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불편함이 우리를 공부하게 만들고, 인생의 고통이 진리를 찾도록 이끄는 스승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부처님의 첫 가르침인 사성제를 통해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그리고 소멸의 방법에 대해 설명하며, 팔만대장경이 사성제의 각 조에 귀결된다고 합니다.
- 고통의 근원과 벗어나는 방법: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며, 생각이 좋다 나쁘다로 나누어 우리를 속이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01:00]. 팔정도를 통해 생각을 바로 보고, 바른 사유, 말, 행동 등을 실천해야 합니다 [01:59].
- 무명과 연기: 사건이 일어날 때 무명 상태는 분별심을 작동시키고 고통으로 이끌지만, 바르게 보면 에고에 속지 않고 팔정도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02:30]. 12연기를 통해 고통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무명을 바로잡아 정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03:30].
- 의식과 현상: 의식은 변하지 않는 수정체와 같고, 그 안에 인연 따라 변화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07:29]. 본질(의식)과 현상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며, 청산(본질)과 백운(현상)의 비유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10:08].
- 고전과 성숙: 고전 작품이나 성숙한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으며, 특히 성숙한 인간은 말 없이도 큰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12:28].
- 고통의 소멸: 공부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닌 고통의 소멸에 두어야 하며, 이는 상(고정관념)의 소멸을 통해 가능합니다 [15:58]. 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며, 잘하려고 하는 마음조차 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18:46].
- 불이법: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이법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며, 번뇌조차도 본질(의식)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2:28]. 욕이 나올 때 즉각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는 예를 통해, 모든 현상을 본질의 화신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제시합니다 [23:27].
- 의식의 중요성: 모든 소리와 감각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며, 의식은 변하지 않는 공간과 같습니다 [24:57]. 현상에 속지 않고 현상이 나타나는 공간(의식)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극락정토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29:44].
- 현실 수용: 현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후의 진리입니다 [33:49]. 미녀와 야수 이야기를 통해, 추한 노파(현상)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일 때 중생이 부처로 변하는 연금술을 설명합니다 [35:16].
- 불만족 극복: 불이법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수용하며 불만족이 없습니다 [33:27].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공부하게 만들어주죠.
그래서 인생에는 고통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이 선생님이죠.
일단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이대로 살다가는, 우물쭈물 이렇게 살다가
“인생이 이게 다가 아니야” 하고
진리를 찾아서 움직이게끔 해준다.
그래서 그게 고통인데
부처님의 첫 가르침을 사성제라고 하는데
고(苦)라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
집(集)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
멸(滅) 고통이 사라진다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
도(道) 고통이 사라지는 방법이라고 하는 성스러운 진리
이 네 가지가 있다.
이걸 가르친 게 사성제고
뒤에 나오지만, 팔만대장경은 사성제의 각주예요.
모든 것이 이리로 다 돌아와요.
자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게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내가 터득하고 있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그 핵심은 생각은
좋다 나쁘다를 나누어 가지고
좋은 건 사랑하고, 나쁜 거는 미워하게 만들어요,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안 속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이 올 때
“생각아, 귀엽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너희에게 속지 않는다.”
그러니까 생각을 보고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그래서 생각에서 벗어나는 그 과정을
팔정도라고 해요.
고-집-멸-도
도는 여덟 가지 바른길, 팔정도
첫 번째는 [정견]이에요.
바로 본다, 이거예요.
뭘 보는가?
생각을 바로 봐서 그 생각한테 속지 않는 거예요.
[정사유] 그때는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이분법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바른 사유가 일어나서
그리고 바른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업을 하고
바른 정진을 하고
바른 깨어 있음을 하고
그리고 바른 아까 대수용삼매에 들어가는 것
그러니까 그게 팔정도의 길이에요.
지금 우리가 경계에 부닥칠 때
경계란 말은
사건이 일어날 때
무명 상태면 분별심이 작동하고
그 분별심은 좋다, 나쁘다고 하는 이 일련의 이 과정을 통해서
고통으로 나를 끌고 간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근데 그거를 바로 잡으면
바로 보는 거, 사건을 바로 본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사건을 통해서 에고가
“거봐 내 말 맞잖아” 하고 이렇게 할 때
그때 정확하게 본다 이거예요.
