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의 본질: 화자는 현상이 꿈과 같고 본질적인 실체가 없으며, 깨어남은 이러한 현상을 꿈꾸는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02:00].
- 오해 극복: 이 비디오는 공부의 목표로 평온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오해를 다루며,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00:29].
- 노력과 항복의 역할: 진정한 항복은 끊임없는 노력과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려는 노력의 헛됨을 깨달은 후에 온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06:42].
- 화두의 개념: 이 비디오는 "보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집중적인 질문인 화두를 에너지 집중 및 정신적 장벽을 깨는 도구로 소개합니다 [08:40].
-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 화자는 화두와 씨름하고 좌절감을 느끼며 궁극적으로 진정한 이해를 얻기 위해 화두 자체를 버려야 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10:29].
- 에고의 본질: 이 비디오는 특별한 것을 갈망하는 에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진정한 이해가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에 있다는 깨달음을 다룹니다 [20:11].
- 놓아주기: 공부하는 동안 얻은 경험에 대한 집착까지도 모두 포기하는 것의 중요성은 진정한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23:12].
- 궁극적인 깨달음: 이 비디오는 여정의 본질은 궁극적인 진실을 파악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이는 에고의 사라짐과 진정한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면서 결론을 내립니다 [28:27].
사람들이 공부가 뭔지에 대한 초점을 못 맞추고
굉장히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정확하게 공부하실 분이라면
타깃이 분명해야 돼요.
지금 공이다, 무심이다, 본질이다 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거기에 집중을 하셔야 돼요.
근데 그건 안 하고
그냥 부문만 듣고 살면서
잠시 좀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
그걸 자꾸 리바이벌 하려고
그걸 공부 삼으면 절대로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그렇게 되면
약간 좀 고요해지는 상태에 그걸 집착하는
선정을 추구하는
그런 잘못된 공부가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공부할 사람은
먼저 지금 이 순간 저 보입니까?
“보는 게 뭐냐?”
이 질문 하나에 딱 초점을 맞춰야 돼요.
끝까지 밀고 가야 돼요.
여러분께서 제가 지금 묻잖아요,
“저 보이십니까? 보는 게 뭡니까?” 했잖아요.
여기에 답하려고 하는 게 마음공부예요.
여기에 답하려고 하는 그걸 가지고
법문도 듣고, 생활도 하고, 책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하는 거예요.
상황 이해되세요?
그래서 질문이
생활 중에 좀 편한 상태, 그게 무심입니까? 라고 질문했는데
전혀 그런 건 아니다.
화두가 풀렸을 때 무심이 나오는 거예요.
화두가 타파되어야.
따라서 공부의 초점은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건데
본질은 뭐냐 하면 쉽게 예를 든다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꿈 같아요.
실체가 있는 게 아니에요, 현상은.
그러면 모든 현상을
비유를 한다면
꿈이 있으면 반드시 꿈꾸는 의식이 있죠.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꿈속에서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꿈을 꾸는 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인 거예요.
상황 이해되나요?
본질은
현상을 꾸는 의식 자체예요.
힌트가 뭐냐 하면
꿈속의 사람은
정말로 끈질기게 꿈을 꾸는 의식을 나름대로 잡으려고 해요.
그리고 수많은 시도 끝에
‘이거다, 저거다’라고 관념을 만들어, 자기도 모르게.
저희 같으면 징검다리를 놓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보이는 것들은 현상이다.
그런데 이 보이는 것들을 보는 것이 의식인 본질이다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잖아요.
그러면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의식을 또 나름대로
‘이거겠거니 저거겠거니’ 하고 감을 느끼고, 그 감이라고 하고
하여튼 의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뭔가를 만들고
거기에 또 집착을 해.
그것이 한 번 극복되는 게
그것도 이 본질을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망념이에요.
미세한 망념이 그거예요.
그 상태가 백척간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포기한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 포기할 때까지는
그냥 포기 안 하고
죽기 살기로 해보고
나중에 기진맥진할 때 이런 말이 귀에 그때 들어와.
지금은 하나의 그냥 말이고, 스쳐 지나가는 중일 거예요.
그러나 저로서는
바르게 여러분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러분이 이거다 저거다 하고 붙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는
꼭지가 안 떨어진 상태
그래서 뭔가를 쥐고 있는 상태
그것이 ‘아니다’가 아니고 ‘불가능하다’
내가 지금 진리, 본질, 혹은 본래면목을
이렇게 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정말로 한번 그 뼛속 깊이 느낄 때
그때 모든 걸 포기하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구름이 다 걷혀요.
