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효 대사의 해골 물 이야기를 통해 [00:04] 한 생각이 우리 삶을 뒤집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공부의 핵심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각을 보고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00:30].
- 생각과 의식을 구분하며, 보통 사람은 생각을 자신이라고 여기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생각을 보는 의식을 인식한다고 강조합니다 [00:55].
- 우리가 경험하는 삼라만상은 의식 속에서 인연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며, 기억은 실체가 없는 이미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02:16].
- 우리의 본질은 현상을 경험하는 의식이며, 이 의식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04:00, 04:59].
- 꿈속의 비유를 통해 꿈을 꾸는 의식이 꿈의 세계를 경험하지만 꿈 자체에 속하지 않듯이, 우리 또한 현상계를 경험하는 의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05:09].
-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몸이 아닌 본질인 의식이라고 답하며, 현상계는 의식이 꾸는 꿈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06:18].
- 보는 행위는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 의식이며, 의식은 불변하고 현상계의 변화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강조합니다 [07:29].
- 현상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미혹시켜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통받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08:31].
- 응무소주의 가르침처럼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의식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중도의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10:29].
- 견성은 생각을 통해 생각을 보는 의식 자체에 눈을 뜨는 것, 즉 의식의 발견이라고 정의합니다 [32:57].
- 자신의 본래 면목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보는 그놈이 바로 성품(부처)**이라고 강조합니다 [20:58, 21:58].
- 우리의 의식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중중무진의 세계가 각자의 의식 속에 비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26:12, 30:27].
- 고통의 소멸은 우리가 의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현상에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35:09].
- 자신이 가장 집착했던 것은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생각, 즉 진리관이었다는 경험을 공유하며, 마지막 한 생각을 놓아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39:26, 42:07].
/원효대사는 무덤 속에서 자다가 일어나서
시원하게 물을 마셨는데
나중에 그것이 해골물인 것을 알고는 탈이 났다.
우리 삶이 그렇다.
한 생각 때문에 뒤집어진다. /
그 한 생각
결국 공부는 자기한테 일어나는 한 생각을 보고
-속지 않는 것
-따라가지 않는 것
그게 공부의 전체라고 할 수 있어요.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한테 생각이 일어나는 걸 보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 나냐?” 그럴 때
생각을 보는 것은 의식이에요.
생각을 보는 것은 의식.
-생각이 나냐?
-생각을 보는 의식이 나냐?
항상 그게 급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생각이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생각 따라다니는 거죠.
근데 이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생각을 본다.
그러면 생각을 보는 것은 의식이죠.
그 차이점을 빨리 캐치하셔야 돼요.
생각과 생각을 보는 의식
그러면 생각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결국에는 의식은 항상 있고
생각은 의식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의식이 자꾸 익어지면
의식의 존재에 눈을 뜨고
자꾸 의식이 자기한테 실감이 나면서 익어지면
그 의식은 항상 눈앞에
지금도 눈앞에 이렇게 투명한 공간이죠.
투명한 공간에
그러니까 이게 지금 의식.
의식의 공간에
인연 따라 삼라만상이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거죠.
생각뿐만 아니고
형상과 소리, 감정, 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고 난 뒤에는 기억으로만 남죠.
기억은 이미지죠.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기억은 하나의 이미지죠.
이 기억을
몽환_ 꿈 같고, 영화 같고
포영_ 물거품 같고, 아침이슬 같고
몽환포영_ 그림자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지금 눈에 보이는 이것이 금방 지나가니까
지나가고 나면
기억으로만 남으니까
그것이 마치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도
꿈 같고 영화 같다.
그게 지금 공부의 가장 포인트예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이 모든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러니까 생각을 보는 사람은
결국에는 생각을 통해서
생각을 보는 의식 자체에 눈을 뜬다.
의식의 발견이 견성이에요.
의식이 바탕이라는 바탕 성, 본질 성
의식이 본질이고
의식 속에 나타나는 삼라만상은 현상이고
그러면 삼라만상은 의식이 나타난 거예요.