그래서 팔정도의 길을 걷는다.
흔들리지 않는, 이 길을 걷는다.
내가 무명의 연기를 따라갈 것인가?
사건 사고에서
한번 복습합시다.
12연기, 고집멸도라고 하는 지금 사성제가
고가 12연기로 형성되고
집도 12연기로 이걸 설명을 했다.
그러면 “고통이 왜 발생하는가?”를 부처님이 설명할 때
무명 상태라면
습관대로 분별심에 찌들어 있는 상태라면
자기가 내가 의식인 걸 모르고
모든 게 나인 걸 모르고
이거를 나라고 하고
분별하는 이 몸을 분별해서 나라고 하고
생각 감정을 나라고 하는
그 상태에 지금 있는 것이 무명이다.
[무명]에서는 사건 사고를 만나면
[행]_ 행업, 업을 짓는다.
무명은 업을 짓고
그 업은 알음알이를 쌓아가고, [식]은 알음알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식은.
그러니까 무명이 업을 짓고
업은 알음알이를 계속 자기식의 사고방식을, 자기식의 안목을 만들어서
알음알이라는 건 아시겠죠?
분별하는 그 습관, 분별된 세계에 대한 사고방식, 이게 식이에요.
그러면 무명행식이 있으면
그 식은 분별된 것이 업을 통해서 만든 사고방식이 생기면
그 사고방식에 따라서 이 세계가 보여요.
그래서 명색이라고 하는
이름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왜곡된 세계가 나타난다.
그러면 인간한테는
이 몸에 6가지 감각기관이 있어서 [육입]
눈, 귀, 코, 혀, 촉각, 몸, 그리고 생각, 하는 6가지 감각기관이 있어서
나라고 착각한 거 하고, 이 세계하고 접촉이 일어나서
[촉]이, 접촉이 일어나서
접촉이 일어나자마자 이 분별하는 것은
이거를 좋다 나쁘다 하면서
촉수 좋다 나쁘다고 하는 [수], 좋다 나쁘다 하는 감각이 바로 일어난다.
이거야, 대하자마자.
그리고 수는 [애], 애증
좋다 나쁘다고 하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일어나고
[취] 취하고
사, 버리는 거
사랑하고 미워하면 취하고 버리는 게 취사가 일어난다.
그러면 모든 취사가 일어나면
나라고 하는 이 자의식이 굉장히 강화되어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유]
그 나는 [생], 이 모든 것을 자기가 태어났다고 하면서
이 모든 고통을 일으키고
그리고 [노] 태어난 그 나가 죽는다라고 하는 그 고통을 받고
[병] 나이가 들었으니까 병이 들어서 병이라고 하는 고통을 받고
[사] 내가 죽는다고 하는 그 죽음의 고통을 받고
이런 12연기, 12가지 이 고리에 따라서
무명이 벌이는 이 12가지 연기, 12가지 고리가
순식간에 쫙 일어나는 거예요.
그것의 반복,
이 반복을 윤회라고 하죠.
고통의 윤회가 사건을 대할 때마다 일어난다.
이게 보통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서
이건 ‘고해’라는 거죠.
근데 무명을 바로잡으면 정견, 바로 본다 이거예요.
‘바로 본다’ 이 말은 뭐예요?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의식이 있어요.
그리고 의식 속에
의식이라고 하는 투명한 수정체, 이건 그냥 저의 표현이에요.
왜냐하면 이거를 마니주라고 많이 이야기해.
자기의식을 마니
‘마니’는 ‘보석’이라는 뜻이잖아요.
‘수정체’ 아주 맑은 수정체 같아 이게
그래서 이 수정체인 의식 속에
인연 따라 지금 이런...
옛날에 그 만화경이라고 있었어요.
돈 주면 보여주잖아요.
그럼 이렇게 돌리면 막 온갖 모양이 나오잖아요.
이 수정체 속에 만화경의 이미지가 이렇게 펼쳐지는 거지.