그리고 확 드러나요.
근데 그렇게 되기까지 노력을 하는 사람이 또 놓지
노력도 안 하는 사람이 말 듣고
처음부터 “나는 놓을래” 하는 사람은 아무런 또 의미가 없다.
자 한 가지만 너무 유명하니까
이 대목에서 한 번만 더 써 봅시다.
但知不會 是卽見性(단지불회 시즉견성)
보조국사의 말이죠.
다만 꿈꾸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회_ 꿈을 꾸는 의식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정말로 이걸 뼛속 깊이 알게 될 때
이것이 바로 견성이다.
다시 말하면 견성이 일어난다, 이 말이에요.
그때 일어난다.
부처님께서도 6년 수행 끝에, 포기했을 때 깨달았다
이 포기가 지금 답인 거예요.
그리고 이 포기는 언제 포기하는가?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챘을 때 포기해요.
그러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그렇게 지금 애써 왔다는 그 사실을 알아챌 때.
따라서 노력을 해야지,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채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야 돼요.
그래야 노력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아채요.
참 말이 참 기가 막힙니다.
하여튼 제 말을 잘 알아서 소화하세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아니 하란 말이야? 하지 말란 말이야?”
열심히 하다가
아니 최선을 다해야 돼요.
열심히 하다가
“아, 이게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해봐야 아니라는 걸 알지.
그러니까 열심히 한 사람이 열심히 해도 해도
무심까지는 못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정말 막혀 있을 때
딱 이런 한마디 말이.
이 말을 얼마나 자주 해요.
그런데 그때 이런 말이 들어온다, 이거예요.
하여튼 그런 과정이 이렇게 있다.
그래서 지금 하여튼 질문 때문에
이런 답변을 드리느라고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의 포인트를 딱 정해서
거기에 계속 에너지를 쌓아가야지 뚫리지
여러분 지금 무명의 벽에 막혀 있어요.
욕망의, 집착의, 벽에 막혀 있어요.
그 방향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세간에 대한 집착
-하나는 출세간에 대한 집착
둘 다 지금 병이에요.
근데 그걸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근데 이거를 뚫으려면
딱 한 곳의 에너지를 계속 쌓아가야지
이 벽이 뚫려요.
여기도 두드려 보고, 저기도 두드려 보고
문 앞에서 두드리다가 볼 일 다 보면 안 된다.
그러니까 딱 한 군데 집착하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이거죠.
화두는 아주 간단한 질문이잖아요.
보인다는 사실은 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보는 것이 뭐냐?
그러면 여기에 집중하게 되면
모든 역량을 이쪽 한 곳에 집중하면
나름대로 어떤 감이 잡히면서
뭔가가 이렇게 “이거구나” 하는 감이 잡힌다니까요.
근데 그 “이거구나”에 마지막 막혀 있어.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거구나” 때문에 막혔다는 걸 알아차려야 돼.
거기서 내려놓을 때 확 터져버려요, 그냥.
완전히 개명천지, 대명천지
전체 그냥 전체가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리고 깜짝 놀라는 거는
“처음부터 이랬네.
처음부터 이런 거를
내 딴에는 노력한다고 하는 모든 것이
그것이 오히려 이걸 막고 있었네”라고 하는
참 기가막힌, 돌이킴이 이렇게 오는 거예요.
하여튼 공부는 그렇기 때문에
잘 소화하셔야 돼요.
도대체 하라는 말이야? 말라는 말이야?
이 말을 잘 소화하셔야 돼요.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들어라.
끝까지
처음부터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들어서
끝까지 가져가면.
자 화두는 형이다, 형, 가닥, 폼
그러면 화두 하나를 끝까지 가져간다 이 말 ‘수’ 지킨다.
근데 ‘파’ 이 화두가 타파되는 날이 온다.
타파되는 날이 온다 이 말은
화두 자체가 걸림돌이 됐다는 걸 깨달을 날이 온다.
그러면 그것까지도 내려놓으면
확 드러난 이게 진짜 화두예요.
그러니까 화두라는 말이 말씀이라는 말이잖아요.
화두가 말씀이잖아요.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뜻이잖아요, 그 말 자체가.
두_ 접미사예요.
