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반야5] 쥐고 있는 것이 있어서 괴롭다, 이대로가 실상이다

Buddhastudy 2023. 7. 10. 19:35

 

 

,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할 때 반야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반야경)를 반야심경이라고 줄여서 하는 것처럼

반야지혜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 보니까

오늘도 반야에 대한 이야기를 좀 이어가겠습니다.

 

반야를 세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어요.

그것을 방편반야 또 실상반야 그리고 관조반야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우리는 평생 세상을 살면서 분별하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여기 절까지 도착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분별입니다.

지하철 몇 호선을 탈지, 또 내려서 어떻게 걸어와서 어디까지 와야 할지,

이런 걸 다 알음알이 분별로써 알아야, 분별을 가지고 왔단 말이죠

 

이처럼 우리는 그 분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반야심경에서는 이 분별의 지혜가 아닌 그 무분별지를 설한단 말이죠, 무분별지.

(분별지-> 무분별지)

 

무분별지는 그렇다면 생각이 없는 것이냐?

그래서 이걸 또 무념이라고도 표현하다 보니까

또 명상이라든지 온갖 공부하는 단체에서

생각을 끊어야 된다’,

생각 없는 게 그게 무심이고, 무념이고, 그게 무분별지다

표현하다 보니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반야지를 얻으려면 생각하면 안 되는구나그렇게 생각해서

명상하면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걸 끊어 없애려고 막 노력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수행법을 가지고

뭐 염불 수행법을 가지고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관세음보살염불을 한다든지

옴마니반메훔한다든지

아니면 관한다 그러죠, 위빠사나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올라오는 걸 관찰하는 걸 통해서 생각을 없애려고 한다든지

그래서 보다 생각을 없애는 세련된 도구?

생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어떤 세련된 수행법이라는 무기를, 최신의 무기를 장착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 무심, 무분별지라는 것은

말은 무분별지인데 그럼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냐?

이게 뭐냐면

/분별하되 분별에 끌려가지 않는 거예요.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줄 아는 것./

 

우리의 목표가 생각 없이 사는 걸까요?

그러면 돌이나 나무막대기는 이미 생각이 없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게 목적은 아니잖아요.

 

그것처럼 생각은 다 하고, 분별은 다 하지만

그 분별이 실체가 아님을

고정된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 분별 망상이라는 생각 자체가

인연따라 그렇게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지

그게 뭐 정해진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

그 사실에 눈 뜨는 거예요

비실체성의 눈 뜨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거기에 눈을 뜨지 못했다 보니까

항상 세상을 볼 때 보자마자

이건 좋고 저건 안 좋아

이건 마음에 들고 마음에 안 들어

이건 더 갖고 싶고 저건 버리고 싶어

 

소리를 듣자마자

이 소리는 더 듣고 싶고, 저 소리는 듣기 싫어

냄새 맡자마자, 맛보자마자

이 음식은 더 먹고 싶고, 이 음식은 먹기 싫어

(취사간택)

 

그 비싼 돈 주고 비싼 차를 사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이 뭐 탑승감이 더 좋으려나요?

근데 요즘 사람들은 탑승감 때문에 비싼 거 사는 게 아니라 그러더라고요.

탑승할 때 느낌이 아니라, 내릴 때 남들이 봐주는 그 시선

그것 때문에 비싼 차를 산대요.

 

그만큼 우리는 남들의 시선에

/내가 내 인생을 주인으로서 사는 게 아니라

남들의 시선에 끌려다니며 살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는 분별을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보자마자 듣자마자 눈귀코혀몸뜻,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자마자

단박에 내 의식에 따라서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놨던 분별의식, 내 지식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나만의 그 업식이 있단 말이에요.

나만이 쌓아올린 나의 업식이 있어요.

내 업식이라는 필터, 색안경에 빗대어서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합니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처럼 저마다 다 자기만의 분별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게 따로 있고, 자기가 싫어하는 게 따로 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고 집착하고

갖지 못했을 때 괴로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내 인생에서 밀쳐내고 싶은데 밀쳐 내지지 않을 때

싫어하는 사람이 내 인생에 자꾸 나타날 때 괴로워한단 말이죠./(탐진치)

 

이렇게 반야지혜가 아닌, 무분별지가 아닌, 분별지를 따라다니면 둘로

나누어서 좋거나 싫거나

둘로 나누어 놓은 다음에

좋은 건 집착해서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해서 괴롭고

싫은 건 밀쳐내고 싶은데 밀쳐내지지 않으니까 괴로움.

