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 나라의 왕인 프라세나지드왕에게 외국에서 여러 명의 왕들이 방문을 했어요. 그래서 환영 파티를 연 거요. 연회를 베풀었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외국국가 원수의 왕들이 와서 또 큰~~~나라의 왕이 연회를 베풀었으니까 얼마나 화려하게 베풀었겠어요.
자기들 나름대로는 제일 좋은 음식에, 제일 좋은 술에, 제일 아름다운 미녀들이 춤을 추고 접대를 하는 그런 환영파티를 열었던 거요.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렇게 쾌락을 즐겼던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들끼리 토론이 붙었어.
“야,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게 뭐겠느냐? 어떤 게 제일 즐겁겠느냐?”
“뭐니 뭐니 해도 즐거운 것을 보는 거다. 보는 재미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 아름다운 미녀를 보는 것, 요즘말로 하면 영화보고 이런 재미있잖아.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다, 달콤한 사랑의 소리를 듣는다. 이거보다 더 즐거운 게 어디 있겠냐. 귀에 즐거운 것 이게 제일 즐겁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역시 즐거움은 맛에 있다. 갖가지 음식 차려서 맛 한번 봐라. 그 먹는 재미보다 더 재미가 어디 있느냐?”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즐겁다 즐겁다 해도 향기보다 더 즐거운 게 어디 있느냐? 꽃향기 좋지, 여인의 향수, 온갖 그런 향기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냐?”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것은 촉감, 감촉이다. 어머니 품에 안긴 그 아이의 기쁨이 어떤 거냐?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았을 때 그 부드러운 피부, 그거보다 저 좋은 게 어디 있냐?”
이러면서 자기들끼리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각각의 주장이 있다 보니까 끝이 안 나는 거요. 한쪽으로 모여져야 되는데, 그저 각자 자기 소리만 하게 된단 말이오.
그래서 프라세나지드왕이 ‘우리 그러지 말고 여기 기원정사에 부처님 계시니까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보자.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게 뭐냐 라고.’
그래서 이 왕들이 부처님을 찾아왔어. 그러니까 한 잔 먹고 놀다가 부처님을 찾아온 거요. 지금까지 토론한 얘기를 하면서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게 제일 즐거운 겁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뭐니 뭐니 해도 적절한 것이 제일 즐겁다.”
적절한 것, 적당한 것, 이게 제일 즐겁다는 거요. 그러니까 왕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하다가 이 말에는 다 승복을 하고는 ‘역시 부처님이십니다.’ 입이 딱 다물어진 거요. 아무리 음식이 맛있다 해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된다? 괴롭지. 안 먹으면 배고프고, 많이 먹으면 괴로워지죠. 그러니까 적절한 것, 적당한 것 보다 더 즐거운 건 없다는 거요. 적당한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거요.
보는 것도 적당해야 하며, 듣는 것도 적당해야 하고, 냄새도 적당해야 하고, 맛도 적당해야 하고, 감촉도 적당해야지. 음식을 못 먹어서 배고플 때는 참 먹는 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런 말이 있잖아. 그런데 요즘 사람이 그게 지나쳐서 몸이 뚱뚱해져 비만이 되어서 얼마나 괴로워하고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그 어떤 것이든지 지나치게 되면 다 독이 된다.
맛있는 술이라지만 술을 많이 먹어서 지나쳐서 위가 고장이 나서 간경화가 걸리고 난리지. 좋은 담배라고 피워서 폐를 망치고. 여러분들 지금 기호식품이라는 것도 다 보면 사실은 그게 굉장히 좋은 거였는데 다 지나쳐서 지금은 마약처럼 중독성향이 되어 있는 거요.
사랑도 지나쳐서 오히려 신체를 망치고,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적당한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소. 했을 때, 이 왕들이 금방 동의를 한 거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다 동의하십니까? 적당한 것, 적절한 것 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역시 우리 부처님 참 굉장한 말씀이죠.
이렇게 딱 한마디에 왕들이 전부 절복을 하니까, 그때 그 자리에서 왕을 시봉을 하던 한 요즘 말로하면 비서가 시인이었나 봐요. 이렇게 노래했다고 합니다.
향기로운 다홍의 꽃, 아침에 피어나 아직도 향기 가시지 않았다.
보라! 불타의 빛나는 모습,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도다.
왕들이 전부 잘났다고 뻐기고 고집을 하고 하지만 부처님 앞에 와서 한마디 이의도 제기 못하는 다 절복하는 이런 모습을 보며 밤에는 뭇별이 네가 더 빛나느니, 내가 더 빛나느니, 하다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흔적도 없어지는 것처럼, 붓다 앞에 오니까 사람들이 다 절복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처님을 태양에 비유해서 이렇게 노래를 한 게 있습니다.
