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인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서 지혜가 가장 뛰어난 제자를 사리불 존자라고 합니다.
이 사리불 존자에 관계되는 얘기인데요, 사리불 존자께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이기 때문에 번뇌가 다 한 분입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없고, 마음속에 성냄이 없고, 마음속에 어리석음이 없어졌습니다.
즉, 탐진치 삼독이 다 소멸된 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리불 존자를 존경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사리불 존자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이런 말들이 돌게 되니까, 한 남자가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화를 안 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 사람이 아직 화날 만한 어떤 경우를 당하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사람이 어려운 경우에 닥치게 되면 누구나 다 화를 내게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고 논쟁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한 사람은 사리불 존자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는다.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없다.
이렇게 논쟁을 하다가 실험을 해보자. 내가 한번 건드려 보겠다.
이렇게 해서 사리불 존자가 걸식을 하러 가는데, 탁발을 하러 가는데 이 사람이 뒤따라가서 등 뒤에다가 주먹으로 아주 내리쳐버렸어요. ‘쿵’하고 아주 고꾸라질 정도로 크게 내리쳐버렸단 말이오.
그런데 사리불 존자가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러면서는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이 휘청하고 허리가 굽었다가 다시 일어나서는 가버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사리불 존자를 해친 이 사람이 너무너무 부끄러운 거요.
자기가 생각할 땐 이렇게 하면 누구나 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정말 화를 안내고 그냥 가신단 말이오.
그래서 이 분이 사리불 존자 앞에 가서 용서를 비는 거요.
“제가 존자를 때렸습니다.”
사리불 존자가 “그런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예, 용서해드리리다.”
...
존경스러우니까 저희 집에서 대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리불 존자를 그 집으로 초대해서 공양을 접대를 했어요.
그런데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본 거요.
본 사람이 너무너무 분개한 거요.
그 훌륭하신 존자님을 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했다. 그렇기 해서 그 집에 가서 기다리는 거요. 때려주려고.
그런데 존자가 식사를 끝내고 집을 나올 때 이 사람이 사리불 존자를 존경해서 바루를 들고 뒤따라 나온 거요. 때려주려고 보니까 사리불 존자의 바루를 들고 있는 거요. 그래서 때릴 수가 없는 거요.
그래서 사람들이
“사리불 존자님, 바루를 받으십시오.”
“왜 그런가?”
“저 사람이 사리불 존자를 때렸습니다. 저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절대로 용서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존자의 바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루를 돌려받으십시오. 그럼 저희가 혼내주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리불 존자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때린 건 사실이오. 그는 나를 때렸고 그리고 그는 나에게 용서를 빌었고, 나는 그를 용서해줬소. 그런데 왜 당신들이 난리오.”
그가 나를 때렸고, 그가 나에게 용서를 청했고, 나는 그를 용서해주었고, 그런데 왜 당신들이 문제냐는 거요.
당신들은 때린 사람도 아니고, 당신들은 맞은 사람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아닌가. 맞은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당신들이 난리냐는 거요.
이렇게 말하니까 씩씩대던 사람들이 할 말이 없잖아요. ‘내가 괜찮다는데 왜 당신들이 난리오.’ 그러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돌아갔어요.
그러나 그 분들이 생각할 때 이 일은 나쁘다. 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리불 존자는 그 사람한테 무단히 맞고도 그 사람을 용서해주고, 그 사람 집에 가서 밥까지 얻어 드셨다. 바보다 이거지. 그러나 우리는 용서해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다른 스님들에게 알리고, 결국은 부처님께 까지 알려지게 된 거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존자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했기 때문에, 마음속에 아무런 번뇌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존자는 능히 그럴만하다.’
이렇게 판정을 하시면서 이렇게 두 편의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누구건, 수행자를 때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한 수행자를 때린 자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된다./
꼭 수행자가 아니라도 누구든 다른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 이건 다 동의를 하죠.
두 번째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을 때렸다고 그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된다.
/수행자를 때린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잘한 일이 아니다. 이거야.