펼쳐지는 것은
이런 모양도 펼쳐지고
소리도 펼쳐지고,
생각도 펼쳐지고,
촉감 이런 것도 펼쳐지고
이런 것이 펼쳐지는데
찰나 간에 나타났다가 찰나 간에 사라지고 있어서
이 펼쳐지는 것은
“아, 이게 실상이 없는 거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되는 거죠.
근데 본질의 입장에서 봐야지
이 변화가 보이지
본질은 안 움직이니까
안 움직이는 자리에서 보면
의식이 깨어서 의식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변화가 낱낱이 보이는데
의식의 자리를 놓치면, 변화 속에 있으면
이게 변한 줄 몰라요.
꿈속에 있으면 그게 꿈인 줄 모르듯이
현상 속에 있으면 이게 현상인 줄 몰라요.
그러니까 반드시 먼저 의식을 깨달아야 한다.
그 의식은 안 움직여요.
참 기가 막힌 거예요.
안 움직이는 거 안에
이렇게 인연따라 이런 장면들이
오늘은 지금 우리가 법회를 하니까
법회 모습이 이렇게 지금 나타난 거예요.
안 움직이는 수정체 안에
움직이는 이 법회 모양이 펼쳐지고
끝나면 돌아가시죠.
하여튼 문 나서면 거리가 펼쳐지고
수정체는 그대로인데.
몸을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은 계속 변한다.
그리고 한 생각을 일으키면
수정체는 그대로인데
여기에 보여지는 건 지워지고
생각이 또 여기 탁 나타나고
한참 생각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보이죠.
그 변하지 않는 이것을 비유하기를
청산이라고 하고, 청산.
그리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백운, 흰 구름이라고
“푸른 산은 여여한데 백운은 생멸한다.” 오고 간다.
주인과 손님
본체와 작용.
그러니까 깨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정견은 본질과 현상을 같이 보는 것.
항상 본질과 현상을 같이 보고 있는 것
수월 하면 물에 비친 달을 볼 때
보통 사람은 달에만 한눈파는데, 그 물을 같이 본다.
그러면 본질과 현상을 같이 본다할 때, 표현할 때
실제로 선방에 가면
반드시 이 푯말을 딱, 모든 선방에는 푯말이 있어요.
청산과 백운이라고 하는 푯말이 있어요.
청산이 붙은 자리에는 누가 앉는가?
그 절에 사는 사람들이 앉아.
참선할 때 그 위치가 그 절에 사는 사람들이 청산 앞에 앉아요.
백운이라는 말은 손님들
이번 한 철 살러 온 뭐 그런 손님들은
백운 앞에 앉아
이게 본체와 작용, 혹은 본질과 현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말 이해되세요?
백운이 자욱하게 끼었을 때
모든 걸 덮었는데
봉우리들이, 청산이 뾰쪽뾰쪽한 것들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남아 있어
상상해 보세요. 그 광경이
백운이 쫙 깔렸는데
몇몇 봉우리들은 위에 딱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청산과 백운
-체와 용
-본질과 현상
그 둘을 같이 보는 안목
결국은 정견의 모습을 표현해 놓은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불이, 혹은 중도, 혹은 연기, 혹은 일심이라고 하는 것으로 통합되는 거죠.
청산도 의식인 거고 따져보면
백운도 의식인 거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거
‘불이’라고 하는 거.
형상으로 표현해 놓은 그런 걸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이 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서양의 이런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를 보면
말할 필요가 없이
그냥 딱 보자마자 탁 깨지고, 기존의 고정관념은 깨지고
완전히 새로운 안목이 팍 열려요.
그게 걸작의 힘이에요.
고전이라는 말을 그냥 쓰는 게 아니에요.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인간이 그걸 한 번 대할 때 자기도 모르게 지금 성숙이라고 하는
그 성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한테 있어서 가장 큰 성숙은
이런 작품 앞에서 정신적인 키가 큰다, 이해되세요?
근데 최고의 고전은 뭔지 아세요?
최고의 고전은 ‘성숙한 인간’이에요.
