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반갑습니다.
지난 번에 반야에 대한 설명을 좀 했었습니다.
오늘 좀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면서 번역할 때
지혜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반야라는 말로 번역한 이유가 있겠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지혜와 이 반야라는 지혜는 좀 다른 거니까
그렇게 아마 했을 거예요.
우리가 꿈을 꾸잖아요.
꿈의 세계 속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꿈속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있겠죠.
착한 사람도 있고, 좀 악한 사람도 있고, 또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도 있겠죠.
꿈속에도 보면 아주 지혜로운 환자들도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꿈 속에서 막 꿈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가 지혜를 많이 닦고 하면 꿈의 세계를 더 잘 살 수 있겠죠.
꿈의 세계에서 지식이 늘어나면
꿈의 세계 속에서 내가 더 좋은 직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지혜로우면 자식을 더 지혜롭게 잘 키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다양한 어떤 그 꿈의 세계 속에서 지식과 지혜를 늘려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삶이 풍요로워지고 더 삶이 지혜로워지겠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겠죠, 그죠.
이걸 지식이나 지혜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지금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 세간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식을 키울 때 보통 지혜가 없으면 지식만 있으면
지식은 있지만 지혜가 없으면
자기는 자식을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식을 좀 폭력적으로 괴롭힌 것일 수도 있겠죠.
자식에게 공부를 시키면서
‘공부 잘하는 게 너에게는 가장 중요한 거야
내가 나를 위해서 공부시키니? 너를 위해 공부시키지.
공부 잘하면 내가 좋니? 너가 좋지.’
그 맞는 말이죠.
근데 그것이 항상 과해지면 그게 오히려 지혜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처럼 내가 조금 더 지혜로우면
어떤 삶을 사는데 있어서 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지혜라고 합니다.
그럼 반야는 뭐냐? 반야지혜는 뭐냐?
이거는 꿈속 세계 속에서 지혜로운 꿈을 꾸는 것이 아니고
꿈을 깨는 지혜입니다.
우리도 지금 다 꿈을 꾸고 있어요, 지금.
자기 의식의 꿈을 꾸고 있어요, 식.
교리적으로 말하면
눈, 귀, 코, 혀, 몸, 뜻+ 색, 성, 향, 미, 촉, 법을 접촉하자마자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6가지 의식이 일어나잖아요.
우리가 ‘나는 세상을 알아’라는 것은 의식이 하는 거예요.
눈으로 봐서 아는 것
귀로 분별해서 귀로 듣고 아는 것
그런데 그 앎은 진실하지 않아요.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했듯이
그러데 우리는
보는 나도 실제하고, 보이는 것도 실재하고, 봐서 아는 이 의식도 실재한다.
이렇게 우리는 착각하면서 그걸 진짜라고 여기며 살아왔단 말이죠.
그게 꿈인 줄 모르고.
‘어, 저는 진짜 아는데요?
제가 다니는 직장은 대기업이고, 월급도 많이 주고, 좋은 직장이고 이걸 제가 알아요.
제 남편은 참 훌륭한 남편이고, 아니면 좀 마음에 안든 남편이고
세상은 이렇게 돼야 되는데 저렇게 잘못되고 있고,’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해요.
왜 그러냐면 자기가 아는 그 세계 속에 자기 혼자 사로잡혀서
그 의식 속에 빠져서 그 의식이 펼쳐 놓은 가상현실
의식이 펼쳐 놓은 가상현실이에요, 이게.
이게 메타버스예요
생생한 메타버스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게 메타버스인데
자기랑 비슷한 거를 자꾸 구현해 내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나는 평생 살아도 내 남편을 진짜로 알 수 없다, 경험하지 못한다.
진짜 남편은 못 본다, 이거죠.
진짜 자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잘 보기 쉽지 않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진짜로 알 수 없어요.
그런에 우리는 안다고 생각해.
‘난 내 남편 아는데’
내 남편의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내가 그렇게 본 거잖아요.
뭐 어떤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어떤 보살님이 집에만 있다가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직장을 가야 하겠다 해서
애들 막 키우고 막 힘들게 지내다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직장을 딱 나갔는데 집에서 맨날 남편이 회사 갔다 오면 잔소리하고 밥 달라고 맨날 이런 반찬밖에 없냐고 바가지를 긁으신대요.
근데 직장을 딱 나갔는데 아침에 회사를 탁 나갔는데
직장 상사가 장사 중에 누가 한 명이
막 미리 청소도 해놓고, 회사.