우리는 누구인가?
이 현상을 경험하는 자.
경험하는 내용은
지금 이 현상을 보고
보는 자, 또 듣는 자, 느끼는 자, 그리고 아는 자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현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의식.
그래서 그 의식은 놀랍게도 이 현상에 속하지 않아요.
의식은 본질로서 이 현상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마치 비유하자면
꿈꾸는 의식은
꿈을 경험하고 있는데
꿈꾸는 의식이 꿈의 세계를 경험하고는 있는데
근데 그 의식이 꿈 자체에 속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꿈을 꾸는 거라서
그리고 꿈을 경험하는데
경험하는 그 의식은
현상계, 혹은 꿈을
꿈속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럼 속에도 ‘나’가 등장하지요.
따라서 꿈속에 등장하는 그 ‘나’가
실제로 그 꿈을 경험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꿈을 꾸는 의식이 꿈속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어요.
지금도 똑같아요.
우리는 누구인가?
몸이 아니고
몸은 현상계예요.
현상계가 아닌 본질인 의식이다.
그 의식이
이 순간 현상계를 꾸고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경험을 하고 있고
근데 그것이 기억으로 남잖아요.
그럼, 그 기억이
현상계에 출연하고 있는 김아무개 하는 이 나 한때 속하는 게 아니고
그 기억은 의식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따라오기 힘들죠?
제가 쭉 이야기한 이 말을 따라오기가 쉽지 않죠.
한 번 웃고 넘어갑시다.
가랑이 찢어질라. ㅎㅎ
근데 자꾸 듣다 보면
처음에는 이게 참 따라가기 힘든데
자꾸 듣다 보면 따라잡는다, 이거예요.
따라잡는 게 공부예요.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데
보고 있는 이것은 이 현상계에 속하지 않아요.
보고 있는 이것은 의식이잖아요.
그러니까 의식은 불변해요.
의식은 현상계가 나타나기 전에도 있었고
나타나는 지금도 있고
그리고 이 현상계가 자꾸 변해가는데
미래에도 의식은 있다.
의식은 불생불멸이다.
근데 그 의식 속에
지금 인연 따라 이 모양이 생-멸, 생-멸하면서 바뀌어 가고 있다.
이게 실상이다, 이 세계의.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이 현상계를 실제로 믿고, 미혹되어서
마치 영화를 보다가
자기가 관객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영화를 보다가 영화 속으로
영화는
-보는 것과
-듣는 세계네요.
이 눈하고 귀가 영화를 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영화 속의 주인공하고 자기를 동일시 해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관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서 울고 웃고 하다가
끝나면 허무하게
“영화였네” 이렇게 된다, 이거예요.
지금은 우리가 보고 있는
지금 현상이라고 하는 영화는
불행하게도 계속 이어지네요.
계속 이어지니까
이게 영화인 줄 모르고
완전히 이 영화 속에 김아무개를
나는 의식인데
지금 이 현상계 전체를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의식인데
내가 의식이라는 걸 잊어 먹고
이 영화 속에 집착해서 뛰어든 거예요.
집착해서 뛰어들어서
이 영화 속에 등장하고 있는 이 한 인물을
나라고 착각을 해서, 동일시를 해서
지금 김아무개를 통해서
현상계에 집착하고, 지지고 볶고, 드라마를 쓰면서
“내 인생은 한 편의 대하소설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보통 사람들의 지금 모습이다.
따라서 마땅히
응무소주_ 이 현상계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이 여기에 머물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의식으로서 지금 꿈의 세계를 기왕 꾸고 있으니까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이게 지금 중도의 삶이다.
그래서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무심이라고 하고
자유롭게, 기왕 꾸는 꿈이니까
이 속에서 이 몸을 통해서
지금 이 현상계에 개입을 하고 있죠, 사실상.
자유롭게, 현상계의 전체가 잘 되게 하는 게 평상심이다.
그래서 무심과 평상심이 지금 중도다.
쭉 한번 이야기를 해 봤어요.
