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마음과 의식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 팔만대장경의 핵심: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요약하면 '마음(心)'이며, 이는 현대적으로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00:00].
- 의식의 두 측면: 의식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생각, 감정과 본질로서의 변치 않는 의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01:00]. 서구 사회에서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의식을 주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01:30].
- 현실의 본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의식(識)의 발현이며, 마치 LED 화면에 보이는 이미지와 같습니다 [02:29].
- 변화하는 현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카페에서의 경험이나 강의 내용이 사라지는 것처럼,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02:59].
- 실체의 부재: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실체가 아닌 이미지이며, 물에 비친 달과 같습니다 [05:29].
- 하나의 의식: 근본적으로 모든 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팔만대장경은 이러한 세계의 실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06:29].
- 촉감과 의식: 손으로 바닥을 만질 때 느껴지는 촉감 자체가 의식이며, 불교에서는 이를 신식(身識)이라고 합니다 [07:41].
- 유식(唯識):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의식의 경험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의식뿐입니다 [08:59].
- 영화 속 비유: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은 영화 속 인물과 같으며, 영화 속 인물이 화면 자체를 직접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현상과 본질은 차원이 다릅니다 [09:42].
- 깨달음의 가능성: 현상 세계를 직접적으로 '터치'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이 공(空)한 화면 위에 나타나는 이미지임을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10:30].
- 장자의 꿈: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경험은 진정한 자아(아이덴티티)는 나비도 장자도 아닌, 꿈이 나타난 의식 그 자체임을 시사합니다 [11:29].
- 의식의 유희: 하나의 의식이 다양한 꿈(현실)을 꾸며 여러 '게임'을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13:15].
- 부동지(不動地): 화엄경에서 48번째 단계인 부동지는 수행자가 자신의 존재 중심이 화면(본질)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16:58].
- 집착으로부터의 해탈: 현상 세계에 집착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며, 부동지에 이르면 현상에서 벗어나 본질과 하나가 되어 해탈을 얻습니다 [17:58].
- 수행의 종결: 부동지에 이르면 모든 것이 본질 안에 있으므로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어 수행이 종결됩니다 [23:28].
- 게임으로서의 인생: 인생은 일종의 게임과 같으며, 고통과 어려움은 게임의 레벨을 높이는 요소입니다 [26:44].
- 마음의 두 측면: 마음은 현상적 마음(mind)과 본질적 마음(의식, awareness)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8:38].
- 달마와 양무제의 대화: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불식(不識)"이라고 답한 것은 양무제가 현상 세계에 갇혀 진실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9:14].
- 깨달음의 본질: 깨달음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으며, 꿈속의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32:09].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마음 심(心)이라고 한다./
이제 그 마음 심(心) 할 때 이 심(心)을
그 최근에 이 강의를 할 때만 해도
마음 심(心)자라는 말은
불교에서 쓰는 용어라서 그대로 잘 쓰고 쓰는데
일반적으로 종교와 관계없이 말을 한다면
마음 심(心)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우리들의 의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전체가 마음 심(心)이다 할 때
이 마음 심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의식이고
의식 안에 의식이 일어난
그러니까 의식의 감정과 생각이라고 하는
의식이 일어나는 의식.
다시 말하면
이 세계가 하나의 의식인데
근데 그 의식이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현상으로 일어난 의식
그리고 본질로서의 의식.
그러니까 구태여 말하자면
이렇게 구분해서 쓴다면
일어난 의식인 현상으로
일어나는 의식인 생각과 감정을
일반적으로 서구사회에서는 마음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같은, 하나인데
그래서 참 스펙트럼이 넓은 말이에요.
마음이라는 말이.
그래서 이거를 현대어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서
지금 저는 그런 용어를 쓰고 싶어서
설명을 드리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이
바탕으로 변하지 않는
항상 바탕으로 깔려 있는 본질의식이 있고
그 본질의식이 인연 따라 현상으로 드러나는
현상의식을 주로 마음이라고 불러요.
서구에서는 [마음] 그러면
거의 [생각]을 마음이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우리가 가닥을 치고 공부를 하자는 뜻이고.
현재 세계의 모습이
한 개의 의식이라고 하는 이 LED 위에
지금 보이는 이 세계가
이 의식이 스스로 발광을 하고
그 발광이 이 다양한 모양으로 지금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아침에 햇살이 비춰져 드는 카페에 앉아서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가
지금은 인사동 선원에 강의가, 지금 이 화면에.
