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나라고 불리는 한 스님의 수행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대륙에는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운데, 아완띠라고 나라가 있는데, 이곳은 인도 대륙의 중심에서 변방에 있는 국가가 되겠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이렇게 변방에까지 가서 수행 정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장로, 큰 스님이죠. 한 큰스님에게 소나라고 불리는 한 젊은이가 와서는 설법을 듣고는 자기도 출가하겠다. 이렇게 발심을 했어요.
그런데 이 큰스님께서는
“아니다, 자네는 세속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냥 세상에 살면서 부처님 법을 수행해라.” 이렇게 일러줘도 이 소나라고 하는 청년은 결단코 출가해서 수행생활을 하겠다는 거요.
두 번을 거절을 했는데도 청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스님의 출가를 허락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도는 상가라고 하는, 여러 스님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 상가에서만이 출가를 허락하는 거지, 즉 비구계를 주는 거지, 어느 개인 스님 혼자서 비구계를 줄 수가 없었나 봐요.
그렇게 해서 이 제자를 받기는 받았지마는 변방에서 자기 혼자서 정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수행자에게 비구계를 줄 수가 없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 소나라고 하는 젊은이를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로 보내서 거기서 계를 받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이 계를 받기 위해서 기원정사에 오신 거예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 작은 암자에 스승을 만나서 공부하다가 계를 받을 때는 본사나, 그렇지 않으면 종문에서 하는 1년에 한두 차례 하는 수계식할 때 거기에 참가하기 위해서 큰 절로 가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거 같아요.
이렇게 해서 기원정사에 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께 직접 설법도 듣고 이렇게 공부하니까 너무너무 기뻤어.
그래서 자기가 그 기쁨을 시를 지어서 노래를 했다고 그래요.
이렇게 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훌륭한 스님이 되었어.
그래서 계를 받고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때 부처님께 건의를 했다고 그래요.
“저처럼 이렇게 스님이 한두 분밖에 계시지 않는, 또는 5분, 6분 소수로 아직 상가를 구성하지 못한 그런 곳에서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해서 계를 받으려면 너무 복잡하다 이거야.
그래서 혼자서는 안 되더라도 5명의 큰 스님이 모여계시면 하나의 수계를 할 수 있도록, 비구계를 줄 수 있도록 이렇게 해주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건의했을 때, 부처님께서 승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본사에 있을 때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스님이 되지마는 외국이라든지, 멀리 떨어져 있다든지 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거기에 맞게 출가스님이 되는 그런 길을 열어 놨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불교는 아주 규칙이 엄격하고 원칙이 있지마는 그러나 무조건 적인 그런 원칙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형편에 따라서는 융통성이 있었다.
이 융통성이라는 게 잘못하면 무질서하게 되는 게 되는데, 무질서한 게 아니라 그 경우에 형편에 맞게 약간의 변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데서 좀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분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원래 결혼도 해서 부인도 있고 그랬나 봐요.
그런데 부처님 법을 만나서 집을 버리고 출가를 했으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꾸중도 듣고, 또 실망도 주고, 뭐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스님이 되어서 돌아오니까, 그 어머니가 비록 스님이기는 하지마는 아들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니까,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어머니가 아들이 설법을 잘한다 하니까, 아들에게 설법해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설법을 듣게 되었나 봐요. 아마 어떤 절에서 정사에서 설법을 했나봐요.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아들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큰 부잣집이라고 그래요. 집에다가 종만 하나 남겨놓고, 집지키는 종만 한 사람 남겨놓고 가족들을 다 데리고 아들의 설법을 들으러 갔다는 거요.
그런데 이 집이 워낙 부자인데, 이 부잣집은 원래 담장도 높지 않습니까? 그죠. 이 경전의 기록에 보면 7겹으로 담장을 쌓았다고 그래요. 담장을 7겹으로 쌓고, 그 대문마다 다 사나운 개를 둬서 어떤 도적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고, 거기다가 더 나아가서는 담장 밖에다가 수로를 팠다고 그래요. 물을 채워놔서 사람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여러분들 이런 거 보셨죠. 자금성이나 중국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큰 성에 가면 큰 성벽밖에 반드시 수로가 있습니다. 못 들어오게.
그렇게 하고 그 물 바닥에는 수은을 깔아놨다고 그래요. 그러면 물을 건너려고 들어갔다가는 또 다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밖에는 쇠창살로 해서 못 들어오게.