자꾸 이것을 들을 때마다 따라잡는 게, 이 말을 소화하는 게
빨리 실력 향상을 가지는 지름길이에요.
혼자 애쓰는 것보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따라가 보면
내가 지금 소화가 되는 부분이 있고, 소화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소화가 안 되는 부분이 해결해야 할 숙제인 거죠.
그 숙제를 풀다 보면
이런 말이 내 말 같아. 너무 당연해져.
그러면 성경을 봐도, 불경을 봐도
그 말이 전부 다 내 말같이 들려.
불경에 ‘일체를 마음이 만든다’ ‘일체를 의식이 만든다’
이런 말들이 참 소화가 안 된다.
왜 소화가 안 되는가?
간단해요.
일체가 지금 실물로 보이니까
의식을 모르면 현상계를 실재라고 하고 살 수밖에 없어요.
공부는 현상계만 사실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문득
-이게 다일까?
-정말 나는 누구일까?
-이 세상이 지금 눈에 보이는 이게 다일까?
그러면서
-뭔가가 이상하다
-내가 뭔가 빠뜨린 것 같다 하고 돌아보다가
의문이 일어나서 의문을 가지고 살다가
이런 법문을 만나면
법문에서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멀쩡한 여러분
지금 몸이 이렇게 있습니다.
몸이 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물질입니다.
근데 이 세상에 물질만 있나요?
이 세상에 아니 지금 당장 눈앞에
지금 이 몸이 이렇게 있잖아요.
물질이 있는 건 보이니까 이건 확실하죠.
근데 물질만 있나요?
물질이 이렇게 있다는 걸 아는 것은 정신이지요.
물질과 정신할 때.
그러면 무엇이 정신이지? 하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이거예요.
지금 물질은 있어요.
몸은 물질이죠.
물질이 자기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는 없어요.
물질이 스스로 자각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이 몸은 물질이니까
몸이 이렇게 있는데
지금 이 순간 몸이 이렇게 있고
몸만 있는 게 아니고
항상 몸은 환경하고 같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말을 듣고
너무 당연하지, 너무너무 당연하지.
여러분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면 그 당연한 그 정신, 혹은 의식
혹은 뭐 본심, 마음이라는 말도 쓰긴 씁니다.
그게 뭐냐 이거예요.
의식이 뭡니까? 정신이 뭡니까?
지금 보는 이거다, 이거예요.
신기한 거는, 지금 여기가
여러분도 그런 느낌이 알지요?
보고 알지요.
느끼고,
요 위에 있는 부처님처럼 손가락을 땅에 딱 이렇게 대면
촉감이 이렇게 느끼잖아요.
여러분 엉덩이 감각이 있나요?
그 느끼는 거
감각을 느끼고,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알고
대표적으로 4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당체, 지금 의식이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부처님께서 책이 여기도 나오지만
“이거 참 깨닫고 보니까
누구나 이거 가지고 있네.”
근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바로 나가면 인사동 거리인데
인사동 거리에 저렇게 다니고 있는 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십니까?” 그러면
이 현상계 속에 있는 몸을 나라고 해서
“누구입니다.”
거의 100명 중에 99명은
“나는 누구입니다” 그러겠죠.
근데 그 누구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을 다 뭉뚱그려서 누구라고 하겠죠.
근데 실제로는 그것은 현상이고
실제로는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식을 자각하는 순간
의식이 어디 있는가?
지금 눈앞에 이게...
좀 신기하긴 해요.
어떻게 신기하느냐 하면
참 신기하다.
어떻게 내 머리가 안 보이고
실제 보이는 것은 이 세계가 보이지?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을 사실은 우리가
자기 눈을 자각하지 않지요.
그렇지 않나요?
눈앞에 있는 이게 통으로 하나의 의식인 거예요.
그래서 자꾸 이거를
수정구슬 같다, 혹은 거울 같다, 거울보다 홀로그램 같다.
그러니까 지금 의식의 홀로그램 속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내 몸을 포함해서 나타나서.
여러분 실제로 보는 것이
내 몸이 의식을 봅니까?