그럼 이게 얼른 들으면 그냥 세속적인 얘기 같잖아요. 부처님은 이 한마디로 지금 뭘 가르친 거요? 중도를 가르친 거요. 중도라는 말도 안 쓰고, ‘이게 진리다. 이게 최고다.’ 이런 말도 한마디 안하시고, 사람들이 음식 얘기를 하니 음식 얘기를 받아서 적절하게 먹는 것이 건강에 가장 좋다. 즉, ‘어떤 음식이 제일 건강에 좋으냐,’이러니까 적당하게 먹는 게 제일 좋다.
어떤 향기가 제일 좋은 거냐? 적당하게 맡는 게 제일 좋다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적당하게 쓰게 되면 비상도 약이 되죠. 약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하거나 부족하면 독 아닌 게 없는 거요. 그러니 중도는 아주 고상한 저 하늘 위에 그런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어디에나 늘 작용하는 그런 도를 말하는 거다.
덧붙여서 조금 말씀을 드리면 이 프라세나지드왕을 음식을 많이 먹어서 뚱보였나봐요. 그래서 자기 몸을 제대로 못 가누었다고 그래요. 자기 몸을 제대로 못 가누니까, 즉 걷지도 잘 못하고 이러니까 더욱더 갈 때는 수레를 타거나 즉, 마차를 타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마를 타거나 이렇게 되니까, 더더욱 운동 부족이라서 더 뚱뚱하게 되는 거요.
몸이 이렇게 뚱뚱하니까 더 음식을 많이 먹게 되고, 또 걷지를 못하니까 차를 타게 되고, 운동 부족으로 더 뚱뚱해지고, 이래서는 완전히 그 표현에 보면 공이 굴러가듯이 그렇게 되어서 본인도 괴로웠다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 전에 오실 때도 늘 숨이 차서, 부처님 앞에까지 마차타고는 못 오지 않습니까. 정사에 입구에 내려서 그 몇 발 되는 곳 걸어 들오는데도 숨이 차서 헐레벌떡하고 들어오면서 괴로워했다는 거요.
그래서 이런 문제로 부처님께 자기 괴로움을 호소했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으로 지어서 교화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살펴 적당히 음식을 조절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괴로움도 없고, 신체와 수명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적당하게 먹을 줄 알아야
바로 수명도 길어지고, 몸도 건강해진다.
그런데 이 혀끝에서 느끼는 맛에 집착을 해서 그것을 절제할 줄 모르면 누가 자기를 해치는 게 아니고, 누가 총칼을 들고 와서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 내 혀끝에 그 음식 맛에 집착한 그것이 내 건강을 해치고, 내 명을 앗아가게 된다.
그러니 수많은 군대로 성을 에워싸고 성벽을 높이 쌓고 해서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한다고 하지마는
정작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음식과 향기와 논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감촉,
여기에 집착을 해서 스스로 자기를 해치게 된다.
그래서 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닫고 그러나 왕이 자꾸 숟가락만 들면 밥을 많이 먹게 되니까, 옆에 시종에게 부처님이 말한 게송을 암기하도록 했어요. 암기해서 밥 먹을 때마다 옆에서 외우도록, 이렇게 밥 먹을 때마다 옆에서 외우고, 또 외우고 그러니까 잊지 않고 한 숟가락 더 먹으려하다가 수저를 놓고, 놓고, 이런 식으로 해서 얼마가 지난 뒤에 몸이 날씬해졌다고 그래요.
몸이 날씬해지니까 활기도 생기고, 운동도 할 수 있고, 얼마나 기뻐요. 너무너무 좋아서 기원정사를 향해서 절을 하고 절을 하고 또 절을 하면서 ‘위대하시다, 세존이시여’를 한 거요.
이 분은 어떻게 보면 조금은 수준이 낮다고 그럴까, 그러니까 부처님께 법을 물어서 뭘 깨치고 위대하셔라가 아니고, 이렇게 자기의 고민, 이것도 고민이죠. 해결해서 위대하셔라고 세존을 부르고,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2가지 크큰 이익을 줬다. 현재에도 행복하고 미래에도 행복한, 현재에도 이익이 되고 미래에도 이익이 되는 이런 2가지 이익을 나에게 줬다. 이러면서 행복해 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가만히 보면 부처님은 세속생활에 관여하신 흔적은 없죠. 그러나 세속을 담쌓고 세속을 외면한 건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그죠? 이런 왕들이 뭐가 제일 맛있고, 뭐가 제일 좋은가, 이런 토론 하다가도 부처님께 가서 물어보는 어떻게 보면 좀 문턱이 낮다고 그럴까, 만남이 쉬웠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저는 약간은 뉘우칠 때가 있어요. 특별히 담을 쌓은 건 아닌데 바쁘다는 핑계로 대중과의 만남에 혹시 문을 쌓고 있지는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저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하면 ‘쓸데없는 질문이나 한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서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도 아주 가볍게 받아들이시고, 그런 질문을 매개로 해서 그저 그 세속적인 농담, 세속적인 말속에 빠져드신 게 아니고, 그걸 받아서 그대로 불교의 최고 이상인 중도를 사람들이 체험하도록, 깨닫도록 지도하는 이게 부처님의 탁월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몸에 살 빼는 법을 부처님께서 가르쳤다. 이런 얘기는 아니죠.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도 중도를 가르쳤다는 거죠. 그러니까 적게 먹고 자신의 건강도 보살피고, 그리고 적게 먹음으로 해서 그렇게 탕진하는 음식을 버리지 않게 됨으로 해서 백성들의 기아를 돕게 되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왕은 너무 호화판으로 먹고는 도리어 자기도 살이 쪄서 숨을 헐떡거리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프라세나지드왕을 좀 닮았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적게 먹는 것이 우리의 건강에 좋다.
