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반야심경에 대한 간략한 말씀 좀 드렸고요
반야심경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오늘부터 하나나 말씀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 강의를 통해서
‘반야심경 공부를 한번 떼어야지’ 내지는
‘반야심경을 확실하게 이해를 해야지’
그런 생각을 굳이 가지시는 것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걸 통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의 참뜻이 뭔지
그리고 이 선에서 얘기하는 자기의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또 이 진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걸까? ’
그리고 내가 도대체 진리라는 말이 거창한 말이 아니라
‘내 괴로움이 없는, 괴로움이 나오기 그 전, 괴로움이 본래 없었던
그 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거다 보니까
이걸 통해서 자신의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더 소멸시킬 수 있을까?’
내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반야심경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 내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괴로움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괴로움이 자꾸 가벼워지고 있다.’
법문을 듣고 보니까
지금까지 나는 내 인생이 정말 힘들고 고되고 그런 곳인 줄 알았고
그런 인생에서 막 경쟁하듯 싸우듯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인생을 지금까지는 살아왔는데
본문을 듣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구나 해서 문득 좀 쉬게 된다는 얘기를 하세요.
그냥 한번 쉰단 말이에요.
“아, 이거 내가 붙잡은 거구나
내가 공연이 붙잡아야만 사는 줄 알고 붙잡았구나”
놔도 아무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놓았을 때 진짜 사는 건지를 몰랐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가 막힌 비유가
개울가 위에 뭐를 잡고 이렇게 딱 떨어지기 직전인데
손을 딱 놔버리면 뚝 떨어지면 얕은 물이란 말이죠.
그래서 딱 놓으면 사는데
이 깊은 물인 줄 알고 내가 떠내려가 죽는 줄 알고
여기 손에 힘은 빠져서 죽을 것 같은데
마음은 내가 이걸 놓으면 죽는다는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놓으면 사는데
놓으면 사는데
우리는 자기 생각 자기 관념
‘내 인생은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하는 자기 생각, 그걸 내려놓지 못해서
평생토록 자기가 끊임없이 붙잡고 붙잡고 또 붙잡아왔던
자기가 붙잡아서 문제인 것도 모르는 채 붙잡고 살아왔던
그런 삶을 한번 문득 알아차리고는
바르게 알면 바르게 깨달으면
뭐랄까요 안다는 것이요
가볍게 아는 걸 그냥 머리로만 한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진짜 그랬네’ 하고 그냥 가슴에서 수긍이 올 정도로 그냥
‘확실하네’ 하고 온전하게 수긍이 오게 아는 거
그게 깨닫는다, 이런 표현을 쓰는 거예요.
‘깨닫는다’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이걸 확실히 깨달아야 된다는 소리가
이렇게 머리로만 알면 안 되고
가슴으로 이렇게 쑥 내려와야 된다.
그래서 이 공부가 어찌 보면
머리에서 가슴으로 오는 이 짧은 거리의 여행이다.
이런 식의 표현을 쓰는 이유도 거기 있단 말이죠.
아는 것이 확실하게 그냥 삶으로 확인해야 된단 말이죠.
그랬을 때 저절로 내려놔진단 말이에요,
저절로 괴로움이 소멸된다.
이건 억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억지로 안 됩니다.
그냥 내가 확실하게 깨달으면 확실하게 알면 저절로 놓아지는 거죠, 저절로.
억지로 놓으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되는 게 진짜 공부예요.
억지로 막 갈고 닦아서 노력해서 노력의 결과로 어떤 걸 얻었다
그거는 유위 조작으로 만들어 낸 거라서 진짜 힘이 없어요.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노력을 통해 생겨나게 한 것은
반드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억지로 애써서 노력해서 수행해서 그 결과로 얻는 거 공부하는 거 아니에요, 이 공부는.
그래서 수행이 필요 없다라고 하는 방편을 쓰는 이유는 뭐냐면
진짜 필요 없어서 필요 없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수행을 해야 된다.
중도수행을 해야 된다.
반야바라밀 수행을 해야지
유위 조작해서 이걸 열심히 갈고 닦으면 저 결과가 있겠지 하는 그 수행은 아니다
이 소리예요.
반야심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우리에게 참 그 법에 대한 힌트를 지속적으로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직진심을 해주고 있어요.
우선 첫 마디부터가 범상치 않습니다.
반야심경이 보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10글자예요, 제목이.
그래서 이 제목을 먼저 한번 보면요.