아니면 의식이 내 몸을 봅니까?
다시
내 몸이 의식을 보는 겁니까?
아니면 의식이 내 몸을 보는 겁니까?
이 말 들어오세요.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 몸이 의식을 보느냐?
아니면 의식이 내 몸을 보고 있느냐?
내 몸 보이죠.
보는 것은 내 몸이 아니다, 이거예요.
다시,
지금 내 몸이 보이잖아요.
자기 손 보세요.
누구나 손 보이잖아요.
그러면 이게 내 몸이잖아요.
그러면 실제로는 내 몸
다시 말하면
김아무개가 의식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의식이 김아무개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의식을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 할 때, 이때 마음은 의식이니까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신이라고 해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실제로는, 실상은
내가 신을 보는 겁니까?
신이 나를 보는 겁니까?
아이 뒤집어지지 않나요?
‘내가 뭘 본다’ 하는 게 전도몽상이라는 거예요.
정확하게 반야심경에
전도_ 뒤집어진
몽상_ 꿈 같은 착각
전도몽상은 뭐냐?
실제 보는 것은
본질이 현상을 보고 있는데
꿈꾸는 의식이 꿈을 보고 있는데
마치 꿈속에 나오는 사람이
꿈꾸는 의식을 본다고 착각하는 거와 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한마디 말 끝에
실제로 보는 이것은 지금 의식이 본다.
의식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다.
현상계가 의식 속에 이렇게 펼쳐지고 있다.
의식의 입장에서는
현상계는 거울에 비친 영상 같은 거예요.
요 핸드폰 액정에 켜진 그림 같은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자기의 본래면목을 빨리 알아채야 돼요.
근데 이거는 어렵지 않아요.
자기의 본래면목을 견성하기
견성_ 자기 본질을 보기, 자기 본질을 알아채기
이건 어렵지 않다.
하여튼 가르침이
견성_ 본질을 본다.
무엇이 견성입니까?
당나라 시대에 장관을 하던 배휴 제상이
황벽 스님한테 질문했어요.
“견성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견성입니까?
성품을 본다는 말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황백 스님의 답변은
황백 스님은 깨달은 사람이에요. 임제의 스승이고
견성이란
견_ 보는 놈이
성_ 본질이라는 뜻이다.
견즉성이다.
이거 중요한 말이에요.
견성이란 말 쓰잖아요.
우리가 견성이 무엇인가?
견즉성 보는 그것이 바로 성품이다.
이때 성품이 부처이기 때문에
성품을 부처라고 부르기 때문에
돌아가신 석가모니 부처님 말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보던 그것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면목이 지금 우리의 본래면목하고 같다.
본래면목은 안 죽는다.
티베트에 이런 말이 있어요.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할 때
이 나가 본래면목일 때는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라는 분을 낳았다.
그분이 부처님이 되었다.
그때 부처님이 되었다 할 때
그분이 몸을 가지고 부처가 됐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의 본래면목이 이 불생불멸의 의식이더라” 하는 걸 깨닫고
이 의식이 부처다, 이렇게 된 거죠.
의식이
마야 부인을 통해서
석가모니로 이렇게 나왔다 이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를 보세요.
우리는 다른가?
의식이 우리 어머니들을 통해서 우리를 낳았는데
우리는 누구냐?
몸이 아니고 멀쩡한 의식이다, 이거예요.
여러분 누구세요?
의식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꿈속에 나오는 그 나가
꿈을 보는 게 아니고
꿈 전체를 의식이 보고 있다.
아니 바로 오늘 새벽에 저의 꿈속에 선지식이 나타났는데
이렇게 손을 딱 잡고 서로 이렇게 봤다 이거예요.
근데 그 장면이
손을 잡고 이렇게 마주 보는 장면이
지금 기억이 나요.
그러면 그 시점이
그 꿈속에 나타난 내 눈을 가지고 있는 시점이 아니고
그 둘을 같이...
꿈속에 나타난 나하고, 선지식이 있는 걸
같이 제가 봤다니까요.