 

이게 바로 취사간택에서 오는 괴로움인데

이 취사간택에서 오는 괴로움

이게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괴로움이에요.

 

저는 취하거나 버리는 게 없는데요?

그런데도 저는 괴롭습니다이렇게 말을 해요.

 

남편이 매일 같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매일 같이 담배를 피우는데 그건 맞는 거잖아요.

저것만 바꾸면 내 인생은 정말 행복할 것 같은데

저 남편이 저거 때문에 내가 괴로운데

이게 어떻게 내가 뭘 취하는 거예요?

맞는 말 하는 거지.

저 사람이 틀렸고 내가 맞는 게 당연하잖아요.

저는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려는 것도 없는데, 왜 괴롭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옳은 것을 취하는 것도 괴로움이에요./

불교 공부는 중도라는 공부는

옳은 걸 더 많이 가지는 공부가 아니에요.

싫은 걸 효과적으로 밀쳐내고 버리는 공부도 아닙니다.

 

그건 이 세상 공부죠, 세속의 공부죠.

/세속의 공부를 하면 내가 좋아하는 걸 더 많이 갖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 그 말이 뭐겠어요?

취하게 해주겠다는 거 아니에요.

내 말만 들으면 그거 다 얻을 수 있다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쁜 말은 아닌데 좋은 말인데

그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취하거나 버리는 거죠.

 

근데 우리들 중생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취하고 버리는 것밖에 해보지 못하고

그거 아닌 것은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취했을 때 오는 행복

혹은 효과적으로 버렸을 때 오는 행복

그것밖에 몰랐던 거예요, 우리는.

그러다 보니까 그것만을 추구하고 살았던 것이죠./

 

이 전혀 다른 무분별지의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무분별지를 배우는, 출세간을 배우는 절에 와서도

우리는 뭘 배우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걸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요?”

내가 싫어하는 걸 효과적으로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고/

절에 와서 어떤 얘기를 하느냐 하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이루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해서 그렇다

수행력이 높아서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옛날엔 그런 말도 저는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분이

스님이 돼서, 수행자가 돼서, 몸이 아프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 잘못한 거다.

수행자가 되면 몸이 아플 수가 없다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정말 안목이 없는 사람이죠, 한마디로 말하면.

부처님은 몸이 아프지 않았습니까?

부처님도 잘못된 음식 드시고 설사 복통이 나셨어요, 당연한 거예요.

 

근데 우리는 지금까지 다 마음속에 뭔가 취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마음에 뭔가 붙잡고 있는 게 있단 말이에요, 가지는 게 있어요.

/가지고 있는 게 있으면 무조건 괴로움입니다./

 

내가 괴롭다.

뭔가 내가 쥐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뭔지 몰라서 그렇지.

좋은 걸 쥐고 있는 것도 쥐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걸 쥐고 있어도 그것도 쥐는 거예요.

/그럼 쥐지 말란 말이냐?

쥐라고요.

그러나 집착하지 말고 쥐어도 좋다./

 

불교는 되게 해주는 게 아니라

되는 것과 안 되는 게 다르지 않다, 둘이 아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는 거예요.

 

버는 것만 최고가 아니라

벌든 안 벌든 상관없다

버는 삶도 좋고 벌지 않는 삶도 좋다.

 

모양 따라가는 거니까.

부자와 가난은 중요하지 않단 말이에요.

분별 된 모양을 따라가지 않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래서 이 무분별지를 공부하는데

우리는 한 번도 무분별지를 확인해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분별만 하고 살아왔다 보니까.

 

 

--

그래서 반야지혜의 첫 번째는 [실상반야]라고 합니다.

/깊은 반야가 뭐냐?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다

이 실상이라는게 바로 실상반야입니다./

이 실상을 비추어 보는 지혜가 깊은 반야다라고 은사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실상을 비추어 보는 지혜라는 이 말 가운데

방편반야, 실상반야, 관조반야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실상, 실상이죠

비추어 보는게 바로 [관조반야]에요.

관한다. 본다는 거죠.

, 비출 조, 비추어서 관해 본다 이거거든요.

실상을 비추어 본단 말이에요.

 

뭐가 실상이냐?

무분별

즉 우리는 지금까지도 우리는 다 본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허상을 비춰보고 살았단 말이죠.