커피도 한잔 맛있게 타 놓고
내가 탄 커피라고 맛있다고 하면서 한잔 먹어보라고 갖다 주고
뭐 이렇게 되게 따뜻하게 해준대요.
그리고 오늘 입은 옷도 예쁘네요 하고
머리를 바꿨는데 남편은 전혀 모르는데 그 사람이 알더래요
‘머리 다시 하셨네요’ 이렇게 알더라는 거예요.
태어나서 그렇게 챙겨주던 직장상사가 있는데 집에 갔더니
배는 불뚝 나와서 세수도 않고, 꾸역꾸역 돼지처럼 소리를 내면서 막 쩝쩝 소리를 내면서
그래서 이 남편은 매력도 없고
옛날에 내가 콩깍지에 꼈지.
매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내가 봤을 때 정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옛날에 장점이라고 느꼈던 게 지금 보니까 다 단점인데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면서
‘이 사람 말이지 마음에 안 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직장 가서 그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내 관념 속에서, 내 분별 속에서 그렇게 인식을 했단 말이에요.
근데 그걸 진실이라고 할 수 있냔 말이죠.
진짜 내가 진짜 본 게 맞는지 확인할 수 있냔 말이죠.
내가 그렇게 본 거죠.
내가 이런 남편을 그렇게 바라본 거죠.
어쩌면 이럴 수도 있죠.
이 남편이 나에게는 이렇게 하는데
직장 가면 그렇게 둘도 없이 따뜻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능력도 있고, 성격 좋고, 직장에 있는 여사원들은
‘우리 과장님, 우리 부장님 진짜 멋있다.
저런 사람과 같이 사는 아내분은 얼마나 행복하실까?’ 이럴 수도 있겠죠, 예를 들면.
그런데 남편이
사람은 상대적이거든요, 연기적이거든요, 항상.
직장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한테 크게 뭐 잘못하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잘했을 수도 있고.
또 보살님께서는 내가 하는 대로 내가 반응하겠죠.
소리를 뻑 지르면 나도 같이 뻑 지를 것이고
돈을 갖다 벌어 주는데도 불구하고 부족하다고 바가지를 긁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또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즉 이런 하나 비유인데요.
이것처럼 사실은 사람들이
내 인식 속에서 남편을 내가 만든 가상현실이라는 분별 의식
이 메타버스를 가지고 내 남편을 내가 재창조하고 있어요.
내가 재창조한 그 남편, 그게 진짜 남편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 남편은 내가 만든 남편이에요.
왜?
어떻게? 나의 경험 속에서.
나와 그 사람과의 인연이라는 관계 속에서.
이런 남편은 나에게만 있어요, 이 우주에.
내가 창조했으니까.
남편이 마음에 들든 마음에 안 들든
이 사람은 내가 만들어서 나에게만 있단 말이에요.
실제 이 마음공부를 하고 정말 공부를 익어가면서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그런 얘기들 하세요.
처음에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절에 가서 뭐 공부한다 그러고, 기도한다 그러고 뭐 이러길래
‘그 절에 가서 뭐 하냐? 맨날 절에 가서 돈만 쓰고.’ 이랬다는 거.죠
근데 어느 날부턴가 보니까 공부를 선도 한다 그러고, 마음공부 한다 그러고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사람이 달라졌다.
그런데 30년 전에 너무 설레서
이 남자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때는 막 좋아 죽을 것 같았는데
30년 살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놈하고 이혼을 할까?’
너무 괴로웠다는 거예요, 너무 미웠다는 거예요, 하나하나가 너무 미웠다는 거예요.
근데 30년 만에, 30년 전에 내 남자를 되찾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도 봤어요.
‘어떻게 하길래 그러세요?’ 했더니
‘이 사람이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막 마음공부에 꽂혀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안 믿었대요.
저렇게 해봐야 뭐 달라질게 있겠나 하나도 안 달라지겠지.’
그렇게 느꼈다는 거죠.
그런데 뭔가 공부가 이렇게 익어가는데
정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확 바뀌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보던 내 관념이 또 확 달라질 수 있겠죠, 그죠?
이 의외로 부부들 중에 보면요
그 인생의 특정한 어떤 하나의 사건
예를 들면 부부간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내가 기분 나빠도 이 말을 하면 안 되는 그런 말들이 있을 거 아니겠어요.
자식에게도 마찬가지고.