지금 분명히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제 말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우리는
꿈속에 나하고, 상대방하고, 환경하고
전체를 같이 보고 있어요.
꿈을 그렇게 봐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의식이 이 몸, 김아무개 하고, 또 관련된 사람들 환경을
지금 같이 보고 있어요.
아닌가요? 이게 안 보이나?
여러분은 제가 김아무개 보듯이 여러분은 자기 못 보나요?
자기를 같이 보고 있다 이거예요.
나와 세계를 사실은 같이 보고 있다.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견_ 보는 그놈이 바로
성품_ 부처다, 이 말이에요.
의식이 본다 이거예요.
지금 이런 면에서 여러분께서 직관적으로
“진짜로 그렇네.”
아, 이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내가 의식을 보는 게 아니고
의식이 나를 보고 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신을 보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지금 신이 나를 보고 있다.
신이 나를 포함한 이 전체를 보고 경험하고 있다.
근데 여러분 신의 입장에서 보세요.
신의 입장에서
여러분의 의식하고 나의 의식이 같은 거죠.
그러면 한 개의 의식이
의식은 한 개예요, 이 말 이해되세요?
-여러분의 의식이나
-지금 저의 의식이나
-여기 지금 수십 명이 수십 명이 있으니까 수십 명의 의식이
지금 서로 겹쳐지고 있죠.
여러분의 의식하고 제 의식하고 경계가 있나요?
첩첩이 겹쳐지고 있죠.
중중무진_ 끝없이
중중_ 겹쳐지고 겹쳐지고 있는데
이건 하나예요.
그런데 의식의 입장에서
제가 여러분을 보는 거 하고
여러분이 저를 보는 거하고 하고
이것이 서로 겹쳐져 버리면 헷갈리겠죠.
한꺼번에 의식의 입장에서는
그 수많은 눈을 통해서...
사실 의식은 이 수많은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
다만 그 보이는 것이
한꺼번에 겹쳐버리면 헷갈리지 않을까요?
마치 스크린 위에
온갖 빨주노초파남보를 한꺼번에 같이 비춰버리면
아무것도 안 보이듯이 맞나요?
빛을 겹치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서
하나만 이 눈을 통해서 보는 것만 보여주게끔
우리한테 허용,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이게 일종의 신의 전략이에요.
“시간이란 무엇이냐?” 하면
이 말을 누가 했더라?
그리스의 어떤 신비론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실제로는 영혼인데
영혼이란 말 이해하시겠어요? 무한대의 시간.
실제로는 영혼인데
우리 개체의 인간한테는
영혼을 한꺼번에 보여주면 우리가 수용을 못한대요.
짧게 사니까.
짧게 사는 개체한테 영혼을 탁 보여주면
우리한테는 우리가 수용을 못해서
하얗게만, 없는 것처럼 그냥 하얀 뿐이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영혼을 맛보게 해주기 위해서
인간한테는 찰나를
영혼을 잘라서
찰나를 맛보게 해준다.
그걸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른다.
실제로는 영혼인데
개체는 이 영혼을 수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개체가 수용할 수 있는 만큼의 시간만 허용한다.
그래서 영혼을 쪼개서
찰나 찰나를 우리한테는 느끼게 해주는데
그 찰나를 시간이라고 한다.
여러분 맞지 않나요?
그것처럼 우리는 전체인데
전체를 한꺼번에 우리가 수용할 때는
이것이 우리가 그릇이 작아서 못 담으니까
이 몸을 중심으로 한 세계만 이렇게 보게끔 만들어 놓았다.
근데 의식 자체한테는
여러분, 의식 자체한테는 눈이 지금 많겠죠.
한 개인 의식한테는 눈이 많겠죠.
그걸 천수천안이라고
의식 자체는 손도 많고, 눈도...
이때 천이란 말은 많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수많은 사람을 통해서 의식이 이렇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말이 좀 이렇게 가면 굉장히 스케일이 커지니까
제가 약간 화엄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결국 이렇게 되면 최종 결론은 뭐냐 하면
화엄, 화엄경 들어보셨죠?