 

뭐가 허상이에요?

자기 생각 속에 분별해서 만들어 놓은 모양, 그게 허상입니다.

분별 된 대상이 허상이란 말이에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둘로 나누어 놓으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고,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고

이렇게 둘로 나뉜단 말이죠.

 

둘로 나뉘게 됐을 때 우리는 분별 된 대상

, 이건 커라는 모양을 취한단 말이에요, 그 모양을 맞다고 취한단 말이죠.

 

금강경식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가 서로 상이라고 알고 있는 상, 모양 상

모양을 취하는 겁니다.

 

즉 세상을 볼 때 보자마자 바로 모양을 취해서

, 이거는 컵이다’, ‘이거는 스님이다’, ‘뒤에는 부처님이다

이렇게 모양을 취해서 그것을 모양으로 본단 말이에요.

/모양으로 보는 거예요.

실상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허상으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 앞에 계신 부처님을

부처님, 거룩하신 부처님이렇게 보는 게 당연한 불자 된 도리죠.

그런데 그것은 실상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죠.

허상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단하 천연선사는

눈이 왔을 때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대웅전에 있는 부처님 목불을 빼서 땔감으로 썼단 말이에요.

마조스님을 찾아갔을 때 선방 중간에 있는 성상 위에 머리 위에 올라탔어요, 인사로.

와서 삼배를 드리고 큰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려야 되는데

그거를 뭐로 해 대신했느냐?

선방 중간에 있는 성상의 목 위에 올라탔단 말이에요.

문수보살상 같은 상 위에 딱 올라 앉았단 말이에요.

 

그걸 보고 스님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마조스님께서 나와서는

내 아들이 천연하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단하 천연선사라고 불러요.

 

,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봤을 때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다 허상이란 말이에요./

상을 보고 살아왔구나, 모양을 쫓아가면서 보고 살아왔구나 라는 사실이란 말이죠.

 

실상은 뭐냐?

/실상은 생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께서는, 옛날 큰스님들 어른스님들은 전부 다

이대로가 이대로가 바로 실상이다.’

이대로가 바로 그냥 이거다 이거다.’

이것이 부처다, 이것이 진실이다하시더란 말이에요.

두두물물 산하대지가 그대로 법신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신단 말이죠.

 

그 보통 사찰에 가면 대웅전에 주련들, 제일 많이 있는 주련이

*불신충만업업계 보현일체중생전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

이런 내용이 많아요.

 

*불신,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항상 조금만 해서 항상 가득하다.

이게 실상반이에요

불신충만어법계

다 실상반야에요. 전부 다 실상반야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부처님 몸은 법신은 항상 법계에 가득 충만합니.

 

*보현일체중생전, 일체의 중생 앞에 딱 몸을 항상 드러내고 있어요.

항상 우리 눈앞에, 목전에, 실상반야가 드러나 있습니다.

 

*수연부감미부주, 인연따라 감응하지 않는 것이 없단 말이에요.

이렇게 인연따라 감응을 하고, 차를 마시는 것으로서 감응하고

항상 법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항처차보리좌, 언제나 바로 이곳 보리좌,

항상 깨달음의 자리, 목전이 늘 깨달음의 자리에요.

언제나 법신불이고, 언제나 진실이고, 언제나 이 실상이 드러나 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 실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을 거야

실상이란 뭔가가 있을 거야

근데 나는 지금까지 허상만을 보고 살았어

그럼 나는 실상을 봐야 되겠구나해서 실상을 찾아 나섭니다.

 

이걸 보면서

도가 무엇입니까?’ 하니까

뜰앞에 잣나무다라고도 하고 이것이다했단 말이에요.

그럼 이걸 보고서 뚫어져라 눈에 힘을 주면서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 여기서 실상을 봐야 되니까.

실상 나와라하고

왜 자꾸 나는 컵만 보이느냐, 허상만 보이느냐, 실상을 찾아야 되겠다하고

바깥으로 보는 것마다 내가 실상을 봐야 되는데하고 실상을 찾는단 말이죠.

 

근데 그건 뭐겠어요?

이렇게 말을 하죠.

찾고자 하지만 않으면 바로 실상이다, 바로 드러나 있다.

 

이건가 저건가? 이렇게 생겼나 저렇게 생겼나?

이게 불성인가 저게 마음이고 본래면목인가?

