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깨달음과마음치유

김홍근[깨달음과마음치유 6강_1 (~17:35)] 산은 다만 산일 뿐이다 / 금강왕의 보검

Buddhastudy 2025. 4. 30. 19:08

 

 

  • 고집멸도: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로서, 고통의 원인(무명)을 제거하면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02:29].
  • 팔정도: 무명을 없애는 방법으로,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진, 정정의 여덟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01:59].
  • 무심과 평상심: 공부 과정에서 유심(일반적인 마음)에서 무심(분별심이 없는 상태)으로, 다시 평상심(지혜와 자비를 쓰는 상태)으로 나아가는 것을 설명합니다 [11:49].
  • 법신 변사: 본질(법신)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며, 현상 세계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5:10].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은

갈애

즉 사랑을 갈구하는 병이다.

우리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다.

세 살 때 형성되는 버릇의 핵심이

바로 갈애다./

 

3살 때쯤 나가 확실히 생기더라고요.

저는 우리 손녀 보고

세 살 딱 되니까

애가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오시는구나.

딱 나가 생기니까 그다음부터는 모든 분별이

나와 남이 딱 정해지는 순간부터

모든 분별이 시작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얘가 신이었는데

이제 인간 세계로, 고통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느끼겠더라고요.

 

/갈애는 대상에 마음을 뺏기는 집착이다./

마음을 뺏긴다’, 이 말도

참 좋은 표현 같아요.

 

자기를 돌아보면 내가 어디에 마음을 뺏기는가?

각자가 자기를 돌아보면 집착이 있어요.

사람마다 달라요.

미친놈마다 주제가 있다.”

이게 참, 사람마다 미쳤고, 미친 주제는 다 달라요.

그게 갈애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고통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다.

이 사랑에 대한 집착을 해결/

이제 멸이라고 해요.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방법이 도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팔정도가 된다./

 

- - - 도에서 도는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8가지인데

고통을 따져보니까 원인이 무명, 어리석음이더라.

고통을 따져보니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

그리고 원인을 따져보니까 무명여기에 []

그러면 무명이 없어지면

차례차례로 해서 고통도 없어진다, 이게 []

그러면 어떻게 하면 문명을 없앨 수 있는가? 그게 []

그래서 고집멸도

이게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가장 기본적인 불교 교리예요.

 

팔정도는 이런 거예요.

본질을 모르는 게 [무명]이에요.

아주 아주 간단 명료하게 말하면.

본질을 모르면

그 무지의 []이 집적이 되어서 잘못된 눈이 생겨요, 그게 []

그러니까 어리석음에서 어리석음이 쌓이면

자기 안에 잘못된 정보가 축적이 되는데, 그게 []이라고 해요.

그러면 잘못된 정보가 쌓이면

그 잘못된 정보가 그다음부터는 이 세계를 왜곡시켜서 만들어내요.

있는 그대로 못 보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왜곡되어서 보게 되는 것

그래서 [명색]이라고 하는 왜곡된 세계가 펼쳐져요.

 

돼지 눈에는 돼지 세계가 보이는 거고

부처 눈에는 부처 세계가 보인다.

무명--

식은 정보의 집적

[명색]은 잘못된 세계가 펼쳐지는 것.

 

인간한테는 6가지 감각 기관 [육입]

, , , , , (생각)

6가지 감각 기관이 있어서

이것이 밖에는 색, , , , , 법을 만나서

[] 접촉이 되고

접촉하는 순간 좋다, 나쁘다고 하는 감정이 바로 느낌이 일어나서 []

그럼 그 느낌에 따라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면 취하고 버리려고 하는 이런 [취사]라고 하는 것이 생겨서

그래서 결국에는 착각에 의한

나라고 하는 이 모든 행위의 주체라는 것이 생겨서 []

나가 생기면 언제 태어났다 []

[] 늙는다, _ 병든다, 그리고 []_ 죽는다 하는

생노병사의 고통이 일어난다.

 

이게 부처님이 파악한

무명에서부터

바로잡아 가면 무명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정견, 사실을 바로 본다.

본질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항상 입체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견]_ 바로 본다.

 

그다음에는 [정사유]_ 모든 사유가 그 정견에 따라서 바른 사유를 하게 되고

[정어]_ 거기에 따라서 바른 말을 하게 되고

[정업]_ 바른 업을 읍이 바라졌어.