그 말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그건 정말 내 업을 동하게 만들고 나를 막 상처 엄청난 상처를 주는 그런 말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 말 하면 안 되는데 너무 화난 나머지 자기는 술 취한 김에 화난 나머지 그 말을 했다
그 남편은 술이 취해서 그 말 한 줄도 몰랐단 말이에요.
근데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마음이 확 떠나는 게 한순간이에요.
한마디 말 때문에 마음이 확 떠나 버려요.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그 사람의 행동 하나 때문에 확 뒤바뀌게 돼요.
안 좋은 이미지로 확 바뀌기도 해요.
어쩌면 그것을 본 내가 오해한 걸 수도 있는데
그 전체를 못 보고, 그 행동 하나를 보고
‘아 저 사람 나쁜 놈이었네’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어요.
직장도 마찬가지죠.
제가 군에 있을 때요
군에 보면 진급 심사 같은 거 하는 인사 증명 분들이 계세요
그분들과 대화 나눠 보면요, 정말 그렇구나 싶어요.
사람이 사람을 잘 볼 수 있을까요?
‘이 사람 어떤 사람이야? 진급할 만한 사람이야? 시키면 안 될 사람이야?’
그걸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시켜야 될 사람이고 시키지 말아야 될 사람일까요?
‘저 사람 괜찮아’ 하면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걸까요?
괜찮은 사람인데, 그래서 나는 100% 확신을 가지고 소개시켜 줬는데
이 직장에서는 이 사람이 잘하는 거라는 능력을 발휘하는데
저 직장에 가서는 영 능력 발휘 못 할 수도 있겠죠.
그 사람을 정말 잘 본다라는 게.
여러분 우리 정치 같은 데서도 무슨 장관 이렇게 검증하잖아요.
검증할 때 보면
도대체 어떤 게 진짜 검증일까?
어디까지가 진짜 괜찮은 거고, 어디까지 괜찮지 않은 사람일까가
본인도 혼란스러울 때가 있지 않나요?
왜 그럴까요, 그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사실은 자기도 자기를 모르잖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진짜 착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남들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에 나의 착하지 않은 부분을 나는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 나는 착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못한 사람일까요?
겉으로는 나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았어요.
착한 사람 컴플렉스가 있어서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살았어요.
근데 속마음은 항상 폭발할 것 같아요.
는 더 이상 못할 것 같아요.
근데 내 업습 때문에 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왜? 착한 사람으로 남지 않으면 남들에게 욕먹을까 봐.
남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배신당할까 봐. 내가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착한 이 정체성을 쥐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은 진짜 착한 사람이냔 말이에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별지에 불과해요, 분별지.
근데 우리는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더 잘 알기 위해서 공부하고 살잖아요.
그걸 불교 교리적 용어로는 식의 증장이라고 그래요.
경험이 많으면 공부가 많고 삶의 경험이 많으면
의식, 식이 증장해요.
즉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서 뭐가 더 좋은지, 뭐가 더 잘났는지를 볼 수 있는 안목은 커져요.
근데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진급 선발위원 사람들은 내가 확실히 잘 선발했다고 믿어요.
근데 그게 진짜 알 수 있나요?
나중에 가서 그 사람이 사고 치면 결과적으로 선배 잘못한 거예요.
사고 안 치면 잘한 거고.
제가 군에 있을 때, 저도 그 어떤 심성 또 성품 뭐 이런 거 관련해서
종교인들이 종교 성직자, 군종장교라고 하는 성직자분들이
그 여러 가지 보는 파트가 있는데
그분들이 어떤 진급이라든지 뭐 장기라든지 이런 거 할 때
우리가 가서 면접을 또 보거든요.
제가 그 면접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처음에는 그랬어요.
되게 좀 딜레마 같은 거였어요.
면접은 한 서너 명 딱 들어오잖아요.
그럼 딱 몇 분이 정해져 있어요.
내가 그 사람을 10년을 같이 보고 옆에서 본 사람도 내가 그 사람 어떤지 모르는 판인데
5분 만에 그 사람을 점수로 평가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 사람의 성품을 특히나, 지식도 아니고 말주변도 아니고
성품을 성격을 어떻게 5분 만에 판단합니까?
이 사람이 사고 칠 사람인지 아닌지를?
누구나 다 자기를 좋게 드러내 보려고 그 자리에선 다하지 않겠어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거예요.
그런데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냥 하면 돼요, 그냥. 어찌 보면
왜 그럴까요?