하고 내 찾는 마음은 뭐겠어요?

찾는다는 말의 뜻을 보면

찾는 내가 있고 찾는 찾아지는 것이 있어야 되잖아요.

내가 찾는다는 행위 자체는

찾는 나가 어떤 것을 찾는 거잖아요.

지금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거예요.

이미 둘로 쪼개 가지고

내가 저것을 찾으려고 둘로 쪼개는 작업을 자꾸하고 있는 거죠.

찾겠다라는 것은.

 

/회광반조해서 문득 돌이켜서

이 찾고 있는 이놈을 확인하는 것인데/

끝끝내 우리는 분별의 습관이 나를 평생토록 집어삼키고 있었다보니까

분별해서 찾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실상반야를 그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느냐?

실상반야라는 게 따로 있느냐?

따로 있지 않단 말이에요.

 

소를 찾아야 된다.

소를 찾았으면 소를 키워야 된다.

그 소를 누가 키우냐 하는 사람이

소를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데

소를 찾아야 된다이런단 말을 한단 말이에요, 선에서.

그 소가 자기성품, 본래면목이라고 한단말이에요, 방편으로.

 

근데 나중에는 소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진다고 했잖아요.

불성, 자성, 본래면목, 실상 이게 따로 있지 않단 말이에요.

내가 찾을 수 있는 실상이 저 바깥에 따로 있지 않단 말이죠.

분별만 없으면 그냥 실상이에요.

그걸 이름해서 실상이에요, 그냥.

 

분별이 없으면 그걸로 전부지

따로 분별없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말로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분별 이전 자리이렇게 표현하고

분별 이전 자리첫 번째 자리이렇게도 말했지만

말일 뿐입니다.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이걸 보면 안 되죠, 달을 못 보죠.

 

그래서 법문들을 때는 막 긴장하고

뭔가 다 외워야 되는데, 뭐 줄 긋고, 받아 적고

이거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집에 가서 다시 한번 떠올려 봐야지

이렇게 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들으면 돼요, 그냥.

 

 

--

/분별하지 않고 보면 그게 바로 실상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실상반야를 어떻게 내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느냐?

그게 바로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반야.

 

관조반야라는 건 뭐냐면 실상반야의 어떤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세 가지가 다른 게 아닌데 나눠서 설명해 본 거예요.

 

실상반야를 어떻게 볼 수 있느냐?

관조해야 된다.

/관조해야 실상을 볼 수 있다./

관조는 관_ 본다, _ 비추어 본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수행이라고 하면 항상 지관이라고 말하잖아요.

지관이라는 것은 멈출 지, 볼 관

분별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하는 거예요.

이게 팔정도에서의 정견이죠.

정견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왜곡해서 보는 선수들이죠.

근데 있는 그대로를 생각이나 분별의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분별을 멈추고 보는 것

그게 관이에요./

 

이게 마치 뭐와 같으냐면

거울이 모든 걸 비추잖아요.

여기 이걸 거울이라고 봤을 때

거울이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비춰요.

거울은 화장실 가서 똥을 비춘다고 해서 거울이 인상 쓰지 않아요, 분별하지 않아요.

아주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비춘다고 해서

막 기뻐해서 막 집착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분별하지 않습니다.

취사는 더욱더 하지 않죠.

그냥 있는 그대로 빛을 뿐이에요.

 

나에게 거울과도 같은, 비추는 이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죠.

근데 우리는 먼저 첫 번째 자리에서

먼저 이 거울과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데

보자마자 분별할 뿐이지요.

보자마자 분별해서

이건 파랗고 빨갛고, 크고 작고,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르고, 너고 나고, 좋고 싫고.

그 분별해 놓고 분별 된 대상을 그거라고 해서 취한단 말이에요.

내가 취하는 거예요.

내가 가서 그걸 취하는 거예요.

분별해 놓고 취사한다.

 

근데 분별하고 취사하기 이전 그냥 비추는

이 마음이 없냔 말이에요.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 아니에요?

 

그래서 이것을 고경이라고 불렀어요, 옛날부터, 고경, 옛 거울이다

왜 옛 거울이라고 했느냐?

이 거울과도 같은 이 마음은 마음거울이라고 하죠.

마음거울, 마음거울은 언제인지 모를 옛날부터

한 번도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불생불멸한다고 하는 거예요.

부증불감 불구부정하단 말이에요.

