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가난한 쟁기꾼이 스님이 되어서 수행하는 얘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난갈라꿀라고 하는 스님에 대한 얘기인데요, 이 난갈라꿀라는 말은 쟁기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이름이 없었어요.
그냥 쟁기 몰다가 버리고 스님이 되었으니까 뭐라고 불렀다? 쟁기꾼이다.
대장장이 하다가 스님이 되었다. 대장장이다. 그게 이름이 된 거죠.
이 사람은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물론 신분도 천했겠죠.
그래서 남의 집에 가서 땅을 갈아주고, 쟁기질을 해주고는 품을 팔아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그런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스님이 지나가다가 그 스님이 그렇게 가난하게 힘들게 인생을 사는 걸 보고
“당신 인생을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무엇 때문에 뭐가 좋아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 이렇게 물었더니
“그럼 어떻게 사느냐”는 거요.
신분은 천하지, 돈은 없지, 배운 것도 없지, 할 줄 아는 건 쟁기질밖에 할 줄 모르지.
그러니까 몇 푼의 돈을 받고 쟁기질을 해주는 이거 외에 내가 살길이 뭐가 있느냐?
그랬더니 스님이 “그렇게 사는 거 보다는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서 수행자 되는 게 낫지 않소.”
그러니까 이 쟁기꾼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스님이 되느냐는 거요. 그것은 훌륭한 사람만 되지 나같이 천하고 가난하고 무식하고 이런 사람이 어떻게 스님이 되느냐는 거요.
그러니까 이 스님이
“불교는 그런 게 아니다. 신분이 높아야 된다든지, 유식해야 된다든지, 이런 게 아니다.
자기마음만 잘 다스리면 누구나 다 훌륭한 스님이 될 수 있고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다.”
“정말 나도 될 수 있습니까?”
“그래, 당신도 될 수 있소.”
이 쟁기꾼이 희망을 가지고 쟁기를 버리고 스님이 되겠다고 발심을 한 거요.
그래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갈아입고, 그러고는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어.
쟁기 몰던 그 옷과 신발은 벗어던졌죠.
그런데 큰 스님이 그것을 묶어서 숲에 있는 나무에다 매달아 놓으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쟁기꾼은 왜 그렇게 하는지를 몰랐지만 일단 자기가 벗어 던진 옷과 신발을 새끼줄에 매어서 나무에 매달아 놨어요.
그러고는 정사에 가서 수행을 하는데, 수행생활 하니까 너무너무 좋은 거요.
왜? 우선 밥 얻어먹을 걱정 없죠. 왜? 아침에 나가서 승복 딱 입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깍듯이 음식 장만해서 주니까 먹는 거 잊어버렸지.
일 안해도 되지. 쟁기도 안 몰아도 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천하게 살던 이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좋은 거요.
그래서 이 수행자 생활하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부유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은 머리를 깎고 절에 오면 수행자 생활이 너무너무 힘드는 거요.
그런데 반면에 바닥에 살던 사람들은 스님이 되면 생활이 너무너무 편한 거요.
똑같은 생활인데.
그러니까 복이 딴 게 아니라 이게 복이라.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니까, 이게 힘드는 거요.
그렇게 자기가 원하든 게 일도 안하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도 안 당하고, 밥 먹는 걱정 안하고 살 수 없느냐. 그런데 스님이 되니 그게 해결이 됐어. 공부는 둘째 치고 이것만 해도 너무너무 행복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니까 불만인 거요. 온 갖게 다 불만인 거요.
그래서 자기의 그런 공부가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하고, 오히려 밖으로 나가고 싶고, 그런 상태에서 큰 스님을 찾아가서 자기 상태를 일렀더니
큰스님께서 전에 옷 매달아 놓은 거 있지 않느냐. 거기를 가보라는 거요.
그래서 그 옷 매달아 놓은 거기를 가서 가만히 자기가 쟁기질을 하고 살던 그때를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생각해도 엄청나게 잘못생각하고 있는 거요.
다 떨어진 옷 입고, 남에게 멸시를 받으면서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쟁기질을 하고 겨우 밥 얻어먹는 그게 뭐가 좋다고, 너가 지금 그걸 그리워하냐. 이거야. 어리석어도 유분수지.
그런데 사람은 또 그렇게 되는 게 인생이지 않습니까. 이게 업이라는 거요.
그래서 그는 자기가 벗어던진 그 옷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놈아. 만족함을 모르는 놈아.
너는 고작 이 낡은 옷을 다시 입겠다는 거냐.
그래서 사회로 돌아가 다시 남의 고용살이를 하겠다는 거냐.
이 어리석은 놈아.”
이러고는 자기가 자기를 실컷 꾸짖고는 그러니까 정신이 번쩍 든거요.
그래서 정사에 돌아와서는 또 정진을 하는데
그러고 나면 며칠 정진이 잘 되다가 이게 또 헤이해지면서 또 수행생활에 불만이 생기고
‘가서 쟁기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런 번뇌가 일어나는 거요.