‘내가 100% 진실을 결정해야 돼’
우린 100% 진실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해야 돼요
내가 완전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분별해서 완전할 수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것과 같아요.
부처님은 분별해서 완벽할까요?
부처님도 분별해서 만족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이런 비유를 많이 들었는데, 제가 어떤 저를 그 리모델링을 할 때
이게 큰 어떤 그 공찰인데
여기를 리모델링을 해야 되는데
돈이 몇십억 들어가는 리모델링인데
이걸 제가 특히나 법당같이 중요한 곳은
디자인 하나 어떻게 할지,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지, 부처님 장엄을 어떻게 할지
옆에 저런 색깔은 어떤 걸로 할지
하나하나를 전부 다 제가 결정을 해야 되는 거예요.
왜? 제가 그 자리 있으니까.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제가 인테리어 전문가도 아니고, 그 안목 있는 사람도 아닌데
이거 하나 잘못하면 그냥 그 돈을 그냥 허투루 쓴 게 돼 버리는데
내가 어떻게 하지?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 생각을 해봤더니
부처님 어떻게 했을까요?
여러분 a라는 도안이 있고 b라는 도안이 있는데
신도님들한테 물어보니까 반반이에요.
부처님께 여쭤보면 부처님은 a 아니면 b를 선택하실 거 아니에요?
근데 부처님이 a를 선택하셨다.
그럼 b를 지지했던 신도님들은 반발하실 거 아니에요, 예를 들면.
부처님도 분별해서 완벽할 수 없단 말이에요.
부처님이 정치를 하신다면 어떤 정책을 내놓지 않으시겠어요?
정책을 내놓는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어떤 사람 마음에는 들고 어떤 사람 마음에 안 들 거예요, 반드시.
그러니까 정치라는 일을 하는 분들은 필연적으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혜롭다면
‘내가 아는 생각이 100% 이건 분별지일 뿐이야
완전한 지혜가 아니야 반야지혜가 아니야’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지혜죠.
그러면 정치인들을 욕을 할 수는 있겠죠.
반박하고 비판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죽도록 욕하지는 않겠죠.
그리고 극단적으로 막 미워하지는 않겠죠.
왜?
아 저 뜻을 따르는 사람도 있고, 또 내 생각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구나.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거죠.
그 사람이 완전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또한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인정하고.
이 코로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백신을 맞은 게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알 수 없죠.
지금 인류 역사가 그렇잖아요.
옛날에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에서 보니까 아주 잘못된 거여서
다 전면 뒤바꾸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옛날 우리는 뭐, 소시지 먹으면 영양가 있는 걸 먹는 거라고 생각했잖아요.
김치나 뭐 된장찌개 이런 거 먹으면 별로라고 생각하고
맨날 잡곡밥 보리밥 먹으면 영양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소세지는 이건 가공식품이라 정크푸드라 부르잖아요.
근데 오히려 잡곡밥에다가 된장찌개는 진짜 영양식이에요.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보니까 사람들이 늘 햄버거를 먹고 살아요.
물론 제가 그때 당시 어릴 때라 돈이 없어서 먹을 게 햄버거 밖에 없어 그런지 몰라도
영양 있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좀 먹고 싶어도
영양있는 식당이 안 보여.요
그냥 햄버거 아니면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무슨 빵이나 이런 것들.
그러다가 어쩌다 너무 그리워서 한국 음식점에 갔더니
모든 음식이 전부 다 영양식인 거예요.
옛날에는 제가 그런 자살 예방 교육 갔을 때, 이 얘기 몇 번 했는데
전 세계 최고가는 자살 예방 자살 예방 전문가 분께
외국 유학하고 오신 분께 교육을 받았어요.
그분이 막 거품을 토하면서
자살예방교육은 안 하고 내 그 얘기만 할 수 있으면서 거품을 토하면서 했던 얘기가 뭐였냐면
지금도 모든 어지간한 병원에서는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항우울제를 처방한다.
그런데 최근에 몇 년 사이에 논문들이, 서양의 유수한 병원과 박사들의 논문들이
항우울제 먹고 자살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우울증 걸려 자살하는지 하는 것보다 항우울제 먹고 자살하는 게 더 많다.
항우울증 오히려 사람을 더 자살하게 만든다.
그런 발표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수천 개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었으니까요.
엄청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당신도 옛날에는 우울증 걸리면 항우울증 먹어라 이렇게 얘기를 해줬다는 거예요.
근데 지금은 그게 큰일 날 일이라는 게 밝혀지고 증명이 되다 보니까
그렇게 해선 안 되는데
아직 연구 초기다 보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준다는 거예요.
