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깨달음과마음치유

[깨달음과마음치유 12강] 나라는 분리감 / 존재의 고향

Buddhastudy 2025. 5. 22. 19:08

 

진정한 자아는 육체나 생각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관찰하는 변치 않는 의식이라고 설명합니다 [32:27, 37:56]. 이 비디오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진정한 본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제한된 자아에서 무한한 의식으로 전환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32:52, 38:26].

  • 고통의 근원: 자아의 환상에서 비롯된 분리감 [02:19, 05:22].
  • 자아의 본질: 자아는 좋고 나쁨의 구별을 만들어 분리감을 영속시켜 현실에 대한 단편적인 인식을 초래합니다 [06:43, 06:56].
  • 진정한 자아: 의식은 덧없는 생각과 감정과는 구별되는 끊임없고 변치 않는 본질로 제시됩니다 [37:56, 38:12].
  • 해방의 길: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의식으로 인식하고 분리감에 뿌리를 둔 자아의 집착과 욕망을 놓아버리는 것 [12:30, 38:45].
  • 자각과 관찰의 역할: 자신의 생각, 습관, 인식을 판단 없이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자아에서 의식으로 정체성을 전환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08:42, 35:27].
  • 본래 마음 자리: 평화와 중립의 장소인 의식의 상태로 설명됩니다 [18:16, 21:16].
  • 자비: 모든 존재의 상호 연결성과 모두가 동일한 의식의 일부임을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23:29, 25:27].
  • 포기의 중요성: 고통을 유발하는 욕망과 집착을 놓아주는 것은 내면의 평화로 이어집니다 [13:16, 14:28].

 

모든 사람이 의식이 있죠.

의식이 부처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부처를 가지고 있어서

사실 부처라는 거예요.

 

근데 이 말을 못 믿지.

내가 부처라고?

이게 참 믿기 어렵죠.

 

모든 고통이

한 생각에 속으면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 생각을 보는 눈을 뜨는 것이

수행이고 마음 치유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근본 원인은 선악과

즉 분별심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라는 말을 참 잘 쓴 것 같아요, 상징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추방당했다.

왜냐?

그 선악과가 분별심이다.

 

여러분 하여튼 저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 게

이 마음공부를 시작한 저의 동기는 뭐냐 하면

존재 불만족이에요.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분명히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생이 불만족스러워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불만족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참 근본 고통이더라고요.

하여튼 뭔가가 하여튼 채워지지 않는

항상 2% 부족한 느낌

그것을 제가 분명히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왜 존재 불만족 때문에 고통스러웠는가?

그 원인은 지금 분리감이에요.

 

분리감

이 말이 진짜 중요한 거예요.

 

보통 마음공부에서는 분별심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분별심이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게 분리감이에요.

그 분리감의 정체가 에고예요.

 

존재 불만족의 원인은

지금 돌아보니까 에고였고

그리고 애고의 정체가 뭐냐 하면 분리감이에요.

 

지금도 만약에 우리가 이 몸을 중심으로

이 세상과 하나가 아니고

분리감을 느끼고 있으면

그 분리감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그리고 나와 남을 나누게 되고

그리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그 원인이

분리감.

 

그러니까 분리감은

분별심이 감정적으로는 분리감을 만들어내는 것.

 

/나라는 분리감/

여러분 나라는 분리감이 있죠?

/그게 지금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갈애, _ 갈증, _ 사랑

사랑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게 한다.

분리감은 불만족을 낳고

불만족은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을 갈구하게 한다.

그 만족을 채우려고/

 

그게 지금 우리들이 쥐는 꼭지라는 거예요.

이 현상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 인간이라고 하는 이 껍질을, 인두껍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게

불만족이 무언가를 지금 쥐고 있다, 이거예요.

 

저 같은 경우는 진리를 지고 있더라고요.

지 딴에는 고상했어.