처음 나오는게 [마하]예요, 마하.
범어로 마하라는 것을 발음만 그대로 이렇게 따온 거예요.
그래서 마하라는 그 한자어를 딱 보고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무슨 맞자 무슨 하짜지 이거를 아무리 생각해 봐야 그건 그렇게 큰 의미가 없고요.
그 한자의 뜻,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냥 발음만 따온 거니까
한자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고
이 범어의 마하라는 것의 본래의 의미가 뭐냐 그 의미는 뭐냐면
크다, 많다, 또 뛰어나다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단순히 크다, 많다, 뛰어나다 이런 말이었으면
그거는 사실 중국의 한자에 많잖아요.
큰 대자를 써도 되고 뭐 클 때 자를 써도 되고
뭐 다양하게 이렇게 쓸 수 있는 한자가 많았을 거예요.
그러면 그냥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안 하고
그냥 대반야바라밀다심경 이래도 됐을 거잖아요.
의미 있는 단어니까 그걸 쓰면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번역한 사람들 입장에서
‘대’로 번역을 안 했단 말이에요.
‘크다’로 번역을 안 했단 말이에요.
왜 크다고 번역을 안 했는가?
이거에 우리가 좀 기울여야 됩니다.
이렇게 이 범어를 그대로 옮겨온 것들이 대부분
이 뜻은, 이거에 진짜 본뜻은 중국에는 없다, 이 소리에요, 중국에는 없다.
그러니까 이걸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발음만 따온다, 이거거든요.
이게 중국에는 기존에 있는 용어에서는 없다라고 아는 사람이 이걸 번역한 거죠.
아무나 번역을 못하는 거예요.
이 불교 공부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만
이런 어떤 번역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러면 대자와 이 마하가 다른 점이 뭘까라고 했을 때
크다와 이 마하가 다른 점이 뭘까? 한다면, 쉽게 생각하면
크다 하면 크고 작은 것 가운데 큰 거를 얘기하는 거죠.
여러분, 이거 큰가요, 작은가요?
이게 큰가요, 작은가요?
말할 수가 없어요.
이게 큰지 작은지라는 규정을 가지려면, 의미를 가지려면
이거는 크다거나 작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이것을 규정할 수 없죠.
정해진 게 아니에요.
근데 이것을 큰지 작은지를 알려면
딱 하나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 방법밖에 몰라요.
그게 우리 분별의 방식이에요.
우리 머리가 대상을 파악해서 아는 방식.
그게 뭐냐면 비교의 방식입니다.
분별의 방식입니다.
이거 하나만 가지고 이게 크냐 작으냐 물어보면
이게 큰지 작은지 알 수 없어요.
근데 이거보다 더 큰 게 옆에 뭔가가 딱 있다.
그러면 이것보단 이게 작다, 이렇게 얘기해서
이게 작은 의미를 지니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작은 여기 옆으로 오면
얘는 크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돼요.
그럼 얘는 인연따라 크다거나 인연따라 작다고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럼 얘는 큰 겁니까, 작은 겁니까?
얘 자체로는 크다고 말해도 틀리고요.
작다라고 말해도 틀려요.
얘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그게 실상이에요, 진실이에요.
근데 우리는 이런 진실을 보는 거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단 말이죠, 그동안.
내가 키가 큰가 작은가
나는 크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작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적당하다 이렇게 생각하죠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잘 살았을까, 못 살았을까?
거기에 대해서 규정을 해야지만 속이 시원해요.
그런데 그 규정은 옳을 수가 없어요.
이것과 똑같단 말이에요.
이게 크다 작다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단 말이에요.
크다는 거에 집착하면 틀리죠.
작다는 거에 집착해도 틀리죠.
이건 본래 크거나 작지 않으니까.
근데 어느 한쪽에 집착한다면 그건 극단이라고 그래요, 극단.
분별을 하게 되면
분별分別, 나눌 分, 구별할 別
둘로 나누어 가지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서 아는 방식을
분별해서 아는
그래서 분별심이라 그래요.
분별해서 아는 인식.
그 분별해서 아는 인식인 분별심은
허망합니다. 진실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거는 고집할 필요가 없다.
분별해서 안 것은 고집할 수가 없어요.
그건 진짜로 안 게 아니니까. 분별해서 안 거에 불과하니까.
즉, 이 말은 다시 말하면요.
여러분은 나이가 많아요 작아요?
많다고 해도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망상에 집착하는 거예요.