왜?
매뉴얼에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렇게 준다는 거죠.
그러면 안 된단 얘기를 막 거품을 물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뭐 그 부분에 대해서 좀 검증이 돼서
조금 뭐 그런 성분이 없애는 뭐 다른 걸 좀 만들고 막 이랬다는 얘기를 언제 듣긴 했는데
그냥 그 당시 그랬다고 들었어요.
그럼 보세요.
우리는 안 죽으려고 항우울제 먹었는데
그거 먹고 더 업 되어서 용기가 생겨서 자살을 성취도 하고 이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는 거죠.
그럼 그때는 옳았는데, 옳았던 게 아니었던 거잖아요.
근데 옳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지.
의학 같은 데서도 옛날에는 이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틀렸었구나’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과학도 계속 바뀌죠.
뭐가 옳은지 그런지를 알 수 없어요.
그리고 학문도 그런 자세로 공부해야죠.
편견을 가지고 ‘내가 하는 학문이 이건 절대적으로 옳아’라고 하면
더 이상 공부 진도가 안 나갑니다.
‘모를 뿐’ 하는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내가 오류일 수도 있다라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되는게 맞잖아요.
일반 학문에서도.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내가 맞다.
나는 옳을 수 있다.
어떤 특정한 견해에 대해서 나는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게 지식에 대한 오만입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하다못해 여러분이 집에 갈 때 맨날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지하철이 더 좋은지 버스가 더 좋은지
아님, 지하철에도 빠른지 버스가 더 빠른지 알 수 있습니까?
인연은 알 수가 없어요.
이게 더 좋은 줄 알았는데 그날 거기서 사고 날 수도 있어요.
이게 더 빠른 줄 알았는데 그날따라 이게 막힐 수도 있어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자식을 잘 키운다고 여기지만
이게 오히려 못 키우는 걸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명상 센터, 이 종교가 너무나도 위대하다고 믿었지만
그게 내 인생을 망쳤을 수도 있죠.
그런 경우들도 있잖아요.
이게 어디서 올까요? 이게 다.
이런 사람이 여야의 갈등 무슨 다양한 갈등들이 어디서 오겠어요?
견해의 차이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병에 걸렸다
그럼, 다들 괴로운 줄 알아요
내가 운이 없어서 복이 없어서 전생에 업이 많아서 나는 병에 걸렸어요.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분께서 아드님이 전신마비가 됐어요.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그때 ‘아 내가 뭔가 잘못이 있나 보지, 죄업이 많은가 보지’ 해서
참회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평생토록 죄의식에 시달려서 ‘참회만 하겠다’ 이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불교에서는 삼칠일 기도, 뭐 7일 기도 3일 기도 해서
참회 기도를 ‘처음 기도 시작할 때 참회부터 해라’ 이러지만
‘참회 기도는 딱 짤막하게 한순간 하고 딱 끝내라’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왜 그러겠어요?
그분은 어떤 생각을 하냐면 이것이 다 내 잘못인 것 같다는 거예요.
내가 뭔가 죄업이 많아서 이렇겠지.
내가 뭔가 업장이 많아서 그렇겠지.
내가 교만해서 이렇게 했지.
옛날에 잘못했던 거 하나하나 다 생각하고 되짚어 가면서
계속 계속해서 참회만 하고 있다.
그러면 되겠냐 말이죠.
그것이 정말 내가 죄업이 많아서 우리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까요?
부처님 경전에는 죄업이 벌어지는 이유
괴로움이 벌어지는 이유를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있어요.
7~8가지를 설명하고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인과예요.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나쁜 결과 받는다, 그거예요.
근데 그게 꼭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만 일어나지는 않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은 걸 수도 있단 말이에요.
우린 자기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과의 범주만 생각으로 파악해요.
내가 ‘몸이 아파’ 이러면
‘아, 내가 업장에 지중해서 내가 몸이 아픈 거지’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자식이 뭔가 잘못됐으면 ‘내 업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근데 내가 몸이 아팠어요.
그전에는 먹는 거 맨날 안 좋은 음식 먹고, 술 담배 찌들어 살고, 운동도 안 하고 우리를 사시다가
몸에 병이 나서 그때부터 병 치료 힘들게 했지만
그때부터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오래 살 수도 있어요.
너무 힘든 일이 겹쳐서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서
너무 괴로워 죽을 것 같았는데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 때문에 내가 마음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탈할 수도 있어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단 말이죠.