그래서 정말 성숙한 인간을 만날 때
말이 필요 없이
그냥 같은 에너지 속에서
그냥 이렇게 확 열려버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이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선지식이라고 하는데
정말 인간 자체가 고전이 된
-그러니까 그만큼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수행을 하고
-그리고 이런 안목을 갖춘
이 본질과 현상을 같이 보는 안목을 갖춘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
이게 인간의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비결이에요.
하여튼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안목인데
그 안목을 키워주기 위해서
부처님은 첫 가르침이 사성제를 가지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현명한 가르침이에요.
저는 왜 현명하냐고 생각하느냐 하면
마음공부를 처음 잘 못하는 사람들은
택도 없는 깨달음을 추구해.
그러면 반드시 잘못돼요.
왜냐하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놈이 에고거든.
깨달음 뒤에는 항상 에고가 붙어 있어요.
나중에는 깨달음을 버려야 돼요.
‘깨달았다’ 하는 거는 반드시 에고가 그 소리 하지
불불(佛佛)불상견(不相見)이라고 부처는 깨닫지 못해요.
여러분 무서운 이야기예요.
부처는 깨닫지 못해요.
‘깨달았다’ 그러면 중생이 하는 소리예요.
부처는 왜 못 깨닫는가?
아니 본래 깨달았는데 뭘 깨달아요?
부처는 못 깨달아요.
우리는 모두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의식의 입장에서는
아니 자기가 자기인데 뭘 자기를 또 얻어?
‘깨달음을 얻었다’이 말이 정말 모순이라면 모순인 거예요.
깨달음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요?
부처는 깨닫지 못해요.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에.
중생이나 그따위 소리를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 굉장히 조심해서 하는데
따라서 공부의 목표를 깨달음으로 두면 삿되지기 쉬워요.
에고가 딱 그 뒤에 숨어 있기가 쉬워.
그래서 공부의 목표를 부처님처럼
고통의 소멸에 둬야 돼.
공부의 목표를 굉장히 실질적으로
이 고통의 소멸에 둬야 돼요.
그래서 자꾸 자기를 보는 게 공부지.
그래서 그 고통의 소멸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에는 여러분 고통의 소멸은
상멸(相滅)_상의 멸이에요.
고통의 멸은 상의 멸이에요.
그러면 ‘상’은 뭐냐 하면 ‘고정관념’이에요.
나누어 놓고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
그 고정관념, 그게 상이거든요.
여러분 보세요.
상 중에서 우리가 불이법에 의하면
번뇌라고 하는 상이
내가 지금 더럽다, 나쁘다, 내 업이 업장이다, 원죄다
그게 상이다 이거예요.
지금 굉장히 이게 무서운 말이에요.
“이것이 더러운 것이라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은
계속 이 분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상의 소멸이 고통의 소멸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한테는
상이 그 사람의 존재 이유예요.
자기 존재 이유를
“나는 이 땅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어.”
그래서 이 소명을 실현하는 게
그래서 그걸 불자들은 잘못하면 원력이라는 말로
-일반인들이 말하는 이상
-불자가 말하는 원력
-또 기독교인이 잘못 해석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게
굉장히 위험한
그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 상을 알아봐서
내려놓는 것이라서
상의 치유가 불이에요.
결국 우리 공부의 초점은
나도 모르게 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예요. 속고 있다.
그리고 그 상이 생각이에요.
상은 생각이 굳은 거예요, 고정관념.
상은 생각이 굳은 거예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거기에 지금 사로잡혀서
내 딴에는 열심히 잘하려고 하는 게 상이라는 걸
진짜 사람들은 꿈에도 몰라.
잘하려고 하면 불이법에 어긋나요.
아이 참, 내가 내가 말해놓고도 이게 참, 지금 이상한 말을 했네.
잘하려고 하면 불이법에 어긋나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지.
이거를 바꾸어서 좋게 만들려고 하고, 잘하려고 하는 그게 나의 상이다.
번뇌를 다 끊어낼 수 있다.
옛날에는 진짜 안 믿었어요.
법회 때마다 사홍서원을 하지만
이거는 부처님 말씀이고
나는 절대 불가능하다.
옛날에는 사홍서원이 네 가지 큰 서원이잖아요.
사홍_ 네 가지 큰 서원, 부처님의 서원이거든.