난 나이가 적다고 해도 망상에 집착하는 거예요.
친구와 비교하면서
“저 사람은 부자인데 나는 가난해서 괴로워”
이것을 믿잖아요 우리는, 믿고 살잖아요.
그러니까 친구들과 늘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스트레스 받으며 살잖아요.
근데 상대적 박탈감을 받는 스트레스는 뭐예요?
분별심이에요.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제가 인도 갔을 때 보니까
여러분이 제가 경제력이 어떤지 모르지만
인도에서 다 죽어가는 그런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한국에 최저임금 받는 사람
혹은 최저임금도 못 받고 그 최저임금이 아니라 그 아예 그 기초연금 같은 거 받는 분들
쉽게 말해
인도에서 다 죽어가는 친구들에 비하니까 엄청난 부자인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 가난한 거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면 나는 엄청난 부자일 수도 있죠.
그래서 사실은 부자다 가난하다라는 거
그거는 망상이에요 망상. 분별 망상.
그래서 항상 분별에는 망상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어요.
분별망상, 이렇게 두 가지를 한 단어로 쓴단 말이에요.
근데 분별망상을 빼면 남는 게 있을까요?
여러분 분별망상 빼면 남는 게 있나요?
여러분이 사는 삶에서 분별망상 빼면 뭐가 남을까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나는 괴로워’ 했던게 뭐 때문에 괴롭다 그랬어요?
분별 때문에 괴롭다는 거예요.
“나는 돈이 없어 괴로워”
그 말이 내가 생각하는 기준점
‘누구보다 돈이 없어 괴로워’ 이 소리거든요, 사실은.
근데 그건 허망한 거잖아요, 옳은게 아니잖아요, 분별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지금까지 맞다고 여기 왔던 거예요.
그리고 그 생각에 집착해왔던 거예요.
나는 가난해 가난한 게 확실해 내 인생은 비참해
그 생각을 믿었단 말이에요.
전혀 믿을 필요가 없는 분별심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진짜라고 여기면서.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분별은
나를 규정하는 모든 분별들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를 규정하고 있잖아요.
난 이런 사람, 저런 사람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열심히 사는 이유는 뭐예요?
지금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과 비교해서 그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내가 기준점으로 잡은 그 사람만큼은 내가 부자가 돼야지, 하는 마음 때문에
그 때문에 앞만 보고 쉴 수 없이 달려가는 거 아니겠어요?
쉬면 죽는 줄 알아요.
남들은 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나만 뒤처지니까
쉬는 건 곧 인생에서 뒤쳐지는 거라고 믿으면서 산단 말이죠.
사실은 쉬어야 하는데.
그리고 쉴 때, 내면이 쉴 때, 분별이 쉴 때
무분별지에서 나오는, 무분별심에서 나오는,
분별심이 아닌, 중생심의 분별심이 아닌, 무분별지라고 하는
이 진리의 부처님의 반야 지혜
여기에서 나오는 근원적인 지혜가 드러나는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분별지만 지라고 생각해요.
근데 분별지는 지식이에요, 지식.
분별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분별하지 않는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게 아니에요.
분별은 다 하되 분별에 끌려가지 않는 것 그게 무분별지예요.
분별에 집착하지 않는 것.
“스님, 그런 생각도 없이 어떻게 살아요?
내가 가난하다라는 생각이 있어야 부자 되게 위해서 더 열심히 하지요 ”
그 방식만 알았던 거예요, 우린 지금까지.
가난하다라는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살면
나는 더 가난해질 것 같은 거예요.
분별지만 가지고 살아보니까
분별지의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근데 부처님은 이 무분별지의 세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왜?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분별지를 가지고만
그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분별지가 아닌 것을 가지고는 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이게 뭐죠?
보자마자 컵하고 분별하잖아요, 하얀색 컵하고.
보자마자 바로 하얀색 컵이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는 이걸 분별하지 않고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분별하지 않고 보면 이게 뭘까요?
보통 이렇게 물어보면 사람들은
컵이 안 된다고 하니까
‘하얀 거?’ 이러다가 ‘그거?’ 이러다가
뭐 이런 식으로 했는데
그것도 말이란 말이에요.
언어 개념을 가지고 옛날에 배워왔던 무언가를 가지고 이걸 규정해서 아는 것
분별해서 아는 것
그것만이 익숙해 있어요.
이걸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한단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 보면 뭐예요? 하고 물어보면 콱 막혀요.
분별이 아닌 무분별로 보라는 거거든요.