그런데 지구 저 편에 굶주리는 아이들은 많이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
나는 많이 먹어서 건강을 해치고, 그들은 못 먹어서 건강을 해치는 데,
나는 적게 먹어서 건강에 좋고, 그들은 많이 먹어서 건강에 좋다.
이게 뭐요? 중도에요.
나는 많이 먹어서 건강을 해치고,
그들은 적게 먹어서 건강을 해치는 게 양극단이에요.
나는 적게 먹는 것이 중도고, 그들은 많이 먹는 것이 중도다.
중도라는 것은 많이 먹는다 적게 먹는다 하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적게 먹는 것, 이것은 바로 중도를 실현하는 거다.
음식 먹는 여기에 바로 도가 있다. 잠자는 여기에 도가 있고, 옷 입는 여기에 도가 있고,
도라는 것을 멀리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만약에 산에 가서 오줌을 눌 때도 큰 나무 밑에다가 누면 거름이 됩니다.
그런데 작은 새싹이 올라오는데 누게 되면 어떻게 되요? 말라죽게 만들죠.
그러면 말라 죽게 만드는 것은 극단이 되는 거요.
거름이 되도록 하는 것은 중도다.
중도는 여러 곳에서 알 수 있습니다.
돌멩이가 밭에 있으면 농사에 방해가 되죠? 쓰레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가 건축 공사장에 있거나 담장을 쌓는데 있으면 좋은 재료가 된다.
똥이 방 안에 있으면 버려야 할 대상인 오물이 되지마는
그것이 밭에 있으면 어떻게 된다? 아주 양질의 거름이 된다.
이 세상의 만물은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오물도 아니고 거름도 아니에요.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그것이라고 할 속성이 없다.
이게 무아입니다.
무아라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에요.
여러분도 여러분들을 누구라고 할 속성이 없죠.
택시타면 승객이 되죠.
집에 가면 아내라고 불리든지, 남편이라고 불리든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이라고 불리고, 자식을 만나면 부모라고 불리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라고 불리고,
후배를 만나면 선배라고 불리고, 선배를 만나면 후배라고 불리고,
나는 선배도 아니고 후배도 아니에요.
친구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그 어떤 정해진 속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도 불리고, 저렇게도 불리고,
마치 구름이 토끼모양도 되었다가 사자 모양도 되었다가 코끼리 모양도 되었다가 하는 것처럼. 이것이 무아란 말이오.
우리가 이 무아를 이해하고, 그것을 체험하고 경험해야
사실은 우리가 집착을 뛰어넘을 수가 있어요. 고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 무아를 경험하려면
바로 이 중도의 길을 가야 된다.
중도를 알아야
공을 알 수 있고 무아를 알 수 있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바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상대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오줌을 어떻게 누느냐에 따라서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고,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 할 때, 아이에게 적절한 일거리를 주면 심부름을 해서 부모를 돕기도 하고 아이는 그 심부름을 통해서 일을 배우게 되죠.
그런데 그게 적절하지 않고 너무 지나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의 건강을 해치고 아이의 공부 시간을 뺏고 아이를 혹사하게 되죠.
그것이 부족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가 세상을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아이가 아주 버릇이 없는 아이가 되기가 쉽죠.
그런데 옛날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해서 아이들이 제때 성장하고 배우고 할 기회를 뺏어버렸어요.
요즘은 아이들을 지나치게 내버려둬서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뺏어버려서 다 그냥 애완용 동물 비슷한 역할만 하게 된 거요.
그래서 다 지금 아들딸들이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어도 부모를 돕기는커녕 골칫거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중도를 알지 못하는데 있다. 이런 얘기에요.
우리의 몸도 너무 많이 쓰면 어떻게 됩니까?
과로하게 되고,
너무 쓰지 않으면 운동부족이 되죠.
적절할 때 바로 가장 건강하게 된다.
이것이 중도라는 거요.
이런 중도를 이렇게 고상하게 흑판에 써 가면서 이렇게 얘기하신 게 아니고, 어려운 문자로 얘기하신 게 아니고, ‘뭐가 제일 즐거운가’ 할 때도 ‘적절한 것이다.
몸이 뚱뚱해서 괴로움을 하소연할 때도 음식을 중도적으로 섭취하라. 이 말이죠.
적절하게 먹으므로 해서 욕심에 끌려가지도 않고
적당하게 절제하는 그런 삶 속에서
가장 자신을 위하는 길이 있다는 것
이런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펴주셨으니까 여러분들도 경전을 잘 읽어나간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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