그러니까 지금 핵심은 뭐냐 하면
1시간 전에 카페는 사라졌죠. 그렇지 않나요?
조금 이따가 나중에 확인해 보세요.
1시간 뒤에 돌아보면
1시간 전인 지금 이 수업이 사라지고 없겠지요?
근데 여러분, 어떤 게 진짜일까요?
1시간 전에 카페에서 커피 마시던 그 나가 진짜 나예요?
지금 마이크 들고 말하는 나가 진짜 나예요?
아니면 1시간 뒤에 그 나가 진짜 나예요?
수없이 바뀌는데 이 나가.
그리고 희한하게도 꿈을 꾸면 이 모양 이 꼴이 아니거든.
제가 몇십 년 전에 살았던
스페인 마드리드 젊은 시절에 뿅 나타나서 또 이렇게 하면
어떤 게 나지? 이래 되잖아요.
현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실체의 나는 아닌 거죠.
하나의 이미지인 거죠.
그럼, 구태여 말을 하자면
그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더라도
그 이미지가 나타나는 화면 자체, 그건 안 변하는 거죠.
그러면 보세요.
화면 자체 입장에서는
이게 지금 제가 이야기가 아니고
공상과학 이야기가 아니고
눈앞에 보이는 이 세계의 실상이에요.
그러면 이 화면의 입장에서는 항상 하나일까요? 여러 개일까요?
화면 입장에서는 항상 하나죠.
그리고 그 하나 안에 다양한 개체들이 주관 객관이 함께
이렇게 지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세계가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러고 있죠,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우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제행무상이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개체들은 전부 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제법이 무아고
그러니까 인연 따라 나타나는 모든 개체들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당연하죠.
아예 실체 자체가 없는 거죠.
이미지다, 이거예요.
물에 비친 달처럼 이미지다, 이거예요.
근데 그 물에 비친 달을
실제로 물에 비춰서, 너무 달인데
실제로 그 달을 딱 이렇게 만지면 어떻게 될까요?
달은 없고 물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지금 하나 바탕은 하나인데
나타나는 이미지는 수없이 많다, 일체다 할 때
그 현상과 본질의 관계가
실제로는 만지면 하나뿐이다, 이거예요.
하나다.
드러난 것들도 낱낱이 하나가 다 결국은 의식이죠.
의식으로 대동 통일되지 않나요?
그러니까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 그 수많은 법을 설하셨지만
이거를 말 한 거다, 이거예요.
결국 이 세계의 실상이 지금 그렇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면에서 말을 했지만
모든 것이 다 마음 심(心)자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그 내용뿐이다.
저 석굴암 부처님이 앉아 있는 이게 항마촉지거든요.
마구니를 항복 받기 위해서
촉지_ 땅에다가
촉_ 요 엄지손가락을 땅에다가 딱 댄다.
왜냐하면 부처님 깨달으실 때, 성도할 때
마구니가 부처님을 계속 흔들었거든요.
그러면서 흔든 것 중에 하나가 그 질문을 한 거죠.
“당신이 깨달았다는 걸 누가 증명할 거냐?” 그랬죠.
“당신이 깨달았다는 걸 누가 증명하느냐?” 할 때
“무엇이 증명하느냐?”
이 화면이 변하지 않는
이걸 여기다가 딱 여기 증명하고 있다, 이거예요.
여러분, 오른손을 바닥에 한번 만져보세요, 바닥에.
촉감 옵니까?
의식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촉감 자체가 의식인 거예요.
불교에서는 색성향미촉, 안이비설신
손이 신이죠?
신이 촉했다 이거예요.
그럼 이게 신식이다, 이러는 거예요.
이 느낌이 있죠?
느낌이, 손이 몸이죠.
몸으로 느끼는 느낌이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신식이다고 했다.
보이는 것은 안식이라고 하고.
다시 말하면 그 느낌 자체가 식이다는 거예요.
식이라는 말이 식= 의식이라는 말이에요.
결국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전부 다 의식을 경험할 뿐이에요.
따라 오십니까?
보이는 모든 것이 안식이에요.
모든 것이 식이다.
그래서 유식(唯識)이라는 말을 불교에서 또 쓰는 거죠.