분별을 해야지만 내가 옛날에, 지금이 아닌 옛날에
배워 익혔던 언어, 개념, 말, 컵이라는 언어
그걸 가지고 지금 이것을 가져와서 얘기를 해야 되니까.
바로 분별이 일어나잖아요.
언어를 일으켰다면 다 분별이에요.
말했다면 다 분별이고.
생각했다면 다 분별이에요.
그러니 우선 반야심경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처음으로
‘야, 그렇다면 분별하지 않는다는 게 뭐지 도대체?’
여기에 대해서 한번 가슴으로 궁금해 보셔야 돼요.
머리로 궁금하면 안 됩니다.
머리도 궁금하면 분별로 알려고 그러니까
무분별지를 어떻게 분별로 알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머리를 쉬고
‘도대체 뭐지?
분별하지 않고 본다? 그게 뭘까?’
거기에 대한 어떤 하나의 화두가 하나 딱 들린단 말이죠.
결국은 나중에 가면 다 같은 화두겠지만.
그런 어떤 기본에서요
이것은 크다거나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비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얘를 보고 크다고 해도 틀리고 작다고 해도 틀려요.
그건 극단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중도적으로 봐야 해요.
중도적으로 보면 이걸 어떻게 볼까요?
크다고 해도 안 되고 작다고 해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크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작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저를 보고
‘스님이다’ 이것도 상이죠 모양이죠.
모양을 가지고 스님이라고 이름 취한 거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그거는 분별이에요, 분별.
근데 제가 분별하지 말라고 했는데
분별하지 말라는 것에 진정한 의미는 뭐냐?
하되 함의 없이 하는 거예요.
이걸 무위법이라 그래요, 무위법.
유위 조작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게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에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질문하는 지점이에요.
분별하지 말라니까 생각하지 말라니까
“스님 생각 없이 어떻게 살아요?”
명상할 때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
“명상은 생각을 없애라고 하는데, 생각이 없으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요?”
다 그 질문이에요.
여기서 생각이 없어야 된다는 말은
항상 바탕에 깔고 있는게 있어요, 불교에서는 항상.
생각을 하지 말라를 때 생각을 진짜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생각을 하되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하지 않고 그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저를 보고 중도적으로 저를 바라보면, 분별하지 않고 보면
스님도 분별인데?
아 스님 키도 크네요, 크네요도 분별인데?
작네요, 작네요도 분별인데?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할까요?
그럴 수가 없어요.
하되 함의 없이 하고 살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럼 똑같아요 현실하고 법이
쉽게 말해 현실에서도
‘스님’이 이런단 말이에요.
‘크다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중도적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해요.
스님 하는 거예요.
크다 이러는 거예요.
똑같아요.
산는 산이고 물은 물이 다 했다가
깨닫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라 했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말이에요.
즉 스님이라고 말할 줄 알고
키 크다고도 말할 줄 알고, 작다고도 말할 줄 알아요.
누가 여러분한테 ‘부자예요? 가난해요?’ 물어보면
대답도 할 줄 알아요.
인연 따라 상황 따라 대답해 줄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잘 살았어요, 못 살았어요?’ 하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고, 못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남편 어때요?’ 하면
‘어때요’ 하고 대답할 수 있단 말이에요.
분별을 다 쓸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진짜라고 믿지 않는단 말이에요.
실체화시키지 않는단 말이에요.
비참해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내가 가난한 거에 대해서.
분별 따라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사니까
그 분별 따라 그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그냥 쓰고 사는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이게 마치 뭐와 같으냐면
그 말을 다 쓰고 사는데
그 말에 무게감이 없어요.
심각성이 떨어져요.
집착하지 않아요, 그 말에.
그 말은 그냥 인연 따라 쓰는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이게 뭐랄까 좀 이렇게 이상적인 삶이랄까요?
삶을 재밌게 살아요.
옛날에는 심각하게 살았는데.
가난한 것도 심각하잖아요.
남들이 나 욕한 것도 심각하잖아요.
자식이 공부 못하는 것도 심각하고
전부 다 하나부터 열까지 심각했는데
전부 다 실체가 아니에요.
진짜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심각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놀이처럼 사는 거예요.
유희삼매라고 해서.
삶을 가지고 논다?
즐거운 일이 있어서 즐거운게 아니에요.
그건 진짜 즐거운게 아니에요.
그건 상황 따라 즐거운게 뭐 진짜 즐겁다 그러겠어요?
