 자기를 찾은 거예요.
그러니까 뭘 찾는 것 자체가 의식이
보세요, 의식이 자기를 두고 이거를 찾았다, 이거예요.
찾을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의식이 자기를 두고 찾으면 찾아지겠느냐고요.
아, 이 원리다 이거예요, 이 원리다.
부처님이 깨닫기 직전에
마왕이 와서 계속 방해를 한 거, 유혹한 거 아시죠?
예수님도 광야에서 유혹당하고
부처님도 깨닫기 직전에는 마왕이 와서 계속 유혹을 했어요.
좋은 글로, 좋은 글로 유혹을 이렇게...
식색명이죠, 뭐.
인간의 유혹은
식은 돈이고
색은 남녀고
명은 명예고
이 세 가지예요, 욕망의 대상은.
그걸 가지고 유혹을 했다 이거예요.
근데 부처님이 그때 안 넘어갔다.
안 넘어가니까 최후에 마왕이 부처님에게
“당신이 그러면 깨달았다는 것을 무엇이 증명하는가? 누가 증명하는가?”
이렇게 물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손가락으로 땅을 대면서
“지신이 증명한다”
이렇게 말을 했다고 기록은 돼 있어요.
부처님이 증명하는 것은 땅이 답이 아니고
땅에다 손을 짚으면 느낌이 있어요? 없어요?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이걸 의식이라고 하건, 정신이라고 하건, 있다 이거예요.
없어요?
없으면 때려주면 ㅎㅎㅎ
하여튼 물었을 때 때려주면...
때려 주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잖아요.
덕산방이라고 해서
덕산은 법을 물을 때
방, 몽둥이 방자거든요. 방망이, 방 몽둥이로 때렸다.
임제할_ 임제는 물으면 고함을 질렀다, 귀가 멍하도록.
황벽은 또 임제를 때렸다.
지금 뭐예요?
지금 이 순간 땅에다가 이렇게 하면
이거 느끼는 것이 있지 않나요?
느끼는 것이 뭐예요?
저는 제가 배운 교육에 안에서 표현하라고 그러면
가장 가까운 표현은 저는 의식이에요.
내가 지금 살아 있고, 의식이 있고
의식이 이렇게
닿으면... 제 거는 되게 맨드럽다. 이거 책상이.
되게 반들반들해서 되게 매끄럽네요.
매끄럽다고 하는 걸 아는 게 있잖아요.
이게 별거냐고요.
이거 처음부터 있지 않나?
그러면 보세요.
이렇게 느꼈을 때 확인되죠.
안 느껴도 확인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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