이렇게 해 놨기 때문에 그 집을 몰래 들어간다. 이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 집에 돈이 많다. 이렇게 소문이 나서 강도들이 10명 20명이 아니고 경전에 보면 900명이 이 집을 공격하려고 왔다는 거요. 900명이. 그러니까 요즘말로마면 떼강도죠. 일종의 군대 공격처럼.
이렇게까지 몰려 왔는데, 그렇게 몰려와도 이 철통같은 경비를 뚫기 어려운데, 마침 이 집에 여자종 한 사람만 있고, 여자 하인 한 사람만 있고 아무도 없이 텅텅 빈 거요.
그러니까 이 강도들이 안심을 하고는, 그러나 문을 따고 들어갈 수는 없죠. 철통같이 막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수로 밑으로 땅굴을 파고 아무도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이 집에 침임을 했는데, 이 주인이 돌아오게 되면 안 되니까, 두목이 법회 장소에 가서 자기는 이 법회가 언제 끝나나하고 거기 망을 보고, 부하들은 이 집을 공격해서 재산을 털은 거요.
그런데 땅굴을 뚫고 들어와서는 돈이 가득한 동전창고를 열어서 돈을 막 담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하나 남은 여자종이 보니까, 강도가 들어와 집을 털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급히 가서 주인마님한테 이른 거요.
“지금 강도가 집에 들어와서 돈을 훔쳐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인에게 일렀더니, 그 주인이 하는 말이
“그러냐? 그러면 그들의 눈에 보이는 재화를 가져가도록 내버려 두려무나. 나는 지금 아들의 설법을 듣고 있으니까 너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나 하여라.”
지금 법을 듣는데 거기에 너무 집중이 되어서 그 법을 듣는 기쁨에 겨워서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그 수많은 재산을 강도가 훔쳐간다. 이렇게 얘기해도, 가져갈 만큼 가져가도록 놔두라는 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요.
여러분도 이정도 될 수 있을까요.
아마 지금 집에 무슨 일이 있다면 법문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도망가듯이 달려가겠죠.
그래서 이 여자종이 돌아갔는데, 동전창고를 다 턴 강도들이 이제는 은전 창고를 터는 거요. 그러니까 이 여자종이 볼 때는 동전 창고가 좀 털려봤자 부잣집이니 큰 문제가 없다고 주인이 그러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은전창고까지 터니까 큰일 났어. 그래서 또 와서 얘기했더니 역시 스님의 어머니가 똑같은 대답을 하는 거요.
가져갈 만큼 가져가도록 놔두라는 거요. 법문 듣는데 방해하지 마라는 거요.
돌아가서 보니까 이제는 금전 창고를 털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전 재산을 다 털고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 여자종이 다급해서 또 온 거요. 그래서 또 이런 사실을 알리니까, 이 스님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너는 지금까지 두 번이나 나에게 오지 않았느냐. 그때마다 난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재산보다 더 소중한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있느니라.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아라. 한번만 더 네가 나에게 온다면 그때는 너를 혼내주지 않을 수 없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우리에게도 지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부처님 제자 가운데는 이런 일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수다타 장자는 부처님이 머무실 수행도량을 만들기 위해서 전 재산을 땅에 깔아서 그 값으로 땅을 사서 부처님이 머무를 기원정사를 지었지 않습니까.
또 암나빨리라고 하는 이 기녀는 부처님을 아침 공양에 초대를 했는데, 그 공양을 왕족들이 “10만금을 줄 테니까 양보를 해라” 이러니까
“왕자들이시여, 10만금이 아니라 이 나라를 전체를 준다 해도 나는 이 권한을 양보할 수 없소.”
이것도 같은 말이오.
법의 이치를 깨달으면 이런 지위나 재물이나 이런 것들 하고 이건 비교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서 지금 법을 듣고 그 즐거움에 그 법에 만끽해 있는데, 지금 그런 도둑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내버려 두라는 거요.
그런데 오늘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가 잘 안 가죠.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제 앞으로 경험을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인을 감독하기 위해서 지켜보고 있던 이 두목이 이 3번의 문답을 지켜보고는 생각이 바뀐 거요.
이런 사람의 돈을 만약에 내가 훔쳐간다면, 저 인드라신에게 벼락의 맞을 거다. 우리로 말하면 천벌을 받을 거다.
그러니 부하들에게 얘기해서 다 도로 갖다 놓으라는 거요.