깨끗하고 더럽지도 않고 생기거나 사라진 것도 아니고

늘 있단 말이에요, .

 

자기에게 마음의 측면이 있잖아요, 누구나.

먼저 비추고, 그다음에 분별하잖아요.

즉 딱딱딱, 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 스님이 손가락으로 뭘 치나 보다, 나무를 때리나 보다이렇게 생각을 하죠.

 

듣자마자 바로 분별을 한단 말이에요.

, 이 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 듣기 나쁜 소리

아까 소리와 이 소리가 다르구나

이렇게 분별해서 듣자마자 분별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를 들면

갓난아기도 딱딱딱, 이 소린 들을 줄 알아요.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다가도 옆에서 딱딱딱, 이 소리는 들을 줄 알아요.

갓난아기나 고양이는 들을 줄 아는 이 성품은 똑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가지고 분별하고, 해석하고, 판단한 다음에

그것을 그 소리와 동일시 하죠.

이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야 듣기 좋은 소리야.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졌을 뿐인데.

이걸 진실이라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겨요./

 

층간 소음이 처음에 아무렇지도 않다가

한번 짜증 나고, 두 번 짜증 나다가, 이게 12년 계속되면 약간 정신병이 온다 그래요.

층간 소음이 막 나를 죽이는 것처럼 괴로워 죽을 것 같다 그래요.

인연따라 생겨나고 사라진 소리가 이 소리가 나를 죽일 수 있어요?

 

나를 미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근데 언제 그게 가능해져요?

내가 그걸 좋다 나쁘다 분별해서, 생각과 해석을 개입시켜서,

저놈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나 보다

온갖 생각과 소설을 쓰면서 개입시켜서 그걸 진실이라고 믿을 때

내가 그 소리에다 힘을 실어줬잖아요.

그 분별에다가 분별 된 대상에다가 힘을 실어 줬잖아요.

그리고 그걸 믿을 때 그때 그것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해요.

괴물처럼 자라나서.

 

 

어제 어떤 분께서 한 15년 정도를

죽을지 모른다는 그 괴로움, 죽을 것만 같은 괴로움, 병 걸릴 것만 같은 괴로움

그래서 습관적으로 매일 같이 병원을 찾아가고

괜찮다고 하는데도 혹시 모르니까 또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조금만 몸이 약간만 이상해도 이거 큰 병 아니야?’ 찾아가고

 

어느 순간인가 자신이 자기 생각을 믿기 시작했죠.

난 언젠가 죽을지도 몰라

몸이 조금 아프면 이거 큰 병인 거 아니야?’

 

그 생각을 믿기 시작하면서

거기 실체화를 강하게 하게 되면

그 분별 망상인 줄 모르고 실제라고 여기고 힘을 실어주게 되면

그게 나를 잡아먹어요.

내 인생을 망쳐버려요.

 

그래서 그분 말로 십몇 년 동안 이거 나으려고 온갖 병원에 다 다녀보고

이 병원에서 아니라고 해도

더 큰 병원 더 큰 병원, 용하다라는데 다 찾아보고

온갖 치유할 만한 데는 다 찾아 다녔기만 한 게 아니라

너무 힘드니까 나중엔 무당도 찾아가고

뭐 온갖 다양한 곳을 찾아가면서

15년 동안 노예처럼 휘둘리며 살면서

고통받은 자신이 한심스러워 죽겠다.

 

그럼, 그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이 올라오자마자 그걸 믿고

그 나와 동일시에서 그걸 그 생각의 나래를 뻗치면서

그 생각을 쫓아가는 게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 생각이 일어나면 막 불안하다가

이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병원을 찾아가지 않느냐?

 

이거를 한번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거울의 자리에서, 이 첫 번째 자리에서 바로 곧장 일어난 생각을 쫓아가서

생각에 밥 주는 일을 하면서

생각 따라 병원을 가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고

이 괴물처럼 생각을 만들기 이전에

그 생각이 올라올 때 여기서 먼저 생각을 바라보는 게 있지 않나요?

어 있죠.

?

어떨 때는 그 생각이 일어날 때 나는 죽을 것 같은, 병 걸린 것 같은 생각이 일어날 때

막 괴로워 죽을 것 같다는 거죠.

그런데 24시간 그런가요?

아니죠.

어떨 때는 편안하다는 거예요. 그걸 잊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잊고 그런 생각 없이 편안할 때가 있다는 거죠, 당연히.