지딴에는 모든 것 중에서 제일 고상한 척하느라고 그 진리를 쥐고 있었다.

끝까지 그리고 그 말을 철떡같이 믿었지.

진리가 나를 구원할 거라고 믿었죠.

 

근데 진짜 진리는 날 구원하지만

내가 잡았던 그 진리는 진짜 진리가 아닌 거죠.

이게 기독교에서 신과 우상이라고 하는 관계예요.

진짜 진리는 신 같은 건데

내가 잡았던 그 진리는 우상이었던 거예요.

다시 말하면 내가 만든 신.

 

선은 단도직입으로 진리를 바로 말하니까

우리가 부처라고 하면 부처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진리라고 한 것은

진리가 아니었어.

신이라고 하면 신이 아니고 우상이에요.

그러니까 버려야 되는 게.

 

그래서 보세요.

분별심이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저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은

존재 불만족이었어요.

존재 불만족은 나라고 하는 분리감에서 나왔어.

근데 나라고 하는 분리감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제가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은

진리를 붙잡고 있는 그 분리된 나가 있었어요.

 

그러면 지금 진정한 진리는 하나잖아요.

의식은 하나잖아요.

나누어지지 않잖아요.

 

허공을 나눌 수 있습니까?

의식도 허공 같아서 나눌 수가 없거든요.

근데 우리는 나눔으로써 진리를 등지는 거예요.

진짜 진리를 등진다. 의식을 등진다. 부처를 등진다.

근데 어떻게 나누는가?

내 딴에는 진리라고 함으로써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나누어진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예요.

우리가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가 할 때 핵심 포인트는

내 딴에는 이상을 만들어서, 정말 좋은 걸 만들어서

그 좋은 것을 추구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좋은 것이 있는 한은

반드시 나쁜 것이

그러니까 좋은 것이 아닌 것이 생기고

이게 나쁜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 세계는 두 조각이 난다 이거죠.

근데 이 세계를 두 조각을 내어야 에고가 존속해

그러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좋은 것을 추구하게끔 만들어요.

거기에 속아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래서 이거를 돌이키는 게

그래서 자기를 돌아봐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게 지금 핵심이다, 이거예요.

근데 자기가 자기의 자기가 추구하는 걸 알아채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자꾸 여러분은 도반과 대화를 해서

그럼 도반 대화를 가만히 들어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의 공통된 주제가 있어.

미친놈마다 주제가 있어.

그래서 계속 그 주제가 반복되고 있어요.

마치 진짜 고장난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입만 열면 그 주제를 반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걸 추구하고 있으니까

근데 본인은 몰라요, 그거를

무의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도반과 대화를 할 때 도반한테 부탁을 하세요.

여러분 친한 도반한테 부탁을 해서

내가 무엇을 자꾸자꾸 말하는가?”

입만 열면 내 상이 나오는데

나는 그게 나의 상인 줄 나의 고정관념인 줄 꿈에도 몰라.

그러니까 상대방한테 부탁을 해서

내가 입만 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좀 지적해 달라고

그게 공부다 이거예요.

그래서 도반이 중요하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순서가

-자각의 힘으로 먼저 깨어 있을 줄 알아야 돼요.

자각의 힘으로 먼저 깨어 있는다.

이때 자각의 힘이 깨어 있으려면

-자기 의식을 확인해서 의식이 깨어나야 돼요.

그전에는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무의식과 의식, 차이점

무의식은 내가 이렇게 하면서도 하는 줄 모르는 것

의식은 내가 이렇게 하면서 하는 거를 스스로 아는 것

 

의식 상태여야만이

지금 이 자기의 잘못된 부분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이거예요.

의식 상태가 아니고 무의식 상태라면

자기가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먼저 의식으로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

의식을 일깨우려면

의식을 한번 확인해야 한다.

무엇이 의식인가?

지금 당장 보는 거다, 이거예요.

지금 보는 거.