이렇게 도로 갖다 놓고는 와서 법회가 끝나자 부인에게 용서를 빌었어.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부인이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저는 마님의 재산을 다 훔치고, 또 마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법회가 중도에 끝나거나 해서 또는 알림이 있어서 이 부인이 훔치는 중에 집으로 온다면 이 두목은 죽여 버리려고 한 거요.
그러니까 만약에 재산이 아까워서 법회를 듣다가 돌아갔으면 죽었다 이거야.
그러니 이 법의 기쁨으로 인해서 오히려 죽음을 면한 거요.
죽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재산이 제대로 돌아온 거요. 이렇게 하면 재산이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요.
그러니 이 스님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용서를 해준 거요.
“아, 그렇소. 나는 당신을 용서해 드리리라.”
그러자 이 강도의 두목이 부인에게 청을 한 거요.
“당신 아들에게 얘기해서 저희들을 위해서 설법을 해주고, 또 저희들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좀 청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그 900명의 도적떼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해서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었다. 하는 얘기에요.
그래서 경전에는 ‘여러 비구스님들의 이야기다.’ 해서 이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정의는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호하느니라.
정의로운 삶은 마침내 행복을 가져오나니 이것이 정의로운 사람의 이익 됨이니라.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고통의 세계로 가지 않느니라./
또 이렇게도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비구가 고요히 자비의 선정에 머물러 여래의 가르침에 기쁨을 가지면
마침내 평화로운 길에 이르러 모든 존재의 조건을 없애고 행복하리라./
이 9개의 게송을 읊으셨는데, 3개만 읽어드리겠습니다.
/5가지 모임, 오온
다섯 가지 모임의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짐을 언제나 바르게 관찰하면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고
죽음을 초월하는 지혜를 성취하리라./
/누구든지 간에 착한 벗을 사귀어
바르게 행동하고 고상하게 살며, 겸손하고 진실한 말씨를 쓰면
그로부터 많은 즐거움을 얻고 모든 고통은 끝나리./
이렇게 부처님께서 이들에게 게송으로 진리를 설하시고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런 얘기는 부처님 당시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신라시대, 한국의 부처님이다 라고까지 우리가 칭송하는 원효대사에게도 이런 얘기가 있죠.
원효대사께서 산길을 가는데 500도적떼들이 원효대사에게 나타나서 짐을 뺏었습니다.
그리고 원효대사까지 그들의 소굴로 납치를 해갔죠.
그런데 대사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어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많은 법문을 해주어서 그들이 도리어 감동해서 나중에 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셨어요.
이것도 아주 유명한 얘기에요.
500도적떼들이 산속에 은거하면서 길가는 사람의 재물을 털고 하는 이 도적떼들이 오히려 원효대사님께 감동이 돼서 출가를 해서 아주 훌륭한 스님들이 되셨다.
이것은 부처님에게만 있는 얘기는 아니다.
또 우리 승가에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에 어떤 선사님께서 밤에 잠을 자기 않고 정진을 하는데, 몰래 도적이 침입을 했어요.
그래서 살금살금살금살금 들어와서 방에 서랍을 여기저기 여기저기 열어서 돈을 찾고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 선정이 들어있고 깜깜하니까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초조불안가운데 여기저기 뒤져도 돈이 없단 말이오.
그런 중에 스님이
“어흠”하는 거요. 이 도적이 너무너무 놀란 거요. 간이 떨어질 정도로.
그래서 칼로 죽이려고 한 거요.
그럴 때 스님께서 “저 서랍에 돈이 있느니라. 가져가거라.” 그랬어요.
열어보니 돈이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이 돈을 갖기는 가져도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거요.
“도둑이야”라고 한번이라도 불러버리면 잡히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스님께서 “이 돈은 내가 너를 위해서 주려고 이미 마련해 놓은 돈이다.”
그러니까 훔쳐가는 게 아니고 뭐다? 얻어가는 돈이다.
“이건 내가 주니까, 얻어가는 돈이다.
혹시 밖에 나가다 잡히더라도 ‘스님께서 이 돈을 주신 겁니다’”
이렇게 대답하라는 거요.
이렇게 우리 될까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하셨습니다.
춘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는데, 그 공양에 독성이 있어서 부처님이 그걸 드시고 돌아가시게 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춘다를 원망했죠.
춘다도 괴로워했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이 세상에 제일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드신 공양이고,
하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드신 공양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독을 줘서 내가 독을 먹고 죽었다면 그 독은 내가 마지막 먹은 공양 맞죠?