화엄의 세계는 한마디로 말하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고 표현하는 화엄의 세계
중중무진이라는 말도 화엄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개체 개체가 가진 의식이 이 보석이다.
지금 마니주, 수정체.
그래서 그것이 저한테도 있고, 여러분한테도 있죠.
근데 이것의 관계가
하나만 보면
모든 것에 다른 보석이
같이 이 하나 속에 다 비춰 보인다.
아침이슬 한번 보세요.
아침에 이슬이 맺혀 있겠죠.
가지 끝에 이슬이 맺힐 때 한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그 이슬 속에 이 세계가
360도, 온전한 세계가 이슬 속에 다 비쳐 있어요.
그러니까 이 무한대의 공간이
조그마한 이슬 속에 완벽하게 다 들어가 있듯이
그 속에 나도 있어.
우리의 각자의 의식 속에
이 무한대의 중중무진의 세계가 다 비춰 들어온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모든 것이 나의 의식 속에 다 비치고
또 나도 다른 사람의 의식 속에 비치고
이것이 서로 간에 중중무진의 무한대의 세계
그게 지금 우리의 실상이에요.
그래서 공부를 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화엄의 세계로 들어가서
화엄이란 말은
우리 한 명 한 명이 화_ 꽃이고
그 꽃으로 장엄되어 있는, 아름답게 꽃으로 장엄되어 있는 세계
근데 한 개 한 개의 그 꽃이 구슬이라서
그 구슬 속에 나머지 전체 구슬이 다 비춰서 다 보인다.
그 구슬이 뭐냐?
여러분 지금 자기 시야가 있나요?
느껴 보세요.
자기 시야.
시야 있어요?
그 시야가 수정 구슬처럼 맑지 않나요?
투명하게 맑지 않나요?
그게 지금 의식이라고 하는 이 본질의 세계.
근데 그것이 사람마다
완벽하게 같은 걸 갖추고 있어서
중중무진으로 이 펼쳐져 있는 이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다.
그러면 굉장히 스케일이 커지죠.
그래서 지금 인사동 선원 입구에 들어오시면
조그마한 팻말 붙어 있죠, 현판에.
now_ 이 순간
life is living you_ 생명이 당신을 통해서 살고 있다.
지금 보는 게 뭐냐 이거예요.
지금 이 순간 보는 게
의식이라고 하는 생명이다, 이거예요.
듣는 게 의식이라고 하는 생명이 듣고 있다.
느끼는 게 의식이라고 하는 생명이 느끼고 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척 보자마자 이렇게 딱 알아내는 게 지금 보자마자 안다.
김아무개가 하는 게 아니고
김아무개는 보이는 거예요.
이것도 중요한 전환이에요.
‘김아무개가 본다’에서 ‘김아무개도 보인다.’
그럼 실제로 보는 것은
지금 이 투명한 이것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한번 확 뒤집어져야
전도몽상이 바로 잡혀야 되는 것.
이걸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이걸 뭐라고 부르냐 하면
‘의식의 흐름’이라고 불렀어요.
의식의 흐름 따라 지금 한번 쭉 한번 따라가 본 거예요.
그럼 결론은 무엇인가?
역시 화엄이라고 하는 그 세계.
여러분의 의식 속에 삼라만상이 이 순간 뭘 하고 있어요?
이런 말을 왜 하는가? 결론이 뭐냐?
결론은 뭐냐 하면 고통의 소멸이에요.
왜 이렇게 길게 말을 하는가?
이렇게 되면 고통이 소멸한다.
왜냐?
고통은 자기가 이 삼라만상 자체를
이렇게 나타나게 해주는 바탕으로서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만약에 까먹고
마치 관객이 자기가 관객이라는 걸 까먹고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서 주인공하고 함께 부침하는 것처럼
희로애락을 나누는 것처럼
우리가 의식이라는 걸 까먹고
의식 속에 나타난 영화 속에
지금 한 몸을 나라고 하고
그 몸의 인연을 가지고
지지고볶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집착하고 꽉 쥐고 고통받고 있다, 이거예요.