 

보는 것을 다시 볼 수는 없습니다.

보는 것을 다시 볼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어떻게 깨닫는가?

이런 말을 듣고

지금 보입니까?” “보는 겁니다하는 이 말을 듣고

자각한다. 이거예요.

자각한다.

이걸 구하면 못 구해요.

 

, 보는 것을 다시 보려고 하면

못 봐요.

왜냐하면 보여지는 것은

현상이지 본질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꿈을 꾸는 자는 꿈속에 있지 않다.

꿈을 개입은 하고 있지만 꿈속에 있지 않다.

근데 우리가 지금 지각할 수 있는 것은

현상계만 지각하지

이 현상계가 벌어지고 있는 이 공간 자체로서의

그러니까 현상계의 꿈을 꾸는 의식을

꿈속에서 볼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깨달아야 되는가?

그냥 깨달아야 돼.

그러니까 이게 그래서 이 길이 없는 거예요.

그냥 깨닫는 거예요.

 

지금 들립니까?

듣는 거예요.

지금 보입니까?

보는 거예요.

느낍니까?

느끼는 거예요.

제가 남자라는 거 아시죠?

항상 있어요.

 

이렇게 깨달아야지

이거를 대상으로 해서 잡으려고 하면

영원히 이거는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깨닫는가?

이거를 잡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잡으려고 애를 쓰다가

아무래도 못 잡아.

그래서 허탈해서 포기하고

왜 안 잡히지?” 하고 돌아보는 거예요.

 

중요한 말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잡으려고 해봐야 실패하지

그러니까 깨달음은 실패해야 깨달아요.

깨달음은 실패를 해봐야 깨닫는다.

 

그러면 잡으려고 해봐야

아무리 해도 안 잡힌다는 것을 실패하는 경험을 했을 때

왜 안 잡히지?” 하고 돌아본다, 이거예요.

돌아보면 잡으려고 했던 그놈이니까.

 

그러니까 실패를 통해서 깨닫는다

이게 부처님이 우리한테 남긴 교훈이에요.

6년간 실패했어요.

부처님이 본질을 깨달으려고 6년간 노력을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포기해 버렸어.

포기했다.

찾다가 찾다가 안 찾아지니까 찾는 그것을 포기했다.

가만히 있었더니 매 순간순간 찾던 그놈이다, 이거예요.

 

6년 고행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

그게 참 위대한 점이지

거의 본인이 아사 직전까지, 죽을 지경까지 찾았다 이거예요.

끝내 못 찾았다.

그리고 위대한 포기를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했다. 가만히 그냥 있었다.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뜻밖에도 찾는 가만히 있는 그놈이다, 이거예요.

가만히 있는 그놈.

 

부처님이 깨달을 때 부처님 전기에 보면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포기했을 때

안 되는구나하고 완전히 놓았을 때

그때 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가만히 있으니까 너무 편하다 이거예요.

 

자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께서

모든 것을 그냥 포기해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한지 아세요?

 

가끔 인사동 선원이 이렇게 있으니까

가끔 개인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계시는 분이

저한테 면담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면담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뜨겁다 뜨겁다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거 놓으면 될 것 같은데

근데 그걸 못 놓고 손에 쥐고

뜨겁다 뜨겁다고 이렇게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걸 탁 놓으면, 포기하면

내가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을 포기하면

정말 편해요.

 

어떤 의미로?

변소에서 넘어져도

정말로 포기해 버리면

변소간에서 넘어져도 그 자리가 그렇게 편한 자리예요.

근데 지금 인간은 그걸 못하기 때문에

그게 괴로운 거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여튼 분리감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는데

그 분리감은 우리로 하여금 구하게 한다.

 

근데 그 구하는 그것을

구하는 자기를 돌아봐서

그 구하는 것을 내려놓을 때...

 

천국과 지옥의 현판이 있어요.