/더욱 부끄러운 것은 자기를 때린 자에게 성내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유 없이 때릴 때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는 아니겠죠. 자기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어서 하겠지마는, 옆에서 볼 때는 이유 없이 남을 해치거나 때리는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하찮은 사람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때렸다. 그 사람이 나에게 성을 냈다. 이럴 때는 나도 보복을 해야 되지 않느냐. 그가 나를 때리니 내 마땅히 그를 때릴 수밖에 없다.
그가 나에게 성을 내니 나또한 성을 내는 건 당연하다.
즉, 남을 때리거나 남에게 성내지 마라 하는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가 나를 때리거나 그가 나에게 성을 낼 때는 나는 그를 때릴 수 있고, 그에게 성을 내는 게 당연하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이걸 뭐라고 그래요? 정당방위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래서도 안 된다.
그가 나를 때리더라도 나는 그를 때려서는 안 되며
그가 나에게 성을 내더라도 나는 그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수행자다.
이것을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마라.
원수를 원수로 갚게 되면 원한이 끝나지 않는다.
남을 때리지 않고 남에게 성내지 않는 것,
이것도 세상에서 어렵다고 말합니다.
남이 나를 때릴 때 내가 그를 때리지 않고,
남이 나에게 욕을 할 때 나또한 그에게 성내고 욕하지 않기는
이 세상에는 더더욱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에 원한이 사라지고, 성냄이 사라지고, 폭력이 사라지게 된다.
언제나 이 세상의 폭력은 폭력이 폭력을 낳고
화가 화를 불러오고, 욕설이 욕설을 동반하고 이러죠.
이런데서 우리가 이러한 피해를 입었을 때도 그것을 보복하지 않는 것,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인욕이다. 이렇게 말해요.
참을 것이 없는 경지까지 가면 인욕바라밀이다. 이렇게 부릅니다.
부처님은 과거생에 인욕바라밀이라고 인욕선인이라고 알려졌죠.
부처님은 과거생에 인욕선인으로 불렸다. 왜 그런가? 인욕바라밀행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진 전생얘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과거생에 한 나라의 왕으로 태어나서 아주 평화롭게 살았지마는 부처님의 이 법을 알게 되고, 수행정진해서 해탈을 하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고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숲속에서 아주 깊이 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수행자가 정진하던 그 나라, 아마 자신이 태어났던 나라하고 다른 나라였던 가봐요.
그 나라의 왕이 부하들과 시녀들을 데리고 이 수행자가 수행하는 숲속에 사냥을 나왔어요.
그래서 말을 타고 사냥을 하고 이렇게 하고는 술 먹고 식사를 하고 이러니까 피곤하니까 봄날에. 잠이 들었어요.
시녀들은 늘 왕곁에서 왕을 보살펴야 한단 말이오.
그리고 왕에 대해서 언제나 눈을 딴 데로 돌리면 안 되잖아요. 충성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왕이 잠들었으니까, 잠든 사람을 보고 있는 건 심심하잖아.
긴장이 풀렸어. 긴장이 풀리니까 잠든 왕을 두고 산에 꽃도 예쁘고 피어있고 하니까 주위를 바깥으로 돌리기 시작한 거요.
그래서 점점점점 왕으로부터 멀어진 거요.
그러다가 그녀들은 숲속에서 정진하는 한 수행자를 발견한 거요.
너무나 고요히 명상을 하고 있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존경스럽단 말이오.
그래서 그녀들이 꺾은 그 꽃을 그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린 거요.
그러면서 그 수행자로부터 범문을 들은 거요. 그 법문이 너무너무 좋아서 한마디로 혼이 빠진 사람처럼 집중해서 법문을 듣고 있었던 거요.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몰랐던 거요.
그런데 한참이 지나자 왕이 잠에서 깬 거요.
잠에서 깨어서 보니까 항상 잠에서 깨면 바로 자기 주위에
‘일어나셨습니까?’ ‘얼굴 닦으시지요.’ ‘손 씻으시죠. 드시지요.’ 이렇게 항상 옆에 시녀가 있었던 말이오.
그런데 눈을 딱 떴는데 아무도 없는 거요.
그러니까 마음이 불안하기 시작한 거요.
왕은 권력의 정점에 있지마는 이때의 심리는 어린아이와 똑같습니다.