 

그러면 그 병 걸릴 것 같아 죽을 것 같은 생각은 왔다가는 거잖아요, 그죠?

왔을 때 온지 아니까 내가 막 두려움에 떨어요.

두려움에 떤 줄 알고

갔을 때 떠나간 줄 알아요.

그것도 내가 그 두려움이 없을 때 마음이 평화로운지 알아요.

지금은 문제 없네하는 걸 또 본인이 알아요.

 

그러면 그건 왔다 간 거잖아요.

왔을 때 온 줄 알고 갔을 때 가는 줄 아니까

늘 여기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연따라 왔다 간 거잖아요.

그럼, 그 왔다 가는 것이 있으려면

왔다 가는 것을 왔을 때 온 줄 알고 갔을 때 가는 줄 먼저 아는

여기서 먼저 그것을 비추는 마음거울이 먼저 있잖아요.

 

이게 진짜 나인 줄 모르고

비춘 내용물, 대상, 그거에만 사로잡혀서

거울은 똥이 오든, 아름다운 게 오든, 그냥 비출 뿐이잖아요.

근데 이게 똥인 줄 알고 막 괴로워 죽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 생각이 정말 싫은 건 줄 알고

비춰보는 자리, 이 자리에서 볼 뿐이란 말이죠, 볼뿐.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이 이렇게 있다

내가 있다, 세상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다,

나는 몇 살이다,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다

이거 다 생각이 만든 색안경이에요.

 

나는 부자다 가난하다, 난 잘났다 못났다, 자식은 공부를 잘한다 못한다

우리 집은 좋다 안 좋다,

이거 다 생각 아닙니까? 생각으로 덧칠된 거죠.

 

실제 남편, 남편이 좋다 나쁘다

이게 경험되는 게 아니라

실제 이 첫 번째 자리에서 실제 경험되는 건 뭐예요?

(See).

이게 먼저 경험되죠.

 

남편을 비추는 이 자리가, 분별하기 이전의 그냥 딱, 이 봄.

이게 먼저 있죠.

그 남편을 내가 내 식대로 해석해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나한테 잘하는 사람이야, 못하는 사람이야해석해서

내가 해석된 남편을 데리고 평생 살잖아요.

 

근데 그건 자기 생각을 투사해서 자기 생각을 보면서 사는 거예요.

진짜 남편은 한 번도 못 본 거예요.

자기 생각으로 덧칠한 남편을

내가 왜곡시켜 놓은 남편만 내가 보고 살았던 거죠.

 

이 남편이 회사 가면 누군가에게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거나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거나

정말 부러운 사람이거나

여러분을 보고

부장님, 부장님 사모님은 너무 좋으시겠어요이럴 수도 있단 말이에요.

남의 속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드러난단 말이에요.

근데 나는 나에게 드러난 이 남편

내가 생각으로 덮어씌워 놓은 분별의 이 사람을 데리고 살았던 거예요.

그건 허상일 뿐인데.

 

그 사람의 진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의 허상만 쫓으면 살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실상으로서의 그 사람을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그 사람의 실상으로서의 그 사람을 본다는 거는, 말해 보자면

바로 부처예요.

남편이 아니라, 말썽부리는 자식이 아니라.

 

나는 가난해이러면서 막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지만

실제 가난도 없고 부자도 없죠.

실제 경험하는 건 배고플 때 그냥 밥 먹는 거예요.

근데 돈이 좀 부족하니까, 조금 싼 데 가서 조금 싼 걸 사는 거예요.

조금씩 사고 더 아끼고 절약하고 살고 있는 거예요.

돈에 맞춰 살아야 되니까.

 

그러더라도 먹는 것 똑같고 조리하는 것 똑같아요.

이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 자리에서는.

 

근데 그것을 해석할 때만 가난 부자가 해석될 뿐이지요.

가난한 사람도 밥하고 김치를 먹고

입에서 관하는 이 관조하는 자리는 똑같죠.

입으로 밥이 들어가고, 김치가 들어가고, 씹어요.

 

이 첫 번째 자리에 이 경험, 날것의 경험

나는 김치와 밥밖에 못 먹으니까 비참해, 가난해.’

이거는 생각이죠.

그냥 그냥 씹고 있다는 이 경험

이건 다르지 않단 말이에요.

 

항상 첫 번째 자리에 딱 오면 다 평등해요.