단테의 신곡에

단테가 버지, 베르길리우스라고 하는 로마 시인의 안내를 받아서

단체는 13세기 사람이거든요.

이 단테가 지옥을 갔어요.

지옥과 천국을 순례를 하는데 단테의 <신곡> 이야기예요.

지옥을 갔더니

지옥 문이 현판이 딱 있는 거예요.

그 지옥문의 현판이 뭔지 아세요?

지옥문의 현판에 뭐라고 새겨져 있느냐 하면

이 문을 들어서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이렇게 돼 있어요.

희망 없는 곳이 지옥이다, 이 말이에요.

이 말 이해되세요?

 

근데 단테가 하나만 알고 지금 둘을 몰랐어.

단테는 너의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곳이 지옥이다하고 정의를 했는데

저는 뭐라고 정의하느냐 하면

희망을 버리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이 말을 소화하기는 좀 어려울 거예요.

야망을 가져라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이 조금 들었잖아요.

역설적으로 가만히 보면

그 희망이 우리를 속이는...

그 희망이 한 생각이다, 이거예요.

마지막 우리를 현상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 꼭지

그 떨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꼭지

그게 우리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그런 이상, 희망, 이런 거다 이거예요.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는 굉장히 성숙한 공부예요.

세간의 통념과는 완전히 지금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깜빡 생각에 속았다면

빨리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 회복 탄력성을 기르는 것이 마음공부다./

 

본래 마음자리는 의식이에요.

여러분 지금 의식이 있나요?

의식을 한번 깨달아야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거예요.

 

이게 우리 존재의 고향이에요.

집 나갔다가도 고향을 알아야지 빨리 돌아오지.

그럼, 무엇이 고향인가?

지금 깨어 있는 이거거든요.

깨어 있는 의식이거든요.

 

따라서 한 번 의식이 자각된 사람이라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을 놓치고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면

그럼 생각에 빨려가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불편함을 느껴요.

왜냐하면 의식으로 깨어 있을 때는 아무 일이 없는데, 편안한데

이걸 놓치고 무의식 상태가 되면

한 생각에 또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딸려가면

거기가 좀 컴컴해요.

그 생각이 딸려가는 그 세계는 좀 컴컴하고, 약간 우울하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뭔가를 자기도 모르게

아니면 이 뭐꼬?’ 화두 하는 사람은

이 뭐꼬?’까지 갈 필요가 없어.

그냥 하든지

-하여튼 한 무 하든지

-하여튼 한 번 이렇게 탁 치든지

-자기 꿀밤을 탁 때리든지

그러니까 뭔가를 탁하고 딱 나온다 이거예요.

이게 공간 이동이에요.

 

컴컴한 생각 속에서

귀신 굴이라 그래, 생각을 귀신이라고 해요.

귀신 굴에서

컴컴해, 그때 탁 알아차리고 탁 나오는 거

그게 스위치예요.

그래서 이 스위치가 처음에 없는 사람은 화두가 스위치예요.

그래서 화두를 드는 순간 나온다.

 

생각 속과 생각 밖의 공간이 다르다.

이 말 이해되세요?

생각 속이 꿈속인 거예요.

그리고 생각 밖은 말짱하게 깨어 있는 의식의 세계.

 

그러니까 공간 이동이 핵심이에요.

이 공간 이동의 감을 잡는 것

이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에요.

빨리 하여튼 의식을 깨달아야 돼.

자기 의식을 한번 깨달아야 돼.

 

그러면 자기 의식을 깨달으면

우리 의식의 초점이

현상계에 갔다가도

현상계의 일이 끝나면 돌아와 있기’ ‘의식의 자리’ ‘±0 상태’ ‘의식의 초기화 상태

의식의 초기화 상태로

이거를 나의 주모드로 만들어 놓기

내 의식의 주된 모드는 ±0 상태

±0 상태를 선에서는 초심이라고 불러요.

초심 상태로 만들어 놓기 무심이라고도 불러요.