화_ 말이라는 뜻이야, 말씀.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진리를 가리키는 말씀을 가지고 공부를 하지만
결국에는 그 말씀 자체도 타파되는 날이 올 때
온 세계가 다 화두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그게 지금 이 공부의 과정이에요.
참 질문을 잘해 주셨어요.
저도 돌아보면
공부할 때 초점을 딱 맞춰서 안 하고
자기도 모르게 여기 찝쩍, 저기 찝쩍
이 스님 법문, 저 스님 법문
근데 그거를 화두 하나로 딱 집중해서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맞는 화두가 들려요.
그때는 법문도 그런 법문만 들려요.
그 화두를 깨기 위한 법문만 들려
나머지는 이제 거들떠 보지도 않아, 저절로.
그러면 화두를 가지고 살면서
어느 한 법문에 정말 이게 탁 맞으면서
이게 확 열린다 이거죠.
열릴 때는
“내가 지금 어디에서 잘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적해 주는 말 때문에 열려요.
그러니까 그 말이
-사람의 말일 수도 있고
-지나가는 바람 부는 소리일 수도 있고
-돌멩이가 딱 나무에 맞는 소리일 수도 있고
하여튼 그 기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벌어질지 몰라요.
그렇지만 딱 하여튼 이 초점을
계속 에너지를 모아서 사는 삶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드는 삶
그 하나가 끝까지 공부를, 초지일관 만들어 준다.
이게 지금 인간이, 우리가 현재까지 발견한
가장 간명한 깨달음의 길이에요.
/임제종 양기파의 가풍은 율극봉과 금강권이다.
진리가 궁금한 사람은 목에 밤송이가 걸린 것 같다./
이게 율극봉이라는 뜻이에요.
율_ 밤송이
극_ 가시나무 뭉치
봉_ 솜 뭉치.
이건 뭐냐 하면
이게 지금 궁금한 사람은...
여러분 지금 저가 보입니까?
저 보는 게 뭐예요?
이 질문 앞에서 답변하려고 하면
목에 뭔가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이거예요.
답변하려고 하면
그리고 이게 율극봉이고.
금강권은 꽉 막혀서
뭔가가 감옥에 갇힌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이거야.
금강의 감옥
권은 감옥 권자예요. 금강은 단단하다는 뜻이잖아요.
단단한 감옥에 갇힌 것 같다.
“여러분이 누구십니까?” 말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저를 보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게 구체적인 질문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답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기도가 막힌 것 같고
그리고 뭔가가 이렇게 조여오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다.
이게 임제종 양기파의 가풍이에요.
그러면 그런 걸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구나” 하고 발심이 된다 이거죠.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다 보면
그런 것이 더 조여 오죠, 사실은.
조였다가 풀렸다 그래요.
그 과정에서 이 문제에 집중하는 힘이 강해져서
결국에는 탁, 그것이 풀리면서, 벽이 무너지면서, 막혔던 것이 깨지면서
한 번 이 자리가 딱 드러난다.
이게 지금 임제종 양기파의 가풍이에요.
/내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면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오는 이 정신적인 벽을 한번 뚫어내야 한다./
정신적인 벽이 바로
그 욕망과 집착이 굳어 있는
세간에 대한 욕망과 출세간에 대한 욕망이 굳어서
정신적인 벽이 되어 있는 거예요.
/당신은 진실로 인생에 대해서
혹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가?
어린아이나 부처님이라면 ‘나는 나다’라고 할 것이다./
통쾌하지 않나요?
어린아이나 부처님이라면
“당신 누구세요?”
그러면 ‘나는 나다’ 이럴 거예요.
/근데 당신은 자신 있게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 이게 이 지금 머뭇머뭇한 거 있죠.
우리가 이런 질문 앞에 딱 당하면
무언가가 석연치 않게 말 못하잖아요.
머뭇머뭇하잖아요.
머뭇머뭇한 그게 생각이 굴러가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그 생각이 마지막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어요.
머뭇거리는 것은 생각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생각이
끝내 답이 뭔가 하고 따라붙어요.
이걸 놓지 못하고 이걸 붙잡고 있어.
과일이 익으면 똑 떨어져야 되는데
이게 못 떨어지게 꼭지가 딱 붙어 있는 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 할 때 나는
현상 속에 나타나 있는 ‘나’가 아니에요.
우리들이 누구냐 하면
현상 속에 나타나 있는 이 나가 아니에요.