그러면 부처님이니까 이러시겠지.
근데 나는 절대로 불가능한다.
뭐냐 하면
-번뇌가 끝이 없는데 딱 끊겠다.
-중생이 한이 없는데 딱 건지겠다.
-법문이 한 량 없는데 다 이거 배우겠다.
-그 불도가 이 부처님의 길이 끊이 없는데 이걸 내가 다 이루겠다.
이 네 가지 큰 소원이
솔직히 입은 하지만 다 하니까
입은 하지만 속으로는 납득을 절대 할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이해되나요? 못된 불자였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 말이 다 소화가 되는 거예요.
저 혼자 감동해서, 내가 소화가 되니까.
이게 뭐예요?
번뇌란 더러운 생각이잖아요.
한마디로 말해서 부정적인 생각이잖아요.
부정적인 생각이 끝이 없는데 내가 다 이걸 끊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나쁘니까 없애야 한다는 번뇌상이 나한테 있었다 이거예요.
번뇌에다가 상 자를 붙이면 번뇌상이 돼요.
그러면 일반인들은 번뇌상이 있어
번뇌상은 뭐냐 하면
“부정적인 생각은 나쁜 거니까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번뇌상이에요.
이게 분별심이야
이게 에고가, 중생이 하는 생각이에요.
그러면 지금 보니까
보세요. 불이법을 믿으니까 나는
여러분 제가 불이법을 믿는다고 표현하지
불이법을 터득했다는 소리는 안 해요. 믿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믿음이 강해지니까
번뇌가 따로 있나?
낱낱의 번뇌가 전부 본질인 의식이 나타나는 모습이야.
그거를 내가 좋다 나쁘다 했다 이거예요. 지금까지는.
근데 이런 불이법에 대한 실상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눈이 바뀌어서
번뇌가 일어날 때
“아 번뇌 보살님 어서 오세요”하고
그 번뇌가 안 나타나줬으면
내가 본질을 너무 이게 공이라서 감지를 못할 텐데
번뇌 덕분에
이게 지금 공이 나타난 것이라는 걸 실감하는 거예요.
그 모양에 좋다 나쁘다 하고 모양에 속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한 개의 본질이 인연 따라 그렇게 드러난 것이어서
번뇌상을 타파하는 힘이 이 불이법에 있다.
불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믿으면
번뇌가 그거죠.
그러니까 번뇌즉보리라는 말이 그때부터 믿음으로 소화하기 시작해.
저도 모르게,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나를 서운하게 만든, 가끔 그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와.
지금도 그놈이 떠오르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그냥 자동으로 떠오르는 거라서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연 따라 그냥 생각이 나.
고상하게, “심플” 하고 바로 붙여서
“관세음보살” 그래요.
왜냐하면 그 한 생각이 욕을 일으켰고
관세음보살이 지금 그 모양으로 나온 것이라서
바로 심플
그러니까 “그놈”하고 욕하고
이것들이 일련에 나로 하여금 본질이 드러났다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
요 모양으로 나온 관세음보살이다 이거예요.
욕하고 즉각 관세음보살이 따라 나와
지금 습관이 되어서 믿으니까
불이법을 믿으니까.
그 놈도 본질의 화신이고
욕도 본질의 화신이고
그 본질을 나타내는 가장 친숙한 말은
저한테는 지금 여기 ‘관세음보살’
욕하고 관세음보살
그러니까 욕을 안 한다는 게 아니고
욕을 하는데 바로 관세음보살로 이렇게 돌리면
욕에서 욕의 상이 떨어진다.
이게 나쁜 거냐 이거예요.
하여튼 모든 것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가
불이법에 대한 믿음이 이것이 나오는 거예요.
불이법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소리 하나도
소리 하나가 어디서 일어났냐? 이거예요.
소리가, 여러분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
소리 덕분에 의식을 일깨운다 이거예요.
소리 없으면 의식이 일깨워지지 않아.
얘는 텅 비어서, 텅 비어서 이거 없으면 일깨워지지가 않아.
근데 이것이 좋은 것만 나오느냐 이거예요.