오직 식뿐이다는 거예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식뿐이에요.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경험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비유를 든다면
저 TV 같다 이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TV 화면 자체하고
그 화면에 나타난 영화가 펼쳐진다면
우리가 영화 속의 인물이에요?
아니면 저 TV 화면 자체에 속하는 인물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인물이죠.
오케이? 맞아요?
그러면 영화 속의 인물이 저 화면 자체를 터치할 수는 있다? 없다?
없죠. 이해되세요?
차원이 다르잖아요.
현상의 차원하고 본질의 차원이 달라서
우리가 직접 터치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깨달을 수는 있어요.
지금 나타나는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하는
공. 혹은 공성이라고 하는 화면에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깨달을 수는 있어.
터치는 못하지만.
그러니까 이걸 비유해서
눈이 눈을 볼 수는 없지만
눈이 이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눈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깨달을 수 있다.
이 말 들어옵니까?
이걸 통해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이
의식이라고 하는 홀로그램 화면 속에
이렇게 비춰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깨달을 수는 있다.
장자의 꿈에 나비가 나타났다.
근데 깨 보니까 장자더라.
그러면 장자가 아리송하다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깨서
“장자가 꿈에 나비 꿈을 꾼 건지
아니면 이 순간 나비가
나비 꿈에 장자라고 하는 인간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데”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럼 뭐예요? 무엇이 진짜 본질이에요?
그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은 뭐였느냐 하면
“진짜는 나비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고
나비 꿈이 나타난 그것.”
이걸 선에서는 한 물건이라고 하네.
지금 의식이라고 하네.
나비의 꿈이 나타난 그 의식
또 그 꿈에서 깼더니
장자의 세계라고 하는 이게 또 나타났어, 거기에.
차이점은
장자의 세계는 조금 장편 영화고
나비 꿈은 단편 영화의 차이밖에 없을 뿐.
그러면 진정으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의식 자체죠.
나비건 장자건 의식이 인연 따라서 그 모양으로 잠시 나왔던 거죠.
실제로는 무엇인가?
한 개의 의식이 바탕으로 있으면서
다양한 모양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나왔다 들어갔다가.
일종의 한 개의 의식이 어떤 느낌이냐 하면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지금은 김 아무개라고 하는 게임을 즐기고 있어.
그럼 김 아무개는 게임 속의 캐릭터
꿈속에 나비 꿈을 꿨다 그러면
꿈이라고 하는 게임을 하고, 그 나비가 캐릭터
실제로 이걸 움직이는 건 뭐예요?
의식 자체다, 이거예요.
한 개의 의식이
다양한 꿈을 꾸고 있다.
혹은 다양한 모습을 지금 만들어내고 있다.
혹은 다양한 게임을 즐기고 있다.
근데 요즘은 저는 한 개 의식이
왜 게임을 즐기는지 좀 이해가 돼.
왜냐?
게임 하면 재미있거든요.
게임 안 하고 혼자 있으면 얼마나 심심할까?
이 의식이 그냥 텅 빈 채로 가만히 혼자 있으면
아마 굉장히 심심할 것 같아.
그러니까 게임을 하는 거예요.
근데 재밌는 거는
게임 속에는 아무리 죽어도 상관없죠.
여러분 안 그래요?
인생이 왜 이리 괴로운가?
안 괴로우면 인생이 재미가 없어.
그러니까 실컷 하는 거야. 지금.
그러니까 여러분 안심하고 사세요.
우리는 생로병사 때문에 노심초사하는데
게임이에요. 지금 이게.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이 펼쳐지고 있는 이 공간 자체.
이 공간은 허무한, 물질적으로 허무한 공간이 아니라
의식 자체로서의 공간이에요.
그게 지금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어.
그러니까 참 무상심심 미묘법이라는 게
한 개 의식이 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왔다가 들어왔다가
바쁘기는 바빠.
찰나생 찰나멸이라서 바쁘기는 되게 바빠요.
근데 그런 느낌이 들어요.
즐기고 있구나.
근데 그 의식의 꿈에 나타난 이 캐릭터는
자기가 태어났다.
뭐 김아무개다, 남자다 여자다
뭐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뭐 배우자고 누구의 부모고...
온갖 그 짐을 지고 끙끙대며 사는데
알고 보면 그게 꿈속의 일이라고 하는 이 사실이.
그래서 하여튼 놀라운 일은
우리가 멀쩡하게 살면서 꿈을 꾼다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꿈을 꾼다는 이 사실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또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여러분 소설 안 쓰나요?