무심, 초심

이걸 나의 의식 상태의 주조로 만들어 놓고

일이 생기면

얼른 생각을 일으켜요.

그리고 일을 처리해. 그리고 돌아와요.

이게 지금 지혜의 정수예요.

 

무심 평상심

이렇게 쓰는 거는 평상심이라 그래요.

제가 끊임없이 지금 중도를 공부하면서

중도는 무심과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하는 거다.

 

그럼, 평소에는 무심상태를 딱 나의 주된 포인트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익숙해져 있어.

그러다가 일이 닥치면 일을 처리하고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면 거기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요.

다만 편안해요.

 

편안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네.

아주 편안한 상태

아무 일이...

무사태평이란 말 아세요?

무사태평의 상태

그걸 이제 조로 만든다.

 

에고가 내면 아이예요.

우리 보통 사람 안에는

자기가 존재 불만족한 존재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이렇게 떼를 쓰는

그 습관이 지금 들어와 있다.

내면 아이는 항상 불만족스러워 해.

그래서 구해요.

뭔가를 갈구해.

그런 존재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 내면 아이를 다스리는 법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저절로 자비가 나온다.

내면아이를 야단치면 안 된다./

 

보통 사람들은 야단쳐요.

무슨 소리냐 하면 남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해.

자기의 미성숙한 부분을 남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내면 아이가 툭 튀어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야단치고 푹 눌러버려.

그게 지금 보통 사람은 습관화 되어 있어요.

 

그 내면 아이가 지하실에 있어요.

우리가 하도 밟아서

지하실에 있어.

 

/내면 아이를 야단치면 안 된다.

자비로 잘 다스려서 안아줘야 한다./

 

이 내면 아이를 불교에서는 중생이라고 불러요, 중생.

중생이란 무슨 말이에요?

한 존재가 안에

_ 여러

_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한 내면 아이가 많다 이거예요.

 

여러분, 내면 아이가 많아요.

다중 인격이에요.

알고 보면 모든 사람이 다중 인격이에요.

그럼, 이 안에 다중 인격자가 많다.

그 다중 인격을 중생이라고 불러

_ 다중

그리고 생_ 생명체 인격체

그러니까 다중 인격

 

/내면 아이가 중생이다.

중생을 전도시키는 방법은

중생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는 거다.

천도의 핵심은 자비로 안아줘서

모든 불만이 녹아서 스스로 떠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과 자비는 언제 생기는가?

이 세상이 하나임을 자각할 때 나온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사랑과 자비는 언제 나오는가?

내가 사랑해야지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정말로 하나임을 우리가 깨달을 때

모든 존재가 나의 분신이 되어서

사랑과 자비가 그때 나온다 이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의 분신임을 알 때

이 말도 이해되세요?

 

의식의 입장에서는

바다의 입장에서는 모든 파도가 자기의 분신이에요.

그래서 저절로 자비라고 하는 것이 나와요.

 

그래서 그 유마거사라고 하는 깨달은 분이

병이 나서 누워 있으니까

유마경에 보면 부처님 제자들이 문안을 가요.

병문안을 가, 유마거사한테.

아니 천하의 깨달은 자로 유명하신 유마거사께서

왜 이렇게 병이 나서 누워 계십니까?”

그랬더니 유마거사 하는 말이

중생이 아프니까 저도 아픕니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왜냐?

유마거사한테는 자기가 의식이에요.

그리고 의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의 분신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공부가 끝이 없는 게

나는 이 이치를 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존재의 고향을 깨닫고

의식의 상태로 깨어 있는 그 상태로 내가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닌 게

그렇게 있으면 세상에, 사람들마다 다 병자로 또 보이네.

그러니까 같이 아파요, 그때부터는.

그때부터는 같이 아파.

 

사실 저도 많이 아파요.

오시는 분들마다 다 아파하셔.