[정명]_ 자기의 생활도 바른 안목에 따라서

직업이라든지 여러 가지 생활 자체가 바로 잡히고

[정념]_ 항상 깨워서 알아차리고 있고, 바로 알아차리고 있고

()이란 말은 지금 금(), 마음 심()

우리의 생각이, 마음이, 항상 현지에 와 있는 것이 정념입니다.

 

그러니까 팔정도는 무명의 코스가 아니라

무명이 명으로 바뀌면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진, 바른 정진

아까 발음 정진은 수본진심(守本眞心)

그 뒤에 따라 붙는 말이 제일정진(第一精進)

자기 본진심,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자각

이 자각을 본질이 자기를 자각하고 있는, 그게 바른 진심인데

그거를 지키는 것.

항상 깨어서 그 상태를 다져가는 것, 단단하게 굳혀 가는 것.

그것이 제일정진_ 최고의 증진이다.

 

우리로 말하면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드는 것이 가장 최고의 정진이다.

화두는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는 것

화두는 의식이에요.

화두를 든다이 말은

의식이 자각 상태로 깨어 있다, 이 말이죠.

그거 하나가 최고의 정진이다.

 

그래서 마침내 나를 영화 속의 인물로 알고 살다가

깨어나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영화를 꾸고 있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지금 의식 자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거죠.

 

그래서 정정_ 마지막에는 정정_ 바른 선정인데

바른 선정은 의식 자체가 바른 선정이에요.

그럼 의식 자체가 되면 저절로 항상 선정 속에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대정 속에 있다.

대정_ 큰 선정 속에 있다.

큰 선정은 본질 자체가 큰 선정

 

소정과 대정이 있는데

작은 선정과 큰 선정이 있는데

작은 선정은 뱀이 들어가는 거고

큰 선정은 용이 들어가는 걸로 비유를 해서

그래서 부처님은 대정_ 용을 인도말로 나가라고 하니까 나가대정이런 말을 써요.

용이 들어가는 큰 선정.

이거는 본질 자체가 언제나 큰 선정 속에 있다.

부처님은 항상 나가대정 속에 계시다.”

이 말은 항상 자기 자각을 놓치지 않고 사신다, 이 말이죠.

틈만 나면 앉으셨잖아요.

 

여러분, 부처님 많이 앉았어요.

아니 일상 끝나고 제자들 다 돌아가고 하면

당신 방에서 부처님이 뭐 하고 계셨겠어요?

선정 속에 있었지.

 

항상 자각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부처님도 노력하셨어요.

 

항상 우리 본질이 대정 속에 있어서

본질 자체가 오매일여예요, 생사일여고.

본질에는 생사가 없어요. 그게 일여에요.

생이나 사나

생사는 현상이고 일여는 본질이고.

그러니까 현상과 본질이 항상 하나인 상태에서 살아가셨다.

 

그게 부처님의 모습이라서

우리도 그러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산은 산이다(산시산山是山).

이것은 우리가 유심()일 때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생각에 시달리고, 욕망에 시달리고, 마음이 있는 상태는

산은 산이다.

이 말은 현상만 보고 있다, 이 말이죠.

현상만 보고 있다.

 

근데 산불시산(山不是山), 산은 산이 아니다, 이 말은

무심()이 되었을 때

유심은 색이고, 무심은 공

색에 살다가 공을 발견했을 때.

 

다시 말하면 무심이란 말은

우리가 분별하는 생각이 없을 때

분별하는 생각이 없으면 본질로 돌아가게 되는 거죠.

자동적으로 돌아갑니다.

 

무심으로 돌아가서

근데 저기서 대정으로 들어간다이 말은

산지시산(山只是山), 산은 다만 산일 뿐이다.

산은 다만 산일 뿐이다, 이 말은

현상에 있다가, 유심 이다가, 무심 본질로 갔다가

본질에 머무는 게 아니라, 다시 현상으로 돌아 나와서

본질과 현상이 하나가 되는 것

이거를 평상심(중도)이라고 해요.

 

중도의 다른 말은 즉이에요.

한마디로 쓴다면 색--

중도에 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되는 것

무심과 평상심.