저는 지금 조금 전에 카페에 앉아서
그 짧은 순간에 몇 편을 썼는지 몰라요, 저도.
잠깐 사이에 소설을 써요.
이 강의 들으면서도
또 한 생각 속에 빨려 들어가서 또 윤회하고 온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우리들의 삶이에요.
화엄경에서 이렇게 쭉 공부가 깊어지면
보살 단계가 나오는데
그 공부가 익어가는 그 단계가 화엄경에서 말할 때는 53단계가 있는데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기점이 뭐냐 하면
48번부터는 퇴전이 없다.
47번까지는 깜빡 소홀히 하면 다시 공부가 빠꾸가 되는데
48번부터는 백도가 안 되는 거.
48지 이름이 부동지예요, 부동지(不動地).
부동지가 뭐냐 하면
딱 자기의 존재 중심이
이 화면하고 딱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전에는 여전히
자기가 화면이면서 화면인 걸 까먹고
화면에 펼쳐지는 이 영화 속에
자기도 모르게 뛰어들어서
그 안에서 울고불고
제일 많이 하는 게 욕망하고 집착하는 거죠.
이해되세요?
이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에 뛰어들어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집을 나가서
뛰어들어서 붙잡고 놓지 못하고
막 아등바등하는 것이 고통이라는 거죠.
이게 지금 중생의 삶이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할 때
완전 해결은
펼쳐지는 영화 현상의 차원 안에서 잘 되는 게 아니라
그건 아무리 잘 돼도
그 복을 까먹으면 다시 육도윤회.
잘 되면 천상인데
천상 올라가도 그 복을 다 까먹으면 다시 또 지옥으로 또 떨어진다는 거예요.
왔다갔다 한다, 이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라
현상계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니라
부동지라고 하는 것은
딱 존재 중심이 바탕하고 딱 하나가 되는 것.
현장에서 나오는 것.
해탈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부동지_ 움직이지 않는 경지.
이 말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상이 아니고
현상으로 일어난 제행무상의 세계고
여기에서 집착하고 살면서 고통스러운데
불법을 만나서 무상심심 미묘법 다음에 뭐예요?
백천만겁 난조우 나오잖아요.
백천만_ 겁이 수없이 수없이 1천만 번의 겁이 흘러도
난조우_ 만나기가 어렵다.
현상 속에 나타난 이 주관을 나라고 사는 세월이
거기서 벗어나서
이 자기의 본래면목을, 자기의 실상을 깨닫기는 정말 어렵다는 거예요.
정말 만나기 어렵다.
근데 우리를 만났네요.
문득 이 말을 듣고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賣意)
그 부처님의 뜻을 우리가 깨달아서 부처님하고 하나가 된다, 이 말이잖아요.
우리들은 누구냐?
이 모든 것이 펼쳐지고 있는 의식 공간 자체예요.
의식이에요.
몸을 움직이는 의식.
이 그림에, 영화 속에 나타난 몸이 주관이 아니라
이 주관 객관이 동시에 성립하고 있는
이 영화가 펼쳐지고 있는
이 의식으로서의 공간 자체, 공성 자체
모든 색이 펼쳐지고 있는 공 자체가
우리들의 본래면목이다.
만법이, 모든 현상이, 이거 하나로 돌아갔다가
다시 인연 따라 이거 따라
이것에서 다시 나오고 들어가고 있다.
결론을 내면 여러분
부동지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바탕으로서, 나한테 있는 바탕이 자성이거든요.
그러니까 “자성이 나구나”
견성해서 “성품이 나구나” 하고 정착하는 것이 부동지.
보살의 팔지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이 부동지를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전체가 다 이거 하나지요.
오케이?
해인삼매할 때
바다에 그 큰 바다 같은 거울에
건너편 산이 싹 다 비춰서, 또렷하게 비친다고 할 때
낱낱이 다 바다다 이거예요.
그러면 나의 입장이
물에 비친 개체가 아니라
바다 전체가 나가 되면 다 나죠?
나 하나뿐이 없죠.
유식처럼, 유식, 오직 식뿐이다 하는 것처럼
전체가 다 나의 분신밖에 없죠.
그러니까 이 전체로서의 나는 법신이라고 하고
이거든 저거든 다 나밖에 없다
이런 말이 성립되죠?