역행보살이라고 하죠.
그 역행보살이 없었다면 나는 이 마음공부를 못 할 수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최고의 은인이었던 거죠, 귀인이었던 거죠.
그럼,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이 내 인생의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인생 망쳤어’라고 할 수 있겠냔 말이죠.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중중무진 연기라고 해서 무수히 연결된 연기 속에서
정말 옳거나 그른 것이 있을까요?
옳거나 그런 것, 선과 악, 맞고 틀림 그런 것은 본래 없습니다.
그냥 인연따라 생기고 사라지고 그뿐이에요
이 소리가요 딱딱딱 이렇게 나요.
근데 이 소리는 인연을 이렇게 화합시켜 주니까 소리가 과로써 일어나잖아요.
끝이에요.
전부예요.
의미 있습니까? 여기?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는 자기에게서 나오죠.
자기가 이걸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윗집에서 쿵쿵쿵 소리가 계속 나면
막 분노하면서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저한테도 그래요.
법회 하면서 자꾸 이렇게 툭툭 때리니까, 죽비를 자꾸 치고 하니까
‘스님 법문할 때 죽기 좀 치지 말아주세요
법문 틀어놓고 자는데 자다 말고 팍팍 깹니다’
그럼,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해석은 자기에게 나왔죠.
또 어떤 분들은 그러죠.
‘스님 생활 법문은 좀 줄여주시고, 이 직지인심 하나만 이 법문을 많이 해주세요’
그때 제가 막 그냥 찌릿찌릿하면서 막 그냥 집중이 막 됩니다.
실제 여기에는 딱딱딱 의미가 없죠.
인연생, 인연멸로 끝났죠.
아무 의미 없어요.
인연따라 생겨났다 인연 따라 사라진 것은 이것과 똑같아요.
그냥 이럴 뿐이에요.
이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선의의 악이에요?
이게 여러분을 괴롭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깨닫게 합니까?
이건 그냥 아무 뜻이 없어요.
인연따라 생기고 사라지고 그뿐이에요.
그래서 연생무생_ 인연따라 생겨난 것은 본래 생겨난 바가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공성이에요, 공성
본래 텅 비어서 일어났지만 일어난 바가 없다.
그게 바로 무생심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견성은 자기 성품을 확인한다
성품이라는 건 바로 무생심이다 이래요
생겨났지만 생겨난 바가 없단 말이에요.
딱, 이게 생겨났는데 생겨난 바가 없어요.
그런데 이것을 어떤 사람은
‘그 스님 설법하면서 그쯤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하고 화낼 수도 있죠, 예를 든다면
이거니까 비유가 좀 덜 가겠지만
야, 이 말이었다 말이죠, 욕설이었다 쳐보자 이 말이죠.
‘야’ 이건 그냥 ‘야’ 그거예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근데 누군가가 나에게 ‘야’ 했는데
내 마음속에서
‘나이도 어린게 조그만 게 나를 야라고 반말을 해’ 하고 막 분노할 수도 있겠죠.
그게 막 오랫동안 막 화가 나서 복수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겠죠.
이 의미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니까요.
분별에서 나옵니다.
이거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돈은 의미가 없습니다.
부자 가난이라는 건 자기 분별에서 나와요.
실제 내가 재산이 뭐 1억이다 해서 그게 부자인 것도 아니고
가난인 것도 아니에요.
자기가 부자라고 의미부여하고, 가난이라고 의미부여를 하면서
부자와 가난이 창조되는 거예요, 자기의식 속에서.
그게 바로 분별지란 말이에요, 분별지
그러고서는 그렇게 가난을 창조해 놓고
‘나는 가난해서 괴로워 죽겠어, 나는 비참해’
‘자식에게 해주고 싶은데 해주지 못해서 비참해’
이거는 진짜 잘못된 착각이더라고요.
나중에 저희 부모님이 저한테 어릴 때
‘남들은 다 해주는데 우리는 못 해주는 게 많아서 미안했다
그때 되게 비참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깜짝 놀랐어요.
제가 나이 들어서 그 얘기 듣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한 번도.
애들은 없어 없는 줄 알아요, 그냥
그냥 없나 보다 이러고 사는 거예요, 그냥
있으면 있나 보다 이러고 사는 거예요 그냥
그게 뭐 맛있는 음식 있으면 맛있게 먹는 거고 없으면 못 먹는 거고
그냥 그런가 보다 가난하면 그 비참하지 않아요.