그러면 그거는 인연 바뀌면 바로 괴로워질 건데요.
근데 이 무분별지에서 봤을 때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뭐냐면
절에 가면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써 있잖아요
저도 제 책 제목을 <날마다 해피엔딩>이 이렇게 써놨거든요.
그게 날마다 좋은 나라는 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그 문구에 딴 거예요.
왜 절에는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했죠?
우리 인생은 날마다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것 뿐인데.
그게 무분별지로 바라보면
근원에서 본질적으로 보면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소리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여러분 어젯밤 꿈꿨는데
꿈속에 있을 때는 꿈에서 깨기 전에는 좋은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어요.
좋은 꿈은 좋고, 나쁜 꿈은 싫어요.
그런데 꿈에서 깨니까 그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왜 그럴까요?
꿈이니까 실제가 아니니까.
좋은 꿈 나쁜 꿈 상관없단 말이에요, 뭔 꿈을 꾸든.
꿈인데 뭐 심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꿈인 줄 안다면.
가끔 여러분 자각몽 꿀 때 있잖아요.
이 꿈인 줄 알고 끌 때가 있어요.
그때는 꿈속에서 심각한게 나와도 심각해지지가 않아요.
꿈 재밌게 가지고 놀다가 깨면 되지 뭐,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 꿈이 심각해지지가 않아요.
꿈속에서 ‘내 돈 벌어야지’ 하면서 막 심각해지지 않아요.
그냥 꿈이니까 꿈 재미있게
악몽 꾸는 거보단 좀 좋은 꿈도 좋지 않겠나
그렇죠 그냥 재미로 돈 버는 거예요 그냥 열심히 그러나
열심히 재밌게 돈 버는 거예요.
안 벌리면 그만이에요. 꿈이니까.
사실은 이 현실이 그 꿈과 같아요.
그래서 그 꿈에 깨고 사는 걸 보고 ‘깨어났다’ 이렇게 얘기해요. 깨어난다/
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 이 심각하던 현실이 전부 다 꿈처럼
“아, 이게 심각한게 아니었구나”
가벼워진단 말이죠.
그러니까 현실을 되게 가볍게 살아요.
현실을 즐겁게 살아요.
유리산맥 가지고 놀 듯이.
아주 즐겁고 재밌게.
그런데 무게감 심각성 집착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안 할 것 같잖아요?
심각함과 무게감과 집착이 없으면 더 큰 열정이 피어납니다.
막 가슴 뛰는 삶을 살게 돼요, 쉽게 말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집착이 없는데 오히려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그 속에서 직관력, 창의력
이런 것들이 막 마구 샘솟는단 말이에요.
심각하게 하지 않는데도 가볍게 가볍게 하는데도 뭐든지 다 돼요.
저절로 저절로 돼요.
신기하게 절로절로 이루어져요.
그리고 신기하게 내가 하는 게 아닌데
이 우주 법계가 무한히 도와주고 있어요.
사실은 지금 매 순간, 이 우주 법계가
내 노력은 요만큼 했는데 우주 법계가 어마어마하게 도움을 주고 있거든요.
사실은 지금의 실상이.
편의점 가서 500원 주고 물 하나를 사서 먹을 수 있겠죠
그럼 우리는 500원 냈으니까
“나 할 거 다 했어. 내가 돈 내고 내가 사 먹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잖아요, 지금까지.
근데 그 진실이 실제 그랬냔 말이에요.
여러분이 물컵이 물 정수 하는데 돈 냈어요?
물컵 만들고, 컵 디자인하고 그 앞에 있는 이 비닐로 만든 그거 디자인하는데
여러분이 기여했나요?
이 정수기 만드는 기술, 정수기 만드는 기술을 발전해 온 그 눈부신 역사 속에 여러분이 가담했나요?
이게 도매상 소매상을 거쳐 와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값을 했냔 말이죠.
밥 한 끼 먹을 때
제가 인도 같은 데 가서 밥 한 끼 먹을 때
아무 데나 가서 우리나라 돈으로 한 천원 정도 내면
진수성찬의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그럼 1,000원 냈으니까 난 할 거 다 했다?
정말 그런가요?
그게 할 거 다 한 걸까요?
무한한 우주 전체로부터의, 무한한 사람들로부터의
자비로운 연결성의 연기적인 자비로움을 도움받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나는 단지 천원 2,000원, 5천원, 만원 냈을 뿐인데
이 진수성찬의 음식을
전 세계 곳곳에서 온, 온갖 조미료와 식재료들이 다 들어가 있는
그 소, 돼지 여러분 한 끼 주려고 자기 존재를 희생했는데
그 존재 값을 쳐줬냐 말이에요.