그러니까 열반에 들기 직전에 먹은 공양이 바로 이 세상에 제일 큰 공덕이 있다고 선언하심으로 해서 춘다는 이 세상에 제일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을 올린 사람이 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지금도 춘다의 공양이라고 칭송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독이 든 음식을 미리 알고 안 먹었다든지, 독이 든 음식을 먹고 토했다든지, 먹고도 끄떡없다든지, 이런 것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적은.
그러나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도
그를 용서해주는 게 아니라 그를 칭송하도록,
이렇게 마음 씀씀이를 쓴 사람은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부처님 빼고는 아무도 못 봤어요.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이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적이다.
딴 게 기적이 아니고.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물건을 훔치러온 강도에게 그 물건을 훔쳐서 나가다가 잡혀서 그가 처벌 받을 것을 염려해서 그에게 물건을 준 것으로 했다.
이것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하는 이 암살자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숨어서 지키고 있다가 덜덜 떨다가 칼을 떨어뜨렸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거기 누구냐? 이리 오너라.” 하니
나와서 두려워하면서 사실을 고백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를 안심시켜 주면서
“이리로 가지 말고 저 뒷길로 가라.” 이렇게 일러줬어요.
왜냐하면 이 암살자를 보낸 사람은 이것이 탄로 나지 않기 위해서 부처님을 죽이고 나오면 두 사람을 시켜서 이 사람을 죽이고, 또 4사람을 시켜서 또 2사람을 죽이고, 또 8사람을 시켜서 4사람을 죽이고, 이렇게 해서 증거인멸을 하려고 했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 분을 뒷길로 가도록 해서 살려주셨단 말이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비심이다.
이렇게 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하고 한 이불 밑에 사는 남편이야
좀 늦게 온다 해도 용서해줄 수 있지 않아요?
나하고 한 이불 밑에 사는 아내야
좀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낳아준 내 부모님이 이러저러한 잔소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냐.
내가 낳은 자식이 내 말 좀 안 듣는다 하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냐.
이렇게 까지 하신 부처님의 제자라면 이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아이고, 저는 거기까지는 못해도 내 남편한테, 내 아내한테, 내 부모한테, 내 자식한테 요 정도는 하겠습니다.”
이래야 이게 우리가 부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데서 우리가 내가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같은 나라에 사는 다른 민족도 아니고, 다른 인종도 아니고,
경상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을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을
여당은 야당을 야당은 여당을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을 북한 사람은 남한 사람을
이 정도는 서로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불자라면 말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이 뭐겠느냐 이거야.
오늘날 우리 불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저도 포함해서 수준이 좀 문제요. 수준이.
이런 부처님의 제자답게 부처님처럼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정도는 그래도 흉내라도 좀 내어야 되기 않겠느냐,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에 귀의해서 깨달음을 얻은 이 번뇌가 사라지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세상 사람이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데,
우리가 세속에서 추구하는 그런 복을 구하고 살기 때문에
아무리 경전을 많이 알고, 수행 경력이 많다 해도
세상 사람이 볼 때, “아이고 뭐 거제 불자이가.” 그런 소리 듣기 십상이다.
도무지 세상 사람과 차이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도 그대로 있고,
지위에 대한 욕심도 그대도 있고,
명예에 대한 욕심도 그대로 있고,
몸에 대한 집착도 그냥 있고 그러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도 아직도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은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러지 못한 자신을 보고 좌절해도 안 되고,
‘뭐 인생이 그렇지 별거가?’ 이렇게 포기해도 안 된다.
바로 이런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의 삶을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 두고,
그러지 못한 이 현실로부터 한발 한발 나아가야 된다.
바로 이 스님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스님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이 아까운 재물을 두고 출가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랬지만,
그러나 아들의 법문을 듣고 깨닫고는
오히려 900의 도적이 감동하는 이런 기적을 일으켰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불자들이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절을 많이 짓고, 이것도 물론 중요하지마는
이런 것으로 포교를 해서 다른 종교와 세력다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인생이 바뀌는 그런 것을 보여줌으로 해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감동을 해서
불법에 귀의하는 이런 포교를 해보면 어떨까?
그럴 때 다른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자선단체 수가 적다든지, 절이 시내에 없다든지, 이런 문제로 위축될 필요도 없다.
도무지 상대편과 상관없이 내 길은 내가 간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당당히 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자세로 불법을 널리 홍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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