이 몸뚱아리가 나가 아니고
이 순간 보고
365일, 24시간, 모든 작용의 당체, 작용의 주인
실제로 하고 있는 이 현상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 지금 의식이다, 이거죠.
내가 의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의식 속에 출몰한 온갖 인연을 즐기지
거기에 일희일비하면서 정말 고통스럽게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모든 것이
이태백이 물에 비친 달에 매혹돼서 건진다.
원숭이가 물에 비친 보름달을 건지려고 하다가 빠져 죽었다는 거예요.
건지려고 하다가 빠져 죽는다는 게 뭐냐?
우리가 현상계에 매혹되어서
이게 그림자 세계인데
실체가 아니고
반영된 그림자 세계인데
이 세계에 매혹되어서
빠져 죽는 게 우리 중생에 지금 모습이다.
그것이 고통이다는 거죠.
근데 그 고통을 무렵쓰고
이 세계가 더 매혹적으로 보여서
이 세계에...
빠져나가고 싶지 않네.
정말 매혹되더라고요, 너무 아름다워서.
그걸 보고 있으면 이렇게 마취가 돼요.
보고 있으면 그 세계에 황홀하게 마취가 되어서
정말 빠져 죽는 것 같아.
그게 바로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소스 신화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서
자기애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는 그 순간을
나르시소스라고 하는 그 설화로 이야기해 놨잖아요, 신화로.
우리가 딱 그런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정신 차리는 것.
그래서 딱 정신 차리고 하늘을 보면
실제 달은 물 위에 있어요?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 있잖아요.
근데 그 하늘에 뜬 달이 뭐냐 이거예요.
지금 이 순간 보는 이것이
하늘에 뜬 그 달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고통을 통해서
고통의 종말, 고통의 소멸을 우리가 추구하는 게
결국에는 인생의 묘미가 아닌가.
고통이 없으면
여기서 빠져나갈 생각을 안 할 텐데
고통이 있기 때문에
뭔가가 지금 잘못되었다, 실상을 놓치고 있다.
근데 어떡합니까?
이렇게 매혹적인데.
진짜 냉철하게 말을 말씀드리면
저의 경우는
무서운 소리 하겠습니다.
저의 경우를 보니까
제가 정말 집착하는 것은
나의 가족보다도, 나의 재산보다도, 나의 명예보다도
제가 정말 집착하는 것은
저의 생각.
다시 말하면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 세계를 진리라고 짜 놓은, 저의 진리관
여러분 저의 총재산이
이 가까운 가족이나 재산, 은행 통장의 금액, 이런저런 박사 학위보다도
제가 정말로 집착하는 것은
제가 살면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짜놓은 저의 이론
이해되세요?
그게 제가 가장 집착하는 거예요.
제가 그것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더라고요.
다시 말하면
저 같은 경우는
세간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니라
저는 출세간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어요.
이 말 이해되시려나?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정교한 재산을 가지고
지적 재산을 총동원해서 짜놓은 그 진리관
‘이것이 깨달음이다’ 하는 그 깨달음
그것이 나를 구속하는 장본인이었어요.
이게 한 생각 때문에
평생 저를 고통스럽게 했던 거는 진리였어요.
참 진짜 끈질기게
제가 몇 살 때부터 이랬나 몰라
40년, 50년, 제 인생의 대부분을
진리가 나를 구속해 왔어요.
근데 꿈에도 몰랐어. 그걸
한 생각 속았다는 그 사실을 꿈에도 저는 몰랐어요.
저 딴에는 진짜 금과옥조로 믿었어, 그 말을.
근데 알고 봤더니
진리가 나를 평생 이 고생을 시킨 거예요.
집어던지면서 제가 속으로 참 너털웃음을 웃었네.
우리 모두가 다 쥐고 있는 게 있어요.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거
그거 발견하면서.
그 마지막 한 생각의 꼭지예요.
그 꼭지를 딱 떼야지 진짜 자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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