그렇게 되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지금까지 계속 수행해 왔기 때문에
수행을 딱 하려고 하면
다 나니까 뭘 해야 될지 몰라.
여러분 이해되세요?
법화경에는 본질의 집을 나서서 현상으로
집을 나가서 현장에 가서 집착하느라고
본질로 못 돌아와서
객지 나가서 떠돌아서 거지 아이가 되어서 빌빌거리고 다니는 그 모습
중생이 그런 모습이라고, 그런 말 나오잖아요.
근데 이게 나의 입장이
이 화면 자체인 본질이 되어버리면
모든 현상이 본질 안에 있어요? 본질 밖에 나가 있는 거예요?
안에 있죠.
부처님 비유로서 이렇게 못 깨달은 사람이
깨달아서 들어오라고 했지만
내가 깨달아 들어오고 나면, 이 본질로 들어오고 나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본질을 벗어나서 있어요? 본질 안에서 흐르고 있는 거예요?
그럼 집 나간 적이 있어요? 없어요?
중요한 대목이에요.
여러분, 부동지가 되면, 본질의 입장이 되어 버리면
집을 나간 적이 있어요? 없어요?
나는 뭣 모르고 헤맨다고 거지처럼 돌아다녔지만
집 나가서 고생했지만
알고 보면 처음부터 나간 적이 없잖아요.
그러면 집 나간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게 수행이고, 마음공부인데
수행을 하려고 하면 이미 집이네.
그러니까 수행을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나중에는 부동지가 되면
수행을 할 수가 없게 돼. 할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디로 돌아가? 이미 집 안에서
그러니까 여러분, 이미 집에 도착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또 집으로 가요. 그렇지 않나요?
보세요.
여러분 속지 말라는 거예요.
집에 도착한 사람 입장에서는 수행할 필요가 없어요.
아니 수행할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고 수행할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게 수행인데 천지 사방이 다 집인데 어디로 돌아가요?
그렇잖아요.
그 수행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런 분은 뒤따라오는 사람한테
‘수행할 필요 없다’고 말을 해요.
그런 분은, 집에 돌아간 분은.
근데 집에 아직까지
나는 집은 따로 있고, 나는 지금 이 현상에서 집 나와서
여전히 “집에 돌아가야 돼” 하고 목마른 사람 입장에서는
수행을 해야 되죠.
이해되세요?
사람 입장에 따라서 다를 뿐이에요.
근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수행을 해야 돼요.
근데 열심히 하다 보면
다 왔다가 아니고
처음부터 집을 나간 적이 없게 되어서
수행을 할 수가 없게 돼버려.
그때까지는 수행을 해야 돼.
지금 이해되세요?
불법을 못 만났으면 이걸 못 깨달을 거 아니에요.
불법을 못 만난 사람이
이런 말을 듣고
처음부터 “이게 집이라고? 그럼 난 집 나온 적 없네” 하고 이해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 이거죠.
실제로 수행을 해서
수행할 수가 없게 되는 데까지 가야지 끝이 난다.
어디를 더 간단 말이냐?
이 전체가 다 이건데.
제 8지, 부동지가 되면 일체가 하나예요.
여기에 완벽하게 예외가 없어요.
일체가 하나예요.
사라지는 것에 눈길이 가면 허무한데
찰나 간에 또 샘솟는 이 새로운 시간
난생 처음 맛보는 이 새로운 시간에 눈길이 가면
너무너무 신나는 인생이 주어져.
그리고 죽을 정도로 마음껏 해도 돼.
왜냐하면 안 죽으니까.
그러니까 게임인 거예요.
여러분 기왕이면 게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좋아요?
온갖 게임을 하는 게 좋아요?
하는 게 좋죠.
또 게임의 강도가, 게임의 레벨이
초보 레벨이 좋아요? 자꾸 해서 올라가는 게 좋아요?
지금 여러분이 게임 레벨이 좀 강하다고 느껴지는 분은
그만큼 지금 레벨이 높다는 소리예요.
우리들의 모든 배우자들이
게임 속에 만만치 않게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 게임이 깊어지면 ‘몹’이라고 해서 ‘몹’
그 게임 속에 강적이 나타나요.
배우자들이 강적이에요, 그 화상이.
모든 가까운 사람들이 이 게임 속에 나타난 강적들이에요.
근데 그게 있어야 게임이 레벨이 높아가.