전체가 평등합니다.

그래서 불이법이에요.

둘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이 분별지만 가지고 분별 왜곡해서만 세상을 봐왔다 보니까

이 관조반야의 자리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관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그것이 바로 실상반야인데

그런데 분별로서만 봤단 말이에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춘단 말이에요, 지관.

분별을 멈추면 비로소 뭐가 보일까요?

이 실상이 드러난단 말이에요, 실상반야가 드러난다.

 

이 관조라는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상이죠, 요즘 쉽게 말하면

요즘 아주 유행하는 명상 또는 위빠사나 수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러죠.

 

그럼, 이것을 이 실상반야를 관조반야로 해서 본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실상 반야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게 관조반야입니까?

뭐가 실상반야 합니까?

이걸 처음에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제가 지금 말로 설명했으니까 여러분이

아 관조 한번 해 봐야지하는 마음도 들고

그러면 나중에는 딱 실상반야 확인할 일이 있을 거 아니겠어요.

 

근데 이게 모든 게 다 뭐를 의지해서 있었을까요?

제 말을 통해서, 이 경전을 통해서

이 경전이 없고 말이 없고 언어가 없었다면 우린 이것을 알지도 못했겠죠.

이 수행을, 관조반야를 실행해 보지도 못했겠죠.

 

이 진리를 실상을 드러내주는 것은 말로는 드러낼 수 없어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또 여기 접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에요, 말은 전부 다.

실상반야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어요.

말로 설명하면 다 어긋나요.

 

그 옛날 스님들은 설법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 똥물을 끼얹는 일이다, 이랬단 말이에요.

? 여법한 말 한마디 그런 게 없어요. 여법한 말 한마디가.

 

그러니까 나중에는 선사 스님들이 여법하게

말을 하고 나서도 스스로 지저분한 걸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말을 하고 설법을 하고 그걸 거둬들인단 말이에요.

 

불성을 깨달아야 됩니다해놓고

불성이라는 것 또한 없다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여법한 말 한마디를 해야 하는데 말하면 말 따라가니까

활하고 소리를 지르고

막대기로 한 대 때리고

손가락 한번 들어 올리고

그렇게 말 아닌 말을 통해서

 

그래서 화두, 화두는 어떤 말을 따라가는 게 화두가 아니거든요.

말 이전, 말머리에요, 말 이전, 말이 아닌

그 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직지인심, 딱 가리켜 보이는

그 자기 본마음, 그걸 확인하라고

어쩔 수 없이 말로 표현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말로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해요.

구구절절 설명하면 친절해서 우리가 좀 더 접근하기 쉽지만

그걸 생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기 쉬워서 좀 오염의 소지가 있고

또 여법한 한마디로 해버리면 딱, 해버리면 깔끔하긴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이죠.

 

그래서 경전이라는 것을 통해서

언어, 말을 통해서 이 반야지혜를 어쩔 수 없이 글로 쓴 거예요.

그걸 보고 [방편반야]라고 부릅니다.

 

방편반야를 통해서 우리가 관조반야를 실천하고

결국 실상반야를 증득하는 것이죠.

 

이거를 뭐 이를테면 화엄경의 불교를 공부하는 방법

화엄경에서 말하는 마음을 깨닫는 방법

일체유심조 할 때 그 마음

마음에서 모든 게 이루어졌다, 이 소리거든요

그 마음이 뭐냐?

한마음, 일심, 얘기한단 말이에요.

 

화엄경에서 그 일심을 깨닫는 방법 그것을 [신해행증]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첫째는 [] 믿는다

뭘 믿겠어요? 불법승 삼보를 믿는다

뭐가 불법승 3보에요?

, 내가 본래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셨는데

난 아직 그것까지 모르겠다.

내가 부처다라는 게 뭐에요?

내가 바로 실상이다, 지금 이대로가 실상이다, 이 소리잖아요.

그러나 나는 아직은 모르겠다.

 

그리고 그대로 법이 드러나 있다고 하는데

법은 100% 드러나 있다라고 하는데

난 아직 모르겠다, 나는 분별밖에 모르겠다.

 

다양한 방법으로 법이 드러나 있지만

진짜 법은 자기에게 있단 말이에요.

 

, 승복 입은 사람만 승이 아니에요.

승가를 승리라고 하잖아요, 승가.

승가는 뭐를 승가라고 해요?