원래 우리 집 가난한가 보다 그렇지요 그냥
그럴 수도 있단 우리보다 훨씬 분별이 적으니까.
근데 자기 마음속에서 평생 상처로 남을 수 있잖아요
여러분들도 애기 때 다 세워서 일곱 살 때 애한테 너무 심한 말 한마디 해가지고
아니면 한번 때려 가지고
그게 평생 막 상처가 남아서
애가 한 20살 내가 되고 25살 되고 했는데
같이 술 한잔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가 정말 너한테 미안했다 용서해 줘’
‘뭐가요?’
‘너 7살 때 내가 널 너무 심하게 때려서 너가 막 울고 너무 괴로웠지
나 그게 평생 상처로 남았다. 너무 미안하다’
얘는 기억에도 없어요.
‘그런 적이 있어요?’
기억에도 없는데 본인에게 상처가 됐단 말이죠.
그럴 수도 있단 말이죠.
반대일 수도 있고 당한 사람은 막 평생토록 원한을 줬는데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언제 너를 상처를 줬냐?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데’ 이럴 수도 있단 말이죠
자기 견해가 분별의 지혜이기 때문에, 분별의 지식이기 때문에
그 분별의 지식은 그 상황 속에서만 상대적으로 옳거나 그럴 수가 있을 뿐이에요
절대적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실제화시켜서 진짜라고 느끼고
진짜 옳다고 생각하고
그 분별지를 믿고 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괴로워지는 거예요.
분별지를 쥐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분별해서
이건 좋은 거 저건 싫은 거
들리는 소리를 다 분별해서
이 소리는 좋은 소리 저 소리는 듣기 싫은 소리
사람마다 다르죠.
어떤 소리가 듣기 좋은지 듣기 싫은지가 다 달라요.
전부 다 분별해 가지고 좋거나 싫게 둘로 나눈단 말이에요.
그게 분별심이에요.
그래 놓고는 좋은 거다 하고 느껴지는 것은 집착해서 갖지 못해서 막 괴로워요.
남들은 더 많이 가졌는데 나는 못 가질 때 괴롭다고 느껴요.
싫은 거는 밀쳐내고 싶은데 밀쳐지지 않으니까 괴로워요.
그런데 웃긴 거는
다른 사람은 내가 좋아서 집착하지 못해 안 다닌 걸
그 사람은 버리고 싶어 안달할 수도 있어요.
나는 버리고 싶어 죽겠는데 저 사람은 갖고 싶어 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지금 너무 버리고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나한테 가장 도움이 되는 거였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지금은 너무 싫었는데 ‘그게 정말 좋은 거였구나’일 수도 있단 말이에요.
지금은 미워 죽겠는 사람이 나중에 나의 은인일 수도 있단 말이에요.
모를 뿐이에요, 모를뿐.
그러니까 이 사실을 모르니까 자기 생각 분별을 믿는 거예요.
분별지를 믿는 거예요.
반야 지혜를 믿지 않고.
그러니까 분별지의 특징은
좋고 싫고 둘로 나눠서
취사 간택한단 말이에요.
좋은 건 취하려고 애쓰고, 싫은 건 밀쳐내서 미워하고.
근데 본래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고 해서 취부득 사부득이라고 해요.
취하는 것도 가능하지 못하고 버리는 것도 가능하지 못해요, 우리는 사실은.
이걸 취하거나 버릴 수 있어요?
이거 취해 보세요.
아 이거 버려 보세요.
인연따라 생겨난 모든 것은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식 내 걸로 영원히 취할 수 있을까요? 내 자식으로.
인연따라 생겼기 때문에 인연이 다음에 사라져요.
돈도 인연 따라 생겼기 때문에 인연 다 하면 사라져요
이 육신도 인연따라 생긴 거기 때문에 인연이 다 하면 사라져요
이 육신을 내가 취할 수 있다고요?
내가 돈을 취할 수 있다고요?
명예 권력 지위를 취할 수 있다고요?
취할 수 없습니다.
취부득이고 사부득이에요.
취사 간택하는 마음을 진짜라고 믿고
취하지 못해서 괴롭고 버리지 못해서 괴롭다
그게 우리의 중생의 괴로움이에요
취하려고 막 애쓰는 마음, 그게 탐심이잖아요.
버리고 싶은데 버려지지 않아서 막 미운 사람하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될 때 화가 난단 말이에요
또 취하고 싶은데 취해지지 않을 때도 화가 난단 말이에요.