그러니까 참 같이 아파요.

그러니까 중생이 아프니까 나도 아프다.

 

이것이 진짜 공부라는 뜻이지.

나 하나 어떻게 되는 게 아니고

이 의식의 입장에 서면

정말로 모든 것이 다 내 품 안에 있는 나의 분신들이라서

한 사람이 아프면 같이 아프다.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하는가?

여러분 꿈에서 아팠는데 꿈 깨면 어떻게 돼요?

안 아파하잖아요.

 

그러니까 꿈에서 아프다이 말은

자기가 에고인 줄 아는 것이 꿈이에요.

그럼 자기가 에고인 줄 알면 그 에고로서는 아파요.

근데 꿈을 깨면

자기는 에고가 아니고 의식이죠.

의식은 모양이 있습니까?

텅 빈 채로 이렇게

 

의식은 안 아파요.

그러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에고가 아니고 의식입니다 하고 깨닫게 만들어주면

깨닫는 순간

이 아픔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우리가 이 공부 왜 하느냐?

마지막 목표는

인연 있는 사람들을 깨닫게 만들어 주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전에 성철스님의 말씀을 빌리면

인간 중에 못된 것이 참전한다고 했다.

못된 것이란

존재 불만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러분 다 못 됐네요.

그러니까 여기 왔어요. 그죠?

존재 불만족이라도 대충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민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존재 불만족에 예민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성철 스님은 못 됐다고 그랬어.

그래서 못된 놈이 참선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려고 집중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불만족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간이 커져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사람들이 깨달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자기도 모르게 우리는 오랫동안

몸을 나라고 했기 때문에

나의 크기는 기껏해야...

 

2m라고 합시다, 많이 써서.

나의 크기는 2m를 넘지 않아. 맞아요?

왜냐하면 몸을 나라고 살아왔기 때문에

나의 크기는 2m를 넘지 않는다라고 고정관념이 되어 있죠.

 

그래서 이 공부를 하려면 이것부터 깨야 돼요.

나의 크기

지금 의식이 있어요?

의식의 크기

의식의 크기 느껴보세요.

의식의 크기

 

이거를 맹자가 호연지기라고 했어.

의식의 크기를 느낄 때

호연_ 툭 트여서 끝이 없다.

그러면 몸이 나다할 때는

나는 2m가 안 되는데

의식이 나다이러면 나의 크기는 엄청나게 크죠.

근데 이걸 수용하느냐 이거예요.

 

습관적으로는 수용하려면 시간이 걸리게 돼 있어요.

자꾸 움츠러들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존재 불만족의 이유를 알았어.

확실히 알았어요.

뭐냐 하면

무한대의 나를

170이 안 되는 것 속에 가두어 놓고 살았어.

그러니까 불만족이지

이게 나가 아닌데 그랬다고요

계속, “이게 나가 아닌데

인생이 이게 다가 아닌데

이렇게 지지고 볶는 이것만이 인생인가?”

그래서 답답했던 거예요, 인생이.

답답했다.

 

무한대예요, 우리가.

근데 이거를 수용하려면 가슴이 열려야 돼.

우리 가슴이 열려야...

여러분 보세요.

 

몸이 나예요? 몸을 움직이는 게 나예요?

움직이는 게 나잖아요.

실제로 보는 것이 몸이 보는 거예요? 의식이 몸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 몸을 보고 있는 의식은 얼마나 커요.

그러니까 이게 나인데

이 나가 수용이 되느냐 이거예요.

 

인간마다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어 있다.

그래서 답답한 거예요.

모든 문제가 거기서부터 시작이 돼.

 

그러니까 이렇게 탁 이렇게 뒤집는

또 뒤집는다는 말이 나오네.

뒤집는다. 뒤집는다.

 

몸을 당나귀라고 해요. 당나귀, 자아.

의식을 우물이라고 비유를 해요, 선에서.

 

여러분 보세요.