그 천원 5천원에 그 생명값까지 들어 있는 거예요?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다 누려 쓰잖아요.
경치 좋은 부산 앞바다 바닷가에 가서, 경치 좋은 카페에 가서
한 5천원 내고 커피 한잔 사 먹는다.
그럼, 그 카페를 내가 산 것도 아닌데
거기 고용한 사람 월급 준 것도 아닌데
단돈 가지고 무엇이든 쓸 수 있단 말이에요.
내가 비행기 회사를 사지 않아도
어디든 전세계 어느 나라든 한 50만 원, 100만 원 주면 갈 수 있어요.
그 비행기 만드는데 여러분이 도움을 줬어요?
하나가 사실은
우리가 물 한 모금 먹는 이 하나가
온 우주 법계 전체가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중중무진의 연기로서
무수한 연결성을 가지고
우리를 무한히 도와주고 있어요.
자비로움으로써 살려주고 있어요.
무한한 자비와 사랑은
완전하게 매 순간 우리는 받고 있어요.
근데 자기가 생각으로 그 무한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비심을 보지 못하고
이 몸만 나라고 생각하면 하니까
몸 안팎을 둘로 나누고
내가 돈 지불했다고 생각하고.
금강경에서 보면
제일바라밀, 이러면서 보시바라밀에 대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보시바라밀,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보시의 완성)
그 왜 갑자기 뜬금없이 상을 깨는 얘기하다가 보시바라밀 얘기를 하지 싶단 말이에요.
이게 보시바라밀을 제일바라밀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보시라는 게 바라밀이란 말이에요.
깨닫게 하는 거란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본래 보시, 본래 자비, 본래 사랑
이 세상 자체가 원래 본래 보시바라밀이에요, 삶 자체가.
원만 구족하게 완벽한 보시바라밀의 혜택을 우리는 매 순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 자기가 들어가고
에고, 아상이 들어가면
분별에 들어가면
그런 진실을 볼 수가 없어요.
참 놀라운 세상이죠, 이 세상은.
우리가 분별로 바라보면
내가 분별로 해석한 세계로 좁혀져요.
우리 의식이 확 좁혀지고 제한돼요.
‘나는 가난한 사람’ 요걸로 제한되요.
나는 가난한 사람일 수가 없는데.
본래 풍요거든요.
본래 원만구족이거든요.
이게 진짜 우리의 본래 모습이거든요.
근데 우리는 ‘가난해’하고 분별한
왜?
‘남들보다 난 가난하니까 가난해’
이걸 진짜라고 여겨요.
연기적인 실상을 보지 못하니까.
나는 키가 작아
난 돈이 없어
나 인물이 못났어.
이 마하에서 말하는 크다는 것은
그렇게 크다 작다라는 상대적인 크고 상대적인 작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분별이전에, 분별을 넘어서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을 얘기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면 왜 클까요?
진짜 큰 건 뭘까요?
이 세상을 우주 전체를 100이라고 했을 때 크기를 100이라고 했을 때
1%를 빼고 나머지 99만큼을 얘기를 하면 그건 큰 거죠.
그 엄청 큰 거잖아요.
우주를 100으로 본다면.
그 크다고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죠?
1%보다는 크니까.
근데 이 우주를 100이라고 봤을 때
100을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전부인데.
이것 뿐인데.
이걸 크다거나 작다고 할 수 있어요?
크다거나 작다고 할 수 없어요.
크다거나 작다는 말은
상대적인 비교할 대상이 있을 때만
분별의 대상이 있을 때만 만들어질 수 있는 말들이에요.
여러분이 무인도에 가서 어릴 때부터 내 혼자 살았다.
그럼 여러분이 큰지 작은지 알 수 있어요?
남잔지 여잔지 알 수 있어요?
알 수 없어.요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어요.
비교대상이 나타나야 그때
“내가 아 내가 내가 키가 컸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거예요.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하나는 하나를, 자기는 자기를 확인할 수 없어요.
이 [마하]라는 것은 법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에요, 법을 드러내고 있는 말.
이 법이라는 말을 초기불교에서 [법]이라고 했어요. [다르마]라고 했어요.
선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해요, 마음.
이 법을 마음이라고 해요
또 [본래면목]이라고도 해요.