우리가 누구냐 하면
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
‘보고 있다’ 이 말은
꿈을 꾸고 있는, 현상을 꾸고 있는 의식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공부를 통해서
의식이라는 걸 마지막까지 쥐고 있어. 말하자면.
“의식이구나” 하고 쥐고 있어.
그것 때문에 열매가 못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백척간두에서 못 나가고 있는 게
“의식이구나” 하는 그거를 쥐고 있다, 이거예요.
이런 말이 한 번 가슴에 탁 칠 때가 오실 거다.
익으면, 충분히 익으면.
그래서 하여튼 공부의 과정이
첫 출발점은
“지금 이 순간 보는 그것,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끝까지 애쓰는 거예요.
끝까지 애쓰면 중간에 답이 나와.
근데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에는 지어요, 이게 답이다라고.
그래서 사실은 이런 선원과 도반과 가이드가 필요한 거예요.
그때는 물어야 돼요.
이거냐고, 지금 답을 찾았는데...
제가 질문한 거잖아요.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제가 질문했잖아요.
그럼 여러분께서는 답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럼 이거다라고 답이 나왔을 때는 저한테 와서 확인을 받아야 돼요.
근데 확인은 미리 다 이야기해 드릴게.
끝까지 아니야.
그러면 어떻게 돼요?
답은 자기가 알아, 정말로 물을 필요가 없어져요.
근데 긴가민가하는 것이 있다, 이거지.
답이 아닌 것은 자기가 흔쾌하지 못해.
긴가민가해.
빨리 와서 물어야 돼. 그럴 때는.
끝내 아니에요. 희한하지.
끝내 아니에요.
아주 딱부러지게 말씀드리면
꿈속에 있는 나가
꿈을 꾸는 의식 자체를
이걸 인지? 감지? 뭐 붙잡는다?
할 수 없다.
그래서 다 놓았을 때, 완전히 다 놓았을 때
그냥 통으로 이 진짜 의식 하나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가야지 공부가 맞다.
지금 제 말이 맞잖아요.
논리적으로도 맞잖아요.
이 답을 찾으면
모든 사람이 다 이걸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것만 가지고 살아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
진짜 보통이에요.
근데 왜 특별해지겠어요?
에고의 욕심은 특별한 걸 원해.
그래서 그 깨달음의 내용이 특별해야만 에고가 특별해져.
그러니까 끝까지 에고는 특별한 걸 구해요.
근데 진리는 놀랍게도 특별한 게 아니라 보통이야.
따라서 여러분께서도 공부하실 때
정말 모든 걸 놓아야 모든 것을 얻는다.
아니 부처님이 그러셨다. 이거야.
6년간 공부한 게 얼마나 아까웠겠어요.
그 아까운 걸 쥐고 있는 한은, 진리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여러분, 진리로 들어가는 문은
뭘 가지고는 못 들어가요?
완전히 빈손이어야만 진리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 걸 우리가 하나의 기준을 알고 있으면
공부에 도움이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쓸데없이 중간에 지체하는 시간을 줄인다.
이 말도 이해되세요?
제가 자주 쓰는 말이지만
뭔가를 체험하면
그걸 가지고 허공에 탑을 쌓고
세파트가 돼서
그걸 딱 지키고 있다가
누군가가 오면 으르렁 하고
그걸 허공에서 그 탑 지키는 강아지가 돼버린다.
그러니까 끝내 그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혼자 공부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허공에 쌓는 탑을 지견이라 그래요, 지견.
예 그래서 스님하고 이야기해 보면
조금 뭔가 이야기를 하면
“지견 났네” 그러거든요.
‘지견 났다’ 그런 말을 써요.
‘지게 났다’ 이 말은
뭔가를 쥐었다 이거예요.
나름대로 수행하다가
어떤 경험도 하고, 빛도 보고, 뭐도 하고
하여튼 뭐 해서 지견 났다.
하여튼 한 번 지견 난 사람은 못 말린다.
왜냐면 눈이 그냥 뒤집어지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에고의 탐욕 아닌가요?
그러니까 출세간에서도 탐욕을 부리지만
세간에서도 탐욕을 부리는 거예요.
그 탐욕은 지견이 생기는 거고
지견은 이런저런 체험들이에요.
이런저런,
뭔가 빛을 본다든지
밖에 어떤 지나가는 사람의 내장이 보인다든지
하여튼 별의별 일이 다 있어.