근데 그걸 극복할 때, 그다음 레벨로 또 올라가는 거예요.
그리고 부동지가 되면
게임을 안 해도 그만이고, 해도 그만이고.
그래서 자유로워진다는 거죠.
자유로워진다.
이게 꿈인 줄 알고, 게임인 줄 알고, 게임을 해.
그러면 좋지 않나?
걱정이 없죠.
게임인 줄 알고 하는데.
/붓다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줄이면 마음 심(心) 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어도
해결책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마음 깨달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마음은 두 가지예요.
현상의 마음이 있고, 본질의 마음이 있고
이걸 구분해서
현상의 마음을 마인드라고 하고
그리고 이 본질의 마음을 의식, consciousness 혹은 awareness라고
이렇게 구분해서 부를 뿐이에요.
이 마음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들어와 있는 입장에서 꿈을 꾸는 마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달마 대사에게 양무제가
“당신 누구요?” 했을 때
달마가 불식(不識)
이 식(識)이네요.
불식_ 알 수 없습니다.
식은 안다는 뜻이거든요. 알 수 없다.
양무제는 영화 속에 있는 인물이죠?
근데 양무제가 “당신 누구예요?” 할 때는
영화 속의 인물을 물은 거잖아요. 달마라는.
근데 달마 입장에서는
이게 지금 다 꿈이기 때문에, 자기는 허깨비예요.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야.
근데 달마는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 화면 자체로서의 본질이라는 걸 알아.
근데 그 달마가 양무제에게
“당신 지금 영화 속에서 있으니까 꿈 깨세요”라는 말을
알아들을까요? 못 알아들을까요?
못 알아듣겠죠.
그러면 여기서 대화를 끝내야 되겠죠.
그러니까 불식_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이.
근데 그전에 대화에서 양무제가
정말로 진실되게 달마에게 법을 구하는 입장이었다면
아마 달마가 다른 말을 했을 거예요.
근데 보니까 안 통해.
안 통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미 펼쳐진 세계를 철석같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어, 영화를.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어.
그러니까 불식하고 이야기를 끝내고
그 양무제의 양나라를 벗어나서 갈댓잎을 타고
달마 도화도, 이 강을 건너서 북으로 올라갔다 이거예요.
그래서 소림굴에 가서 9년간
이런 사실을 알려줘도 수용할 그릇을 기다렸다.
상황 이해되세요?
왜냐하면 달마가 이 진실을
중국 땅에 전하러 인도에서 왔는데
그 당시 중국에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그런 그릇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왕과 만났지만, 아직까지 인연이 아직까지 안 됐구나 하고
들어가서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면서 기다렸다.
9년 만에 혜가가 나타나서
드디어 선이 그렇게 펼쳐졌다, 이거예요.
불식이지만 깨달을 수는 있어요.
깨닫는다는 거를
지금 꿈속에 있는 사람한테
꿈꾸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이 없고
제일 좋은 거는
두드리고 차서 깨우면, 꿈을 깨우면, 꿈 밖의 세계를 알잖아요.
꿈을 깬다는 것이 깨달음이에요.
말이 그렇잖아요.
깨달음이라는 말은
꿈에서 깬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깨달으셔야 돼요.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전부 다 소설이다.
그 영화가 펼쳐지고 있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관객이 10명 들어와 있네” 이런 말을 못하지요.
영화 속에 등장 인물이
갑자기 영화 속에서 상대방하고 연기를 하다 말고 정색하고
영화 밖의 관객을 향하여
“기사, 그 영사기 그만 돌려” 이런 말 하면 어떨까요?
파토 나겠죠?
파토 냅시다.
감사합니다.
'김홍근_깨달음과마음치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홍근[깨달음과마음치유 5강_1] 변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복기(~20:34) (0) | 2025.04.23 |
---|---|
김홍근[깨달음과마음치유 4강] 세상이 펼쳐지는 원리 / 의식 영화관 (0) | 2025.04.17 |
김홍근[깨달음과마음치유 2강] 무엇을 찾는가 / 이 순간, 살아서 움직이는 것 (0) | 2025.04.10 |
김홍근[깨달음과마음치유 1강] 꿈과 깸 / 인생의 숙제 풀기 (0) | 2025.04.09 |
[육조단경93] 그냥 맡기세요 | 본질과 현상이 하나가 된 선정 (0) | 202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