그러면 또 숲에 가서 벗어놓은 옷을 쳐다보면서 정신을 차리고는
‘이 어리석은 놈아.’ 하고 또 야단을 치고는 또 돌아오는 거요.
그러니까 수행자들이
“너 도대체 숲에 왜 그리 자지 가느냐. 거기 뭣 때문에 가느냐.” 궁금하니까 물었을 거 아니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거기에 나의 스승이 있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이렇게 해서 정진을 열심히 해서 깨달음을 얻은 거요.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그 숲에 갈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맨날 숲에 가던 사람이 안 간단 말이오.
그래서 “너 왜 요새 스승을 찾아 안가냐 ”하니까
“거기 이제는 더 이상 스승이 없다”는 거요.
그러니까 비구들이 생각할 때, 거짓말 한다 이거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기서 스승 있다고 매일 찾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스승이 없다는 거니까.
‘거짓말 한다. 아무튼 거짓말 한다.’ 수행자는 거짓말 하면 안 되죠.
그래서 이 비구는 계율을 어겼다. 이렇게 지적을 받는 거요.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 불려가서 어떻게 된 거냐. 해명을 하는데서 자기의 사정을 자기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말을 했던 거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그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여래의 아들은 자기 자신을 잘 꾸짖고 경책하여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여야 하느니라.”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계속 꾸짖어야 돼.
자기 자신을 꾸짖는다는 그 자기 자신이라는 게 뭘까요?
바로 과거의 업에 의해서 살아가는, 살아가려고 하는
그것을 늘 경책하고 꾸짖지 않으면
우리가 이 해탈의 길로 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셨어요.
“오 비구요,
스스로 너 자신을 훈계하고 점검하라.
그리고 이 같은 방법으로 너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집중시켜 나가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자기야말로 진정 자기의 의지처
어지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으랴.
자기야말로 진정 자기의 안식처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잘 보살펴라.
마치 장사꾼이 양말을 다루듯이.”
그러니까 수행자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이런 말도 있죠?
바로 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잘 살펴야 됩니다.
자신이 틀렸을 때는 틀린 줄을 알아차려야 하고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잘못한 줄을 알아차려서 뉘우쳐야 하고
자신이 모를 때는 모르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오, 화가 났구나.’ 이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한다.
늘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에 깨어있지 못하죠.
화가 날 때는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화가 날 때 뭐라고 그럽니까? ‘뵈는 게 없다’ 그러잖아.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화가 났을 때는 귀가 있어도 남의 소리가 들리지가 않고.
그게 어리석은 자죠.
‘욕심에 눈이 어둡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이때도 마찬가지요.
이는 자기 자신에 깨어있지 못하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놓고 보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보면 후회가 되죠.
부끄럽다. 이거야.
“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렇게 도리어 부끄러워진다 이 말이오.
이것은 그 순간 자기 자신에게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깨어있는 공부를 할 때
‘자기 자신에게 깨어있다.’
이게 말은 쉽지만 도대체 뭘 말하는지 감이 안 잡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물을 여실히 관찰하려면
집중력이 있어야 됩니다.
관찰과 집중을 키우기 위해서
먼저, 조용한 곳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가는 것을 관찰한다.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알고
길게 들어올 때는 길게 들어오는 줄 알고
길게 나갈 때는 길게 나가는 줄 알고
코끝에 마음을 집중해서 숨의 상태를 알아차린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다보면 숨이 들어오는지, 숨이 나가는지, 짧은지 긴지, 전혀 놓치고 살잖아요.
한번 들어왔던 숨이 나가지 않아도 죽고
한번 나갔던 숨이 들어오지 않아도 죽는단 말이오.
숨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이렇게 중요합니다.
제일 중요하다 중요하다해도 첫 번째가 뭐요?
숨이에요.
숨은 10분만 안 쉬면 죽습니다.
두 번째 물이 중요하죠.
한 20일 안 먹으면 죽습니다.
밥은 20일 안 먹어도 안 죽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하다 해도 음식이죠.
또 잠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중요한 것들을 지금 오염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공기를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음식을 오염시키고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해치면서 이걸 가지고 발전이다. 잘사는 거다. 하는 것도 사실은 또 돌아보면 어리석은 행동이 된다.
그러니 이 호흡에 집중해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 출발이에요.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집중력을 높이고 관찰력을 높이는 방법이에요.
호흡을 관찰해보면 약간 흥분하면
즉, 화가 나면 숨이 가파지죠.
남을 욕하려고 할 때도 숨이 가파지죠.
어디 가서 남을 물건을 훔치려할 때도 숨이 가파지죠.
이성에 대한 어떤 욕정이 일어날 때도 숨이 가파지죠.
호흡은 호흡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아주 우리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호흡에 깨어있는 것들이 잘 연습이 되면
자기 마음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고
몸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릴 수가 있어요.
호흡에 깨어있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서
바로 마음의 상태,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상태도 알아차리게 되면
화가 벌컥 낸 뒤에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이미 벌써 화가 일어나려고 하는 낌새를
호흡을 통해서, 맥박을 통해서,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을 통해서
바로 알아챌 수 있다.