마음을 한 군데 쪼으면 그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신통이라는 게.
그걸 가지고 공부인 양, 본인은 착각한다.
에고의 욕망이죠. 집착이지.
출세간에도 욕망하지만 세간에서도 욕망한다, 이거예요.
하여튼 버리는 게 공부예요, 뭐든지.
진짜 방하착이란 말 쓰잖아요.
방하착한다, 모든 걸 방하착한다.
그런데 참 방가착하기 어려워요, 해보시면.
어떻게 얻은 건데 놓느냐고.
그래서 그 쥐고 있는 시간이
그 사람의 공부가 거기서 스톱이라는 거예요.
더 이상 못 나간다.
근데 틀림없이 또 하나의 법칙은 뭐냐 하면
그걸 쥐고 있을 때는 조증이 온대요.
붕붕 뜬대.
천하를 얻은 것 같고, 다 내 발아래고
“너희들은 모르지?” 이러면서 붕 뜬다는 거예요.
조증 다음에는 울증이 온다는 거예요.
반드시 법칙이에요.
조우울증이 뭐예요?
생멸법이다 이 말이죠.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생멸법이에요.
생겼다가 사라져
지금 공부의 기준이.
생멸이라고 하는 현상 속에서 지금 본질을 잡으면 안 된다.
그래서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를 하지 말자.
끝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생멸의 세계다.
그리고 본질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정말로 알 수가 없구나 하고 놓으면...
여러분, 공부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금 보는 것이 뭐냐?”는 질문, 이 초점이 여기에 딱 맞으면
이 보는 것에 계속 관심을 가지면
어느 순간 보는 것이 감지가 돼요, 자기가.
그런 감이 생겨
“이거다” 하는 감이 생겨요.
그리고 “이거다”는 해야 돼.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또 거기에 집착을 해.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보기 어려워요.
그러면 지금 보는 이건데
하여튼 초점이 이렇게 밝아지고 맑아져요, 보는 이것이.
근데 여기에 아주 미세한
“이거다”라고 하는 그 관념이 이렇게 끼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은 알아
이게 시원하지가 않아.
이거는 이건데 시원하지가 않아.
이럴 때 옛분들이 선생한테 가서 질문해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거기에 대한 답이 나와 있어요.
“끝까지 화두를 참고하라” 이 말이에요.
끝까지 “이것이 무엇인가?”를 놓지 말고
이거라고 해도
끝까지 이거라고 하는 걸 가지고 뚫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은 이거다고 해도 그게 흔쾌하지가 않아.
시원하지가 않아.
이거는 이건데 시원하지는 않아.
그리고 일상에서 걸려.
그러니까 그게 미세한 것들이 막고 있는 그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거다를 놓아야 된다 이거예요.
저 질문이 이 타이밍에서 나와야 돼.
꼭 ‘놓는 방법이 뭐냐’고 묻는다니까.
아니 이게 지금 우스갯 소리가 아닌 게
“이거다” 했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거다” 했는데 그 뒤에 말꼬리가 바로 따라붙는 거예요.
“이제 뭐 하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따라붙은 말꼬리는 누가 할까요, 그 말을?
에고가 하는 거예요.
에고는 만족할 줄 몰라.
“그래도...” 하는
“이게 다인가?”
정말로 이거일 때는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특별하고 싶어.
이것 말고 뭔가 특별한 것이 또 있으면 좋겠어.
그쪽으로 자연적으로 시선이 간다, 이거예요.
그렇게 따라붙는 에고를 스스로 알아채기는 어려워요.
그거를 알아차릴 때까지는 기다려줘야 돼요.
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도 참 옛날 이야기입니다마는
아니 분명히 이건데 물었는데
아니다 그러더라고요.
제가 삐쳤다니까, 옛날에.
그때는 아니다 그러면 큰일나요.
그러니까 살살살살 달래고 기다려줘야 돼.
근데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그 따라붙는 그것이
다시 이거를 또 얽맨다는 걸 본인이 알게 돼요.
하여튼 공부는 그렇습니다.
하여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저의 최선의 충고는
끝까지 아니라는 사실
그래서 알 수 없다는 사실.
알 수 없어야 에고가 떨어져요.
이게 오늘 제일 중요한 말인데
“알 수 없다”는 걸 정말 알아야, 에고가 떨어져요.
근데 그걸 알기가 어렵다는 거지.