본래의 진정한 자기라는 거죠.
진정한 자기의 본래면목.
그래서 이것을 다른 말로는 [진정한 자기] 이렇게도 얘기해요.
진정한 자기의 본래면목
진짜 내가 누구냐? 이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이 몸을 나라고 여기고 살아왔다 보니까
이 느낌 의지 의식,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마음
이걸 나라고 여기고 살아왔다 보니까
이 나는 어때요?
크고 작은게 있단 말이에요
나와 세계가 있고
나와 다른 사람이 있고
비교된단 말이에요.
내가 큰지 작은지가 딱 비교 분별된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아상, 에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차차 공부를 하겠지만 나라는 게
부처님 가르침 핵심은 무아잖아요, 무아.
이게 내가 아니다.
인연따라 잠깐 이렇게 인연이 화합된 걸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진정한 내가 아니기 때문에
이건 크다거나 작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진정한 자기가 누군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이 마하라고 쓴 이유는 뭐냐?
진정한 자기는 마하에요, 마하.
크다 작다라고 말할 수 없는 큼.
비교 분별을 넘어서는 큼.
이걸 마하라고 그래요.
어느 것보다 큰 거는 마하가 아니에요.
절대성의 마하죠, 쉽게 말해.
무엇보다 크다, 무엇보다 작다라고 말할 수 없는 진정한 큰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를 얘기해요, 전부.
뭐가 전부? 이 마음이 전부란 말이에요.
허공성에, 이 우주 법계 전체를 드러내서 마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자기 본래면목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거 이해 안 되죠.
이해 안 되는데 일단 한번 계속 꾸준히 들어보시다 보면
하나하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즉 이 마하는
진정한 자기가 누군지를 설하고 있는 거예요.
진정한 자기는 크거나 작을 수 없어요.
비교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에요.
대상이면 크다 작다라고 할 수 있죠.
어떤 물건 같은 대상이면 크다 작다고 할 수 있죠.
이건 크다 작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에요.
이건 전부이기 때문에.
이건 전체를 얘기하는 거기 때문에.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법을 마하라고 해요, 마하.
자기 마음을.
여러분의 본래면목은
여기 안에 들어 있는게 아니에요.
여러분 마음이 가슴에 들어 있을까요? 머리에 들어 있을까요?
알 수 없어요, 어디 있는지.
실제 어떤 문화에서는 가슴에 들어있다고 느끼고
어떤 문화에서 머리에 들어있다고 느낀다 그래요.
여기 있거나 여기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영혼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냥 뭐랄까
이렇게 설명하는 건 참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마하를 설명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드린다면
진정한 자기의 본래 면목은
이 허공성, 허공우주, 삼라만상 전체를 통으로 하나 하나 전체성을
전체자아를 얘기해요, 전체자아, 전체로서의 하나에요.
법신이에요, 법신.
비로자나 법신불이 어디 있어요?
무량수 무량광이라 그래요.
아미타불을 무량수불 무량광불.
부처님의 속성은 무량수 무량광이에요.
시공간에 제한이 없다.
그 어떤 모양이 없으니까 전체니까.
시공을 초월하는 전체란 말이에요, 전체.
전체를 넘어서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크다거나 작다고 할 수 있어요?
이건 크다 하거나 작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마하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마하는
그냥 단지 큰 지혜가 있나 보지?
그런 정도의 크다 작다, 이런 식의 얘기를 안 해요.
사실은 쉽게 말해서 여러분
제가 설명하는 반야심경을 해설하는 방식은요
전통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어요.
육조단경을 육조 혜능스님이 설하신 경전인데도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우리가 육조단경이라고 이름을 붙였잖아요.
놀라운 책이다.
왜 그런지 아세요?
육조단경은 기존에 많은 방편의 가르침을 설한 경전들
스님들의 어떤 논설들 이런 것과 완전 달라요.
그 당시 ‘불교는 이런 거야’라고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봤을 때 너무 충격적인 거예요.
마치 반야경의 등장과도 같아요.
파격이고 혁신과도 같은.
예를 들어
좌선은 이렇게 앉아 가지고 오래 앉아 있는 걸 좌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선정은 그 좌선을 통해서 어떤 선정의 경계가 딱 나타나는 어떤 삼매를 체험하는 상태라든지, 그런 걸 선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반야바라밀은 또 어떤 거
사홍선원은 어떤 거
다 전부 다 말마다 말마디마다의 개념들이 다 있었어요.