사부대중을 승가라고 해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남자 신도, 여자 신도를 합쳐서 다 승가라고 해요.

거룩한 스님들께 귀합니다.

거룩한 승가의 귀합니다.

그게 거룩한 자기가 자기 안에 누구나 괴로움을 해결하고 싶은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라고 하는 발심이 누구에게나 있단 말이에요.

 

그걸 청정한 승가라고, 자기 안에 있는 스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난 반드시 깨달아 보겠다, 괴로움을 해결하고 가야 되겠다 하는 이 마음

그게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스님이에요

 

내가 바로 진실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부처님 말씀이니까 내가 한번 믿고 공부를 한번 시작해보자

믿음의 시작이란 말이죠.

 

그러고 나서는 해- - 증의 단계

[()] 첫째 경전 방편반야를 통해서

방편반야라는 경전과 어록과 스님들의 법문을 통해서

이 방편의 법문을 통해서 이해한단 말이에요. 이해.

그게 신해행증할 때 해가 먼저 이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이 이해는 머리로 이해하는 이해와는 달라요.

이게 정확한 비유는 되지 못하지만, 이해를 위해서 잠깐 비유를 들어보면

수학 문제 풀 때 공식을 암기해서 문제 나오면 공식에 대입해서 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공식이 어떻게 나온지를 그냥 훤히 아는, 그 근원까지 이해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딱 거기 맞진 않지만.

 

이게 우리가 처음 법문을 들으면

처음에 머리로 어느 정도 이해를 하다가

머리로 이해했을 때는 스스로가 자꾸 의심이 들어요.

그리고 머리로만 알고 있단 말이에요.

머리로 알고 있으니까 힘이 없어요.

 

근데 머리로만 알다가 가슴으로 소화가 확 되버리는 때가 있단 말이에요.

문득 어느 순간 이게 머리로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마른지혜가 아니라, 건혜지가 아니라

그냥 가슴으로 확 소화가 돼 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랬어요.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이 짧은 여정이 나는 30년을 보냈다.’

이런 식의 말씀하셨단 말이죠.

 

그래서 이게 [해오]라고 하는 표현을 선에서도 쓰기도 하죠, 해오.

그러니까 어떤 언뜻 돌아보면 이해하는 깨달음?

머리도 이해한 게 뭔 깨달음이야? 이렇게 얘기하기 쉬운데

이건 머리로 이해한 게 아니에요.

머리로 이해됐던 것이 가슴을 확 소화가 돼 버린 거예요.

그래서 해오라는 표현을 쓴단 말이죠.

 

근데 해오가 끝이 아니에요

이거는 오도 아니에요, 사실은.

깨달음이라고도 이름할 수 없습니다.

가슴으로 소화를 딱 된 체험, 그래서

아 내가 누구이구나

자성이 뭐구나

한번 확인한 체험, 감을 잡은 체험, 그걸 해오라고 하는데

그게 공부의 시작이에요, 이제 입문한.

내 공부 많이 했다이게 아니에요,

이제 입문, 공부할 수 있는 자세가 된 거죠.

 

그러고 나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신해행증의 행이 필요합니다, .

[]이 뭐냐면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그때부터 수행, 점오가 필요한 거예요.

점수, 돈오점수 이러잖아요.

돈오를 해오라고 한다면 그 이후에 점수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이 지눌스님께서 하신 말씀이세요.

 

그럼, 그 점수가 뭐냐?

바로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반야를 통해 저절로 보게 돼요.

이게 한번 자성을 확인하고 나면

여러분 생짜로 앉아서 관해라, 관해라하면 관이 되겠습니까?

 

모르겠어요, 안 되더라고요 저는, 아무리 해도.

여러분 거울처럼 비추세요하면 되어집니까? 거울처럼.

자꾸 습관이 분별하게 되는데

안 된다니까요.

 

먼저 한번 해오를 통해서 한번 확인하고 나야

그다음에 힘이 있단 말이에요.

어떤 힘?

관조반야를 통찰하는 힘이, 통찰지가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관조반야를 통해서 저절로 위빠사나가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게 관조반야고 행하는 거죠.

 

그런 다음에 결국 증하는 겁니다.

신해행증할 때 []

그게 바로 실상반야를 증득한 거예요, 실상반야를.

이런 방법으로써 이야기할 수도 아마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런 어떤 방편반야 또 관조반야, 실상반야라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또 우리가 반야를 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