그러니까 기다려 드릴게.
스스로 “어떻게 놓습니까?”라는 질문이 끊어질 때까지.
지금은 그런 질문이 나오잖아요.
그게 에고의 욕망이다 이거예요.
본 지 얼마 안 되는 사람한테는
“그게 바로 에고다” 그러면
에고가 바로 삐쳐버려요.
상황 이해되죠?
여러분 마지막, 자기가 그렇다는 걸 알고 내려놓을 때
정말 시원하거든요.
그 포기할 때 시원한 거 아세요?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서구에 지금 에카르트 톨레나 바이런 케이티나 또 이런저런 사람들
깨달은 사람들이 제법 있잖아요.
깨달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가만히 보면
반드시 위대한 포기가 있었어요.
일종의 밑바닥을 친 거야.
인생의 쫑을 맛본 사람들이야.
다 내려놓으면 이게 비결이다, 이거예요.
정말로 쥐고 있던 모든 것을
인생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바이런 케이티 그랬잖아요.
인생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바이런 케이티가 자기를 버렸잖아요.
바이런 케이트는 스스로 요양원으로 들어갔어.
미국이니까 나라에서 운영하는 무료 요양원 있잖아요.
거기에 자기가 스스로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가는 데마다 사람들하고 또 싸우네.
자기 인생을 버린 사람이니까 거칠어져서.
거기는 나이 많은 분들이 계신데
젊은 여자가, 거친 여자가 들어와서 싸우니까
감옥에 갇혔는데
그 감옥이 그 요양원의 최고 다락방인 거예요, 혼자.
그 다락방에서 침대에서 뒹굴다가 떨어졌는데
그 침대에서 떨어진 상태에서 그냥 있었을 때
바퀴벌레가 와도
보통 같으면 질겁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를 포기하니까
바퀴벌레가 와도 그렇고, 쥐가 와서 발을 갉았대요.
쥐가 자꾸 긁적긁적했는데 그냥 포기하고 있으니까
이게 안 움직이니까
쥐가 이빨로 갉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깨어났다는 거예요.
모든 걸 포기했을 때 깨어났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공부가
처음에는 열심히 쥐어야 되는데
그 마지막에는 그 쥔 것을 놓을 때 깨달음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그 점 하나를 기억하고 계시다가
자기의 그 과오를 돌아보는 것
“세간에 대한 집착은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나도 모르게 출세간에 대한 집착을 쥐고 있구나.”
부처님이 큰 깨달음을 얻은 이유는
정말로 열심히 쪼았기 때문이에요.
정말 크게 내려놓았을 때 대각을 이루었다.
깨달음의 원리는 놓는 데 있어요.
근데 하여튼 놓기 어렵죠? 솔직히.
그리고 뭐가 있어야 놓지.
일단은 열심히 하되.
근데 우리는 참 행운아예요.
왜냐하면 화두라고 하는, 딱 하나만 하면 되잖아요.
완전 초보자라면 이 질문
“보입니까?”
보일 거 아니에요.
보인다는 사실은
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맞잖아요.
“지금 보입니까? 뭐가 보입니까?”
이 질문에 하나 대답하는 거예요, 초보자.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때부터는 시간 날 때마다
보입니까, 여기에 답하려고 애쓰는 거죠.
그러다 보면
금강권 율극봉이 꽉 답답해진다, 이거예요.
그러면 거기도 계속 이 질문을 놓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한 번 경계가 온다.
한 번 열린다든지, 시원해진다든지.
근데 그때도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은 해야 되는 거죠.
말하자면 시원해져도
구체적으로 “지금 보는 것이 뭡니까?”가 질문이잖아요.
그러니까 “What is this?” 지금 보는 이것
그러면 답은 “This is...” 하고 나와야 될 거 아니에요.
그거 나올 때까지는 해야 된다, 이거예요.
계속 중간에 경계는 변화가 돼서
경계란 말 이해하시겠어요?
이런저런 체험이 나더라도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야 된다.
그러면 마지막에 가면
지견이 생긴다 이거예요.
“이거구나” 하고 지견이 답으로 나온다 이거죠.
그럼 또 지견을 잡는다 이거예요.
근데 그때도 계속 화두를 들어야 된다.
이게 지금 지견 난 사람한테
“그때도 화두 들라” 이게 답이었어요.