근데 육조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전부 다 마음으로 돌려요.
앉아 있는게 좌선이 아니다.
마음이 좌선이다.
선정? 뭐가 선정이냐?
이게 선이고, 이게 정이다.
법이, 이 법하나 마음 하나
오로지 견성 만을 얘기를 하세요.
성품, 자기성품, 본래면목
이거 하나 설한단 말이에요.
그럼 반야바라밀이 뭐냐?
이 법이 반야바라밀이다.
이 법이 바로 사홍서원이다.
뭐가 불법승 삼보냐?
법이 바로 불이고, 법이 바로 법이고, 법이 바로 승이다.
모든 것이 다 이 마음 하나, 법 하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단 말이죠.
이 만법의 입장에서 반야심경을 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이 법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편들이에요.
마하도 법을 얘기를 하거든요.
반야도 이걸 얘기를 해요.
바라밀도 이거예요.
심도 이거고요, 경도 이거예요.
관 이거예요.
자재제가 이거고요.
전부 다 이 법 하나를 딱 드러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 제가 지금부터 반야심경을 설명하는 모든 내용들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예요 이렇게 설명해야 되잖아요.
말뜻을 다 풀어 줘야 되잖아요.
물론 그것도 하겠지만.
말뜻을 풀어준 뒤에는
그것이 결국에는 낙처가 뭐냐?
그것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뭐냐?
이 모든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경전에 나와 있잖아요.
이 말, 언구를 풀어서 설명을 하겠지만
그 풀어서 설명한 그 언구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 말이 가리키는 이 낙처,
법 열반 해탈 본래면목 주인공
그 자리, 그 자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에요
직지인심이에요, 전부 다. 마하가 직지인심이에요.
제자가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뜰앞에 잣나무” 하듯이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면
오늘은 뭐예요?
마하.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마하가 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마하라는 것은
이 상대적인 이런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이 상대적인 개념에 익숙해 있어요.
이 상대적인 세계는 연기적인 세계에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연결성을 가지고 인연을 맺고 존재하는.
그러니까 크다는 작다가 있어야만 크다가 있어요.
크다 혼자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마치 아빠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어요?
자기 혼자 아빠가 될 수 있어요?
안 돼요.
자식이라고 아들이나 딸이 태어남과 동시에 아빠는 동시생이에요.
아빠와 아들을 동시생이에요.
아빠가 먼저고 아들이 먼저고 이런 게 없어요.
아빠가 있으므로 자식이 있는 거예요.
자식이 있으므로 아빠가 있는 거고.
이렇게 연기적으로만 생겨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현실 세계, 현실 세계만 알고 살다 보니까
이 분별된 세계, 연기된 세계 거기에만 사로잡혀서
그것만을 보고 규정하며 살았단 말이에요.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크다거나 작다고 할 수 없는
맞다 틀리다, 옳다 그러다
그 어떤 개념 판단 분별로 규정지을 수 없는 진실, 삶의 진실
그것은 보지 못하고 살았단 말이죠.
진실로 본다면
여기 마하에서 설명하고 있는
‘본래 크다 작다라는 게 없다, 그게 진짜 마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여러분은 ‘나는 잘났어, 못났어’라고 생각했는데
잘났어도 내가 아니고 못났어도 내가 아닌 거예요.
진정으로 잘난게 자기예요.
‘난 행복해 난 불행해’
이게 진짜 행복이거나 불행이 아니에요.
행복과 불행을 넘어서는, 행 불행이라는 말을 넘어서는 진정한 행복이에요.
그게 열반이라고 하는 거예요.
뭐 하나 붙을 자리 없는.
내가 부자냐 가난하냐
난 부자다 가난하다 여기에 얽매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부자와 가난을 넘어서는
진정한 원만구족의 존재예요.
진정한 마하의 존재예요.
크거나 작은 존재가 아니라 마하의 존재에요.
진정한 원만 구족이에요.
완전한 원만구족을 늘 매 순간 쓰고 살고 있잖아요.
그게 나의 진정한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분별로서
나는 맞다틀리다, 옳다그러다, 잘살았다못살았다, 뭐 잘났다못났다
남들과 비교하는 모든 생각들
그 생각을 믿지 말고
그 생각을 믿지만 않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자기의 어떤 근원에 조금도 한발 다가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별의 세계에 휩쓸려 다니는 어떤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어떤 그런 삶을 사실 수가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그 마하에 대해서 이렇게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고
다음 시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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