그걸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점점점점 커져서
결국은 바깥으로 화를 내버리죠.
화를 내놓고도 못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죠.
하루를 넘기기 전에는 알아차리고 놓아버려라.
그래서 참회 기도하잖아요.
사실은 그때 알아차려라.
더 나아가서는 일어나려고 할 순간에 알아차려라.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에 알아차리면 바로 놓아집니다.
알아차림과 즉시 놓아집니다.
그게 잘 이해가 안 될 거요.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교실에서 뛰어놀고 있어.
그럴 때 아이들이 조용히 앞을 응시하고 있을 때는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아이들이 떠들고 있을 때는 선생님이 들어와도 잘 못알차리죠.
그런데 아이들이 소곤소곤 떠들고 있을 때는 문이 도로륵, 선생님을 보는 순간 조용해지죠.
선생님이 “조용해라”이래야 조용해집니까?
선생님이 아무 말씀 안하셔도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거를 딱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잡담이 끊어지고 조용해집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어떤 일이 재미가 나서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는
선생님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죠.
선생님이 들어왔는데도 막 놀아.
그래서 선생님이 말해요. “조용해” 하면 그때 알아차리고는
각자 자리에 돌아와서 조용해집니다.
그때는 조용해도 아직도 마음에 흥분이 남아 있죠.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아직도 집중은 안 됩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어떤 노래에 집중되어 있을 때는 흥분되어 있을 때는
선생님이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선생님이 '조용하라' 그래도 조용 안해집니다. 걷잡을 수가 없어져요.
그런 것처럼 우리들의 이 마음도 어떠냐?
외부 경계에 의해서 업식이 반응하는 순간을 수, 느낌이라고 합니다.
반응을 하는 순간에 알아차리면
바로 알아차리는 즉시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요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느낌에 따른 반응, 맹목적 충동으로 나아가서 갈애로 옮겨가버린다.
그래서 그 쾌 반응에 좋은 느낌에 따라서는 좋아함이라는 집착이 일어나고
그 불쾌한 느낌에 대해서는 싫어함이라는 게 일어납니다.
이 좋고 싫고가 일어나버린다.
이 좋고 싫고가 바로 충동적으로 일어난 상태에서는
알아차리는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려도 작동을 한다 이거야. 그때는 놓아버려야 합니다.
알아차린다고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약간의 애씀을 통해서 놓아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초기에서는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면 되는데
이게 점점점점 더 커져서
싫어함이 미움이 되고
좋아함이 집착으로까지 가버렸다.
그때는 알아차려도 놓아지지 않습니다.
‘놓아야지’ 해도 놓아지지가 않게 된다.
그럴 때는 결심과 각오가 필요한 거요. 억눌러야 되는 거요.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떠냐?
거기에서도 통제가 안 되죠. 그냥 넘어가버리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계율을 지킨다 하는 것은
이미 반응은 했는데 그것을 행하지 않는, 말과 행위로 행하지 않는 것이 계율이고
선정을 닦는다 할 때는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는 거요.
왜냐하면 고요해야 알아차릴 수 있거든요.
지혜를 증득한다하는 것은
그 알아차림의 지속이 되면 어떠냐?
앞에서도 나왔지만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게 된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여실히 보게 되면
비록 반응이 있더라도 거기에 반응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거요.
그래서 공부가 조금씩 조금씩 깊어져 가게 된다.
이런데서 선가에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선가에도 어떤 스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요.
참선하다가 가끔 ‘아무개야!’ 자기가 대답을 합니다. ‘예’ 이럽니다.
또 ‘아무개야!’ 이러고
‘예’ 이럽니다.
‘정신 차려라’
‘알겠습니다’ 이래요.
남이 그렇게 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늘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하고
정신 차리라고 경책을 하고 답을 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깨어있다.
오늘 우리들은 자신에게 깨어있지 못하다.
여러분들이 음식을 먹을 때도 혓바닥 맛에 집착을 해서 깨어있지 못하죠?
그러니까 밥 먹기 전에도 부처님께서도 프라세드지드왕에게 일러준 것처럼
“아무개야, 너 지금 혓바닥 맛에 길들어 있다.
그러면 고통이 따른다.
혓바닥은 좋아하지마는 위가 괴롭고, 앞으로 몸이 괴롭고, 옷이 부족해지고
그 뒤에 따를 고가 매우 크다.”
이런 것들을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자기 자신에게 깨어있음으로 해서 자기를 조절해가는
고를 막고 복을 구하는 그런 공부를 해나가자.
그런 얘기 같습니다.
'법륜스님 > 부처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52. 화가 없어진 사람 (0) | 2019.03.08 |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51. 실수하면 다시 해보자 (0) | 2019.02.28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9. 부처님을 좋아한 젊은 비구 (0) | 2019.02.14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8. 자비로운 마음 (0) | 2019.02.13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7. 부처님처럼 되는 길 (0) | 2019.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