좋은 것도 이걸 가리키고
나쁜 것도 이것을 가리켜서
좋고 나쁨에 속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좋다, 나쁘다고 하는 상만 없으면
전부 다 이것의 소식이다.
그러면 “의식이 뭡니까?”라고 물었을 때
“아이고 지금 목이 마르네”
‘목이 마르네’ 하는 감각이 어디서 일어나요?
그래서 지금 이걸 컵을 드는 게
지금 무엇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어요?
마시는 게 뭐예요?
모든 게 이거예요.
그러니까 “의식이 뭡니까?” 할 때
“의식이다”는 말은
얼마나 그거는 재미없는
말로 하면 의식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여러분
의식, 본질을
본질이 의식이라서
의식이라고 하면 생각이 되어버려요.
지금 제가 무서운 말 했어요?
지금 이거 정말 중요한 말이네.
본질을 본질이라고 하면 생각이 돼버리네.
그래서 생각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본질이 뭡니까?” 그러면
이런다 이거예요.
앞에 뭐가 없으니까 그냥 이런다 이거예요.
이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큰 스님께서 법문 하실 때 주장자를 한번 이렇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말한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거 보여준 것만 가지고는 혹시 못 알아들을까 봐
한번 치기도 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주장자가 어디서 나타나요?
여러분의 의식, 저의 의식 말고
여러분의 의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장자를 든다 이거예요.
이 주장자가 나타나는 여기가 의식이다.
바로 당신의 의식이다.
그게 부처다 이거야.
“부처가 뭡니까?”라고 물으면
주장자를 딱, 손을 한번 든다.
주장자 없으면 손 든다, 손 뻗기도 해요.
이렇게 약간 푸시하는 느낌으로
“이거다” 이거예요.
그러면 모든 지금 손만 그런 게 아니고
저 같으면 지금 창문으로
망울진 은행나무 가지가 보여.
그 처음 필 때 예쁜 거 아세요?
은행나무 처음 나왔을 때 그거 정말 예쁘죠.
연두색, 처음에 하트 모양으로 이렇게 나오잖아요.
지금 저 망울이 드러났을 때
양쪽을 같이 보는 사람은
저 은행나무 망울과 저 은행나무 망울이 나타나는 저 공간 자체가
의식이라는 걸 같이 보고 있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공부에 그냥 그냥 골수야.
그러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도
나타나는 공간 자체를 알려주고 있고
모든 소리도
소리가 나타나는
그러니까 여러분의 의식이 없는 공간은 없잖아요.
이 의식은 무한대잖아요.
모든 것이 이 공간을 가리키고 있다.
근데 나타나는 것은
찰나생 찰나멸인데
이것들이 나타나는 공간은 여여부동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불취어상(不取於相), 나타나는 모양에 속지만 않으면
그걸 좋다 나쁘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취하고 버린다 하는
그 일련의 스토리에 말려들지만 않으면
다시 스토리에 말려들지만 않으면
이게 불취어상, 그 상이 멸하면
그 상에 속지 않으면
모든 것이 지금 부처라고 하는,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이 세계가
지금 이렇게 드러난다 이거예요.
여러분 극락정토가
어디가 있는데 내가 가야 되는 거예요?
아니면 지금 눈 한 번 깜빡하면 여기가 극락정토예요?
지금 같이 보면 극락정토고
같이 못 보면 이게 지옥이에요.
왜냐하면 갈등 구조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로 간단하게 모든 현상을 볼 때
현상만 보지 말고
그 현상이 나타나는 공간 자체인.
그러니까 의식은 항상 의식의 장이에요.
의식은 항상 필드예요.
의식은 의식으로만 안 있어.
항상 필드예요.
필드 안에는 온갖 이런 야생화들이 이렇게 피어나.
우리들은 야생화들이에요.
이 세상은
여러분의 의식의 장 속에 피어난 야생화 들판이에요.
그러면 꽃이 장미꽃 일변도면 지루하지 않을까요?