대혜종고가 다 알겠는데 그래도 뭐가 시원하지는 않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끝까지 화두 들어라. 화두를 끝까지 추궁해라.”
그래서 거기서 더 추궁하고 더 추궁하니까
결국에는 화두 자체가 걸림돌이라 마지막 가서
하여튼 화두가 그래서 깨지는 거예요. 그게 타파되는 거예요.
그럼, 지금 이거 전체예요.
그럼 자기가 안 물어봐도 알 정도로 분명해
그 느낌이 있어요.
참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지만, 깨달음이 있어요.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
지견이 아니야.
그러니까 지견하고 깨달음은 달라요.
지견은 어떻게 다르냐 하면
이거는 이건데 시원하지 않아.
깨달음은 완전히 시원해요.
그래서 사람 테스트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래 뭐냐 하고 물어봐요.
그 사람이 “이 뭐꼬?” 화두를 들었으면
“그래 이것이 뭐냐?” 이럴 때
지견은 약간의 머뭇거림이 생겨.
지견은 생각이기 때문에 그 생각의 틈이 생겨요.
몇 가지 질문을 하면, 선지식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
답을 하는 과정에서
지견인 사람은 시간적인 거리가 생겨.
처음에는 척하다가
두 번째 질문에는 몇 초 걸리고
다음 질문은 또 몇 초 걸리고
다음 질문을 못 해.
근데 이 거리가 없는 사람은
답을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거리낌이 없어서 시원한 사람은
어떤 질문이 와도 즉각 답이 나와요.
뭘 답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묻기 전에 시원하고 안 하고는 자기가 알 거 아니에요.
하여튼 도리는 분명하니까 마지막까지 없어야 한다.
결론이, 지금 거의 다 다 됐지만
오늘의 결론이
본질은 본래무일물.
본질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에요.
누구 말이에요?
본래 무일물이 누구 말이에요?
육조 혜능 스님의 말이에요.
본질, 공, 무아, 자성, 불성,
이것은 본래 한 물건도 없다.
이 말은 뭐예요?
꿈을 꾸는 의식은, 꿈속에서는
결코 한 물건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완전히 한 물건도 없다.
근데 나도 모르게 이거겠거니 하는 것은
그게 마지막 관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하나의 지표로 삼아서 공부를 하면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쥐고 있을 수 있다.
그걸 돌이키는 것이 끝까지 가는 공부다.
방금 제가 드리고 있는 이런 말을 들으려면
옛날 같으면 전 재산을 바쳐야 돼요.
그리고 출가 안 하면 이런 이야기 안 해줘.
참 이런 귀한 말을
정말 인간이 대자유가 되는
이런 정말 딱 그 어떤 핵심적인 이 Itinerary, 이런 일정표를
이 공부의 이 과정을
상세하게 지금 다 드러나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서울 한복판에
가장 무명에 찌들은 인사동에서
이 무명을 벗기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 놀라운 이 비밀이 지금 이렇게 펼쳐지고 있잖아요.
정말 좋은 시대를 만난 거예요.
인생의 바닥을 치고 깨달은 서구인들은
정말로 자기가 깨달은 바를
완전히 일상용으로
우리가 말하는 이런 전문 용어 없이 완전히 풀어놨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다시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깨달음의 시대예요.
이 깨달음이 동양에만 있지 않아요?
정말 서구인들이 급속도로 맹렬하게 깨어나고 있어요.
자 그렇다면 이 많은 정보를
동양의 정보와 서양의 정보
또 같은 것이 남방불교, 또 북방불교 중에서도 참선, 티베트 불교
다양하잖아요.
이 모든 정보가 지금은 다 모여서
또 정제되고 해서
지금 하여튼 놀라운 정보 공개의 시대가 드러나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기 제일 좋아요.
인사동 선원은 비승비속(非僧非俗) 비산비야(非山非野)
그러니까 저도 선을 이렇게 공유하기 위해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가서 또 배워오잖아요. 배울 게 또 있잖아요.
그런 분들은 또 만나서 배워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공유하면서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여튼 감사한 일은
이 깨달음의 자초지종이 지금은 상세하게 드러나서
우리는 공부만 하면 된다.
그중에서도 화두 하나만 가지고 초지일관 뚫어내는 것
끝까지 화두 하나 드는 것
이걸로써 모든 공부를 다 해내는
지금 간화선이라고 하는 인연이
이렇게 펼쳐진 게
이게 진짜 감사한 일 같아요.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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