 

이게 공부 과정이에요.

우리가 공부를 해서 현상만 알고

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유심으로 살아가는

그러니까 일반인들의 모습이죠.

 

근데 본질을 깨닫는다.

본질은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정신 있어요? 없어요? 정신 나갔어요?

그러니까 정신이 있다, 이거야.

정신 나갔다이 말은

생각 따라서 나가버리면 보고도 지금 보는 줄 몰라요.

다시 들어보시면

처음 듣는데?” 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온다고

 

그럼, 왜 그런가?

그 순간적으로 깜빡 무슨 생각에 빠지면

눈앞에 보고 듣는 것이 싹 사라져 버려, 까맣게 돼 버려요.

이해되죠?

 

본질이 드러나면 무심

유심이 무심이 되었다가

무심에서 다시 현상으로 나와서

지혜다, 이거야.

지혜와 자비를 쓰는 것이 평상심이라서

 

우리의 목표는 무심보다도 평상심에 있어요.

그러려면 무심이 확보가 돼야 돼. 확립.

생활에 기본 나의 상태로 무심이 확보된 상태에서 경계를 만나면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평상심을 쓰고

다시 무심으로 돌아가고.

 

무심이 기본 ±0 상태

±0를 나의 생활의 기저로 삼고 있다가

경계를 만나면

거기에 따라서 마음을 일으키되

지혜롭게 한다, 이거죠.

그리고 다시 무심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거를 금강왕의 보검이라고 해서

상대를 만나면, 경계를 만나면

금강왕의 보검을 쫙 뽑아서 착착 쓰고

끝나면 칼집에 탁 넣어둔다.

칼집에 넣어둔 상태를 무심

그리고 쓰는 거를 평상심.

 

무심과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하기

이게 우리 공부예요.

그게 중도다.

무심과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이 중도.

 

공부 과정에 보면

사람들이 산은 산이다, 유심의 상태에서

무심이 한 번 되면

워낙 유심에서는 번뇌에 시달리기 때문에

번뇌에 시달리다가

번뇌가 사라지는 본질의 마음자리, 공을 한 번 발견하면

자기도 모르게 또 공에 집착하게 돼요.

공에 집착하면 죽은 목석같은 상황이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게 아니다 이거죠.

어차피 이 현상은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현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 목표예요, 우리 공부가.

여기를 떠나가지고 어디 가 있는 게 아니고.

 

그래서 여기서 지혜롭게 사는 평상심이 되는데

공부에서 무심을 본 사람이, 한 번 공을 본 사람이

거기에 집착하는 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법신변사(法身邊事)라고 불러요.

법신_ 이 몸이 나가 아니고 본질이 법신이에요.

그 본질이 나다하는 걸 한 번 깨달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 본질 자체에 또 집착하는

그런 미련이 있어, 그런 집착제 병이 있어요.

그러면 법신이 오히려 변사가 된다고 하는 말이에요.

 

변사는 아직까지 적중 못하고, 좀 어긋나 있다.

변두리, 법신이 변두리 일이 돼버리는

그러니까 법신에 집착하면 법신변사가 된다.

이 말은 선에서 참 많이 해요.

 

그래서 법신변사에 머물지 말고

법신도 버리고

화신 보신으로 돌아 나오는 게

역시 산이다이 말이에요.

산은 산이 아니다는 법신이고

 

산은 역시 산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법신이지만

이 현상이 펼쳐지는 한 에는

이 화신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이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선다.

이게 목표다 이거야, 공부의 목표.

 

그래서 되게 그 선사들이 하는 말은

법신변사에서 머물면 아깝다.

그래서 완전히 법신조차도 버리고 이 세상으로 완전히 돌아 나와서

그렇게 해서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것,

 

무심에도 머물지 말고

무심도 한 겹 막혔다, 이 말이에요.

무심에 집착하면 법신이 오히려 변사가 돼 버린다.

그래서 무심도 한 겹 막혔다.

더 나아가서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쓰는 게

평상심이 도다.

 

하여튼 12연기가

무명에서 고통을 가는 이 연쇄가 있고

벗어나면 팔정도가 펼쳐진다.

깨닫게 되면 팔정도의 삶을 살게 된다.

이제 그걸 한번 지적을 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