야생화는 다 다르잖아요.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형형색색의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이 야생화가
이렇게 펼쳐져 있는데
이걸 모르고 나는 좋다 나쁘다 하고 분별해서
더러우니까 없애려고 하고 깨끗하니까 취하려고 하는
지금 그게 우리의 그 중생심이라고 하는 분별심, 취사선택심, 간택심
요거 하나를 자각하는 것이 핵심인 거죠.
근데 일반적으로는 힘이 좀 약하지요.
다시 말하면 습관의 힘은 강하고
분별 습관의 힘은 강하고
이 존재의 양면을 중도, 불이를 꿰뚫어 보는 힘은
지금 현저히 약하다.
근데 다행스러운 것은
법회를 했는데
법회라는 말은 법에서 모이는 거죠, 회.
이 동안에 좀 깨어 있었죠? 비교적 깨어 있었죠?
나가면 또 옛날식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이런 거예요.
여기 지금 법회하는 이 시간만큼은 일종의 텅 빈 공간 같은 건데
진공묘유에,
이 의식의 공간을 우리가 깨워서 지금 함께 이 맛을 보고 있었는데
이게 진공이
풍선이 물속에 들어가서 탁 터뜨리면
순간적으로 진공이죠.
그런데 물이 어떻게 해요?
그걸 가만 두느냐 이거예요.
콱 밀려들어오죠, 나서면 콱 밀려 들어와요.
정말로 이 깨어난 상태에서 살아야 되는데
워낙 생각에 잠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기 때문에
조금 깨어나도 또다시 생각에 이것이 밀려들어온다.
기억나세요?
그래서 처방은 불이법인 거예요.
하여튼 결론은 버킹검이에요.
불이법이다.
처음에는 그걸 없애려고 한다.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하여튼 불만족이 중생의 특징이에요.
지금 제가 정리하고 있어
1분 만에 정리하고 끝내려고 해요.
여러분 불만족이 중생의 특징이에요.
불만족이 중생의 특징이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그런데 불이법을 믿는 사람은 불만족이 없다.
모든 걸 수용하니까.
그리고 최후의 진리는 뭐냐 하면
최후의 진리는 현실이 있는 이대로 본질이에요.
이게 최후의 진리예요, 최후의 진리.
이거를 다른 말로 하면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현실이 신이에요.
근데 우리는 이 신을
좋다 나쁘다 하고 구분하고
정말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현실과 싸운다.
이 말은 맞죠.
현실 속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고
나쁜 것도 있는 게 현실의 법칙이에요.
용사가 혼잡이에요, 용사혼잡(龍蛇混雜)
이게 법칙이에요.
근데 신은 청정하시지만
현실로 드러날 때는 반드시 상대성으로 드러난다.
근데 그거를 나는 ‘좋다, 나쁘다’ 하면서
분별하고, 지지고 볶아서 고통스럽다.
그러면 나한테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그 감정하고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
자, 왕자의 파티에, 화려한 파티에
시커먼 노파가, 아주 더러운 노파가 들어와서
“나도 배가 고파서 밥 한 끼만 주시오” 할 때
왕자가 쫓아냈다.
“물 흐리지 말라” 이러면서 쫓아내는데
그 노파가 쫓겨 나가면서
“너 철 좀 들어야 되겠구나” 하고
지팡이를 뿅 했더니 야수로 변했다.
지금 우리 인생에
나를 찾아오는 화려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철 없을 때는 화려한 것만 추구하지만
검은 노파가 왔을 때
이걸 쫓아내는 순간
나는 중생이라고 하는 야수로 변한다.
그러면 그 야수를 사랑해 주는 미녀를 만날 때
더러운 모습으로 변한 자기를 받아주는 미녀를 만날 때
이 마법이 풀린다.
이게 지금 <미녀와 야수>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같은 이야기 아닌가요?
우리는 우리 생에 불쑥 끼어드는 추한 노파를
자기도 모르게 딱 하고 밀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벌어지고
부처가 중생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근데 보세요.
야수를 받아주는 미녀가 뭐냐 하면
미녀는 본질이고 야수는 나의 현상이에요.
내가 본질이 되어서 나의 현상을 받아줄 때
이 현상이, 중생이 부처로 변한다고 하는 이 연금술
이걸 지금까지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미녀와 야수> 한 편 보는 게 나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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