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뭐냐면
내가 아직 공부의 주체가 돼 있는 거에요.
주체가 돼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몽중일여나 동정일여의 상태를 유지하는 내가
해야 유지하려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주관할 수 없는 꿈의 세계나 잠속에 빠졌을 때는
내가 통제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는 거거든요.
근데 동정일여나 몽중일여는 내 소관이 아닌 거예요.
법이 원래 그런 것이지.
내가 사실은 동정일여나 몽중일여는 내가 그거를 성취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러고 있어요.
원래 그러고 있어.
근데 우리는 공부가 아직 그렇게 깊지 않으면
내가 그 상태가 돼야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거든요.
내가 그 상태를 유지해야 되고
내가 그렇게 돼야 된다라고 나의 범위 안에서 공부를 봐요.
근데 법이라는 게 워낙에 무변이고 끝이 없어서
나도 이 법 안의 내용물인 거예요.
근데 우리는 작게 법을 보죠.
내가 어떻게 통제하고, 지키고, 유지하고, 성취하는 것으로서
법을 축소시켜 버리거든요.
그거는 뭐냐면은 공부를
인간의 어떤 분별 의식 안에서 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묻고 싶어요.
나도 상이죠?
나라는 것도 생각이죠?
그럼 생각 속에 들어간 내용이 나잖아요.
생각 속의 내용이
그러면 내가 동정일여, 몽중일여의 상태가 되는 건
나라는 상 안에 또 어떤 나의 것들이잖아요.
나의 공부들이잖아요.
나라는 상 속에 들어가고 나서의 공부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지금 동정일여가 안 된다 이거 아닙니까?
뭉중일여라는 것도, 오매일여라는 것도 나의 분별이잖아요.
근데 나는 상이라,
상에 또 상이 몽중일여이고 오매일여잖아.
그렇지 않나요?
상 안에 또 하나의 상이 동정일여 오매일여 아닙니까?
또 다른 상, 또 다른 공부에 대한 상을 짓고 있었다는 거죠.
근데 나라는 그 존재감도 나 이전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동정일여 이전인 것이고, 몽중일여 이전의 것이고
오매일여 이전에 이게 없으면
오매일여도 안 되고, 동정일여도 안 되고, 몽중일여도 안 돼요.
이미 이미 이게 없으면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는
말도 불가능하고, 그런 상태도 불가능 하고 ,그런 성취도 이루어질 수 없어.
이게 아니면.
그러니까 이 바탕 위에
모든 공부의 경계가 다 펼쳐지는 것이지.
그럼, 그 이전에 있잖아.
오매일여 이전에 있잖아요.
오매일여 이전에 있으면 진짜 오매일여 아닌가요?
이건 오매일여 이전이잖아요.
오매일여라는 분별, 오매일여는 상태, 오매일여는 공부 이전에 있잖아요.
그럼 이미 오매일여 아닌가?
오매일여가 다 이 일 아닌가요?
그럼 일여하네, 벌써 돼 있네. 그렇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 알아요?
뜻에 매이는 사람한테 그물을 던진 거예요.
생각이 남아있는 사람한테.
그래서 막 사람들은 잘못하면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그래
관문에 빠진 거지.
그런 상태가 되려고 그래.
벌써 오매일여인데
오도 이거고, 매도 일여면 벌써 일여한 거 아닌가?
자기 상에 빠진 거예요.
일어난 생각이.
그게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뭔가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그런 관념이 있어요.
그게 오매, 몽중,
이게 우리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인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도 분별이었다는 거예요.
이게 없으면 오도 안 되고
이게 있으면 매도 안 돼.
그럼 뭐야?
오와 매가 똑같은 거라고
그럼 벌써 일여 한 거예요, 오매는.
근데 우리는 일어난 생각에
‘깨어 있을 때와 잠들어 있을 때가 똑같아야 돼.’
유지하려고 막 조작에 들어가는 거예요.
벌써 일여한데, 벌써 일여한 거예요.
그게 뭐야?
이게 해탈이거든요.
관념에서 자유로워지는 거
분별 망상에서
그게 워낙에 미세해요.
그게 워낙에 큰 스님들이 말을 했기 때문에
그 권위에 우리가 휘둘리는 거예요.
근데 진짜 그분들이 의도한 건 뭐냐?
이러한 권위를 갖고 이렇게 말해도
얘가 걸리지 않을 수 있느냐?
그만큼 자기 법이 분명하냐를 이런 식으로 시험에 들게 하는 거죠.
잘못한 사람은, 공부를 잘못한 사람은 자꾸 그걸 추구를 해요.
추구, 쫓아가, 환상에 쫓아가.
그러니까 멀어지는 거죠. 점점
절대 그런 사람 오매일여가 안 됩니다.
근데 본래 오매일여에요.
내가 노력할 필요 없이.
그걸 깨달아라, 이거야.
깨어나라. 망상에서 깨어나라. 관념에서 깨어나라 이거죠.
이거요, 그런가 하지만 잘 보십시오.
이게 아니면 오도 없고 매도 없어.
그럼 벌써 오메가 일여 한 거예요.
이거요, 아주 작은 것 같지만 엄청난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죠.
서귀포에 ‘사람이 있다’라는 ‘생각’이 있다.
‘오’라는 ‘생각’이 있다.
‘매’라는 ‘생각’이 있다.
근데 그 생각이 일어나는 데는 똑같다.
그럼 본래 일여한 거다, 이게.
본래 일여 한 거다, 오매가.
이미지와 관념.
거기 들어가서 자꾸 이걸 하나로 만드려니까 됩니까?
벌써 어긋나고 둘이 돼버렸는데
그래서 오가 일어나는데 매가 일어나는 데는 벌써 일여 하더라 이거예요.
그래서 이게 다 회양해야 돼요, 다.
그게 모든 공부에서 제시되는 방편어들도 다 회양시켜야 돼.
본래가 일여한 거예요.
본래 아무런 틈이 없고 둘이 없어요.
그게 몽중일여도 마찬가지예요. 동정일여도 사실 그런 거예요.
우리가 동정일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에요.
벌써 동정일여 했어요, 벌써.
동하는 것도 이거고
정하는 것도 이거고
그럼 벌써 일여한 거지, 내가 어떻게 동정일여가 되는 게 아니라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그래 동정일여는 되는 것 같아.’
그거는 왜냐하면 우리가 통제가 가능하거든, 일상생활에서.
근데 오매일여, 몽중일여는 뭔가 내가 의지로 어떻게 작동이 안 돼.
그러면서 막 이게 막 뒤섞이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지.
동정일여 할 필요 없이 벌써 일여한 것이고,
몽중일여 할 필요 없이 벌써 일여한 것이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만약에 막히는 게 있으면
그걸 어떻게 마음을 써서 이렇게 맞춰보려고 하면 안 돼요.
그것이 일어난 그 자리에는 다 모든 게 다 구족돼 있어요.
그리고 회항해야 된다. 돌이켜라. 돌이켜라.
본래 고향, 거기에는 아무 분리가 없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무런 장애가 없다 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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