이게 진심이에요.
본래 취하거나 버릴 수도 없는데 취할 수 있을 줄로 착각하고
버릴 수 있을 줄로 착각해서 취하거나 버리는 삶을
평생 살아가는 삶
그게 치심, 어리석음이에요.
알 수 없는 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숭산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오직 모를 뿐
이게 반야지혜에요.
안다고 여기는 건 분별의 망상이에요.
모를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떡할까요?
분별을 할 건 다 합니다.
그런다고 분별 안 하고 사는 거 아니에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요.
분별함이 없이 분별하고 살아요.
유위 하되 함이 없이 한단 말이죠.
판단하고 분별하고 평가하고 사랑하고 할 거 다 해요.
그러나 그걸 실제라고 믿지 않아요.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아요,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게 꿈인 줄 안단 말이에요.
진실을 비춰보는 지혜가 있단 말이에요, 반야지혜가.
그러니까 판단은 다 하지만 판단에 끌려 들어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마음 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할 거면 다 하는데
해도 해도 해도 안 되는게 있죠.
거기에 대해서는 집착을 버려요.
안 되나 보다 하고 탁 깔끔하게 버린단 말이에요.
버리려고 버리려고 해도 안 버려지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럼 그냥 그 사람을 허용해 줘요.
자식 공부를 시켜도 시켜도 공부를 안 한다, 못한다.
그럼 받아들인단 말이야.
그래도 죽어라고 막 집착하면 나도 괴롭고 그 친구도 괴롭잖아요.
그러니까 받아들여 준단 말이에요.
남편 이것 좀 바꿔라.
술 좀 먹지 마, 먹지 마 해도 평생을 먹는단 말이에요.
그럼 인정해 준다는 거예요.
인정해 줘야지 어떡하겠어요.
인정해 주는 거예요.
즉,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게 되면
내 고정관념 분별심
내 분별이 진짜다라는, 옳다라는 생각이 놓여지기 때문에
그걸 과도하게 쥐지 않기 때문에
내가 뜻하는 바대로 현실이 이루어져야 돼라는 생각이 없어요,
내 뜻대로 다 이루어져야 돼라는 생각이 없어요,
왜 너는 내 뜻대로 안 하니?
내 뜻이 옳은데 왜 너는 내 말을 안 듣니?
그 괴로움이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삶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게 돼요,
취하려고 버리려고 노력은 다 하지만 그게 안 됐을 때 내버려 둬요.
인정한단 말이에요.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단 말이에요.
삶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받아들여 줍니다.
삶이 바로 진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촉목보리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그대로 보리 깨달음이고
제법이 그대로 실상이다.
벌어지는 이대로가 완전한 연기 실상으로서
삶이 완벽한 시나리오로서 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탁 드러나고 있단 말이에요.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완벽한 나에게만 딱 하나,
나 하나를 위해서 완벽하게 짜여진 이 우주적 시나리오가 연기적 시나리오가
내 눈앞에 딱 드러났단 말이에요.
뭘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지혜와 자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무한한 사랑이 뭐예요?
불이법이 무한한 사랑이에요.
둘로 나누고 이건 좋고 저건 싫고는 진짜 사랑이 아니에요.
불의에 완전 평등한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
그게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는 거예요.
지혜를 체험하는 것이 바로 사랑을 체험하는 거예요.
그러면 분별하지 않고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돼요.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누구를 과도하게 미워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아요.
삶을 그냥 힘을 빼고 허용하게 돼요.
힘을 빼게 되죠.
이완하게 되죠.
반드시 ‘이래야 돼’ 하는 긴장이 없어요.
되도 좋고 안됨 말고.
그러나 난 최선을 다해요.
과도한 집착이 없을 때 순수한 열정이 피어나요.
훨씬 더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어요.
무기력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반야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
과도한 집착과 욕망과 탐진치 삼독이 없어요.
그러면서 삶이 가벼워지기 시작하고
과도한 고집이 없어지고
삶을 온전히 허용하고 받아들이니까
이대로가 완전히 만족스러운 거예요.
더 이상 구하고 추구할게 없어요.
이 자리에는 이제 멈춰 서게 돼요
비로소 ‘아 이 자리가 완전히 본래 구족한 자리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단 말이죠.
이게 반야지혜에요.
그래서 반야지혜는 분별의 지혜가 아니다, 무분별지다
하는 말씀을 오늘 좀 드리면서
오늘 반야에 대한 설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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