실제로는 당나귀가 우물을 보는 거예요?

아니면 우물이 당나귀를 보는 거예요?

실제로는.

 

실제로 보세요.

당나귀의 구성 요소가

, 감정, 생각, 이런저런 습관, 그리고 이런저런 아는 거

이게 당나귀의 구성 요소예요.

 

근데 자기 몸, 보이지 않나요?

자기 감정 보이죠?

생각도 보이죠?

그리고 조금 더 눈이 예리해지면

자기 업도, 자기 습관도 보이고

또 자기가 어떤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그 생각 구조도 보이게 돼요.

 

그러면 보세요.

보여지는 것이 나예요? 보는 것이 나예요?

보는 것이 진짜 나잖아요.

그러니까 보는 것은 의식이잖아요.

 

요 하나만 자세히, 우리가 곰곰하게

당나귀가 우물을 보는 건가?

아니면 우물이 당나귀를 보는 건가?

의식이 자아를 보는 건가?

자아가 의식을 보는 건가?

 

보통 사람은

자아가 의식을 본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실제로는 의식이 자아를 보고 있어요.

전도몽상이 이렇게 뒤집힌다 이거야, 뒤집힌다.

 

근데 이거를 지금 수용하려면

끈질긴 고정관념이 계속 우리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자기 발목을 잡는 것에 대한...

관찰이라고 그래요.

 

각찰(覺察)이라고 하는 말을 써요.

각찰이라는 말은 보조국사가 이 말씀을 하셨어요.

각은 깨어 있을 각

찰은 관찰할 찰

경찰 할 때도 찰, 관찰하다.

 

깨어서 관찰한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자기의 습관을, 자기 사고방식을.

그러면 관찰하면 할수록 역전된다.

 

관찰하기 전에는

습관을 나라고 하고 사는데

자꾸 관찰하면 할수록

습관은 대상이고, 실제 나는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하는 것은 뭐예요?

결국 의식이 관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계속 포인트가 지금까지 우리는

관찰되는 것을 나로 알고 살았다 이거예요.

근데 실제로는 뭐냐?

관찰하는 것이 참나다.

 

영화 속의 인물은 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영화 속의 인물을 보는 관객이 나다, 이거예요.

그러려면 자꾸 자각을 해야 되지.

자각 못하면 빨려 들어가고

현상계에 빨려 들어가서 몸을 나라고 해버리고

근데 자꾸 관찰하게 되면 거리가 생긴다.

현상계로부터 각찰을 해야만이 거리가 생긴다.

그러니까 자꾸자꾸 자기를 본다 이거예요.

 

여러분 자기 보는 게 수행이에요.

이 말 이해되세요?

그럼 자기를 꼭 참선할 때만 보나요? 아니면 일상에서 보나요?

일상에서 보잖아요.

일상에서 자기 보는 게 진짜 수행이에요.

 

그러면 많이 해본 사람하고

아예 안 해본 사람하고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자꾸 해야지 뒤집힌다, 이거야.

나의 아이덴티티가

몸에서 의식으로

또 다른 말로 하면

생각에서 생각을 보는 의식으로.

 

차이점 아시겠어요?

제일 중요한 차이가 생각과 의식의 차이예요.

생각과 의식.

 

여러분, 생각나기 전에도 의식은 있었어요.

없어요?

생각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의식은 있죠.

그러니까 의식은 안 변하는 거예요. 불변.

근데 생각은 생겼다가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대개 보세요.

자기를 텅 빈 채로 모든 것이 나타나게 하는 이 의식을 나라고 하는지

아니면 이 안에 나타나고 있는 생각을 나라고 하는지

어떤 게 나예요?

실제로는 불변하는 의식이 참나인데

우리는 이걸 놓치고

생각을 나라고 살고 있다.

 

그러니까 그걸 빨리 우리가 알아차려서

바로잡는 게

하여튼 우리 공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