어린아이가 눈을 딱 떴을 때 엄마가 있어야 되는데, 엄마가 없으면 아이들은 두려움에 울죠.
아이들이 자다가 눈떠서 엄마 없으면 웁니다. 그러니까 보호받는 사람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아무도 없는 거요. 그러니까 한편으론 화가 나는 거요.
‘이것들이 나를 두고 어디 갔나.’ 이렇게 화가 난 거요.
그렇게 해서 둘러보니까 저 숲속 저쪽에서 자신의 시녀들이 어떤 남자를 가운데 두고 뺑 둘러앉아서는 혼 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화가 솟은 거요.
‘저 놈이 내 여자를 뺏어갔다.’ 그렇게 해서는 칼을 빼들고 가서는
“이 나쁜 놈, 왜 남의 여자를 뺏어났느냐?” 이러게 얘기한 거요.
그러니까 이 수행자가
“나는 당신의 여인을 뺏어간 적이 없소.”
“어, 이 놈이 거짓말 하는 거 봐라. 네가 이렇게 이 여인들을 유혹해서 이 곳에 묶어두지 않았냐.”
“내 마음속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소. 애욕도 탐욕도 진심도, 나는 이미 그런 것을 건넌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이 분들이 나에게 공양을 올리고 법을 청하였기에 나는 법을 설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기분이 딱 나빠진 거요.
“뭐라고?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어떻게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수 있냐, 이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애욕이 없을 수 있냐.”
“없습니다.”
“이 거짓말 하는 놈 봐라.”
“애욕만 없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아무런 성냄도 없습니다.”
“뭐? 화를 내지 않는다고? 성을 내지 않는다고?”
이러면서 칼을 가지고 귀를 탁 베어버린 거요.
“너 이놈, 이래도 성내지 않느냐?”
“저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지금 사리붓다에게 한 이 사람은 사리불을 해쳤다고 사리불이 화를 내지 않으니까 오히려 감복해서 제자가 되었는데, 이 왕은 묘한 권위와 질투심 때문에 이 수행자가 자기에게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도전한다. 이렇게 생각한 거요.
그러니까 그걸 굴복시키고 싶으니까 다른 귀를 또 잘랐어요.
“너 이래도 화가 않나느냐?”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코를 자른 거요.
“너 이놈, 이래도?”
이러면서 미친 듯이 왼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이렇게 한 거요.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니죠.
‘이것이 자기에게 도전하고 자기에게 저항한다. 감히 나한테.’
이렇게 생각이 미쳐 버리니까, 칼로 마디마디 자르고 베고, 이렇게 난리를 피운 거요.
이랬을 때도 수행자는 그 왕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었다.
이게 금강경에 나오는 뭐에요?
가리왕의 할절. 신체, 내 몸을 할절, 자르고 베고 할 때라도 나는 아무런 원망이 없었습니다. 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이렇게 되기는 참으로 어렵죠.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수행정진을 해나간다면, 이런 경우까지라도 부처님께서는 미워함이 없고 성냄이 없고 화를 내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가만히 있는 상대를 보고 내가 먼저 화내는 것은 하지 말아야 되겠다.
가만히 있는 아이를 보고 내 맘에 안 든다고 때리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한 발 나아가서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 친구가 나에게 먼저 짜증을 내더라도 내가 맞받아서 짜증은 내지 말아야 되겠다.
설령 그가 어쩌다가 나를 때렸다고 하더라도 맞받아서 때리지는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우리가 부처님을 목표고 정해놓고 그건 안 되더라도 그 10분의 1이라도 한번 해보자.
이렇게 우리가 해나간다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그가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데도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그가 나를 때리지도 않았는데도 내 맘에 안 든다고 때리고
이런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이런 일부터 먼저 극복을 하자.
그리고 나아가서는 상대가 그럴 때도
나는 그러지 않는 것을 한번 해보자.
이렇게 실수하면 다시 해보고, 안 되면 또 해보고
그럴 때 우리가 늘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을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할 때도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이 없었다는데 나는 이 정도야
사리불 존자는 가만히 있는데도 등을 쳐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용서해줬다는데
내가 당한 이 경우는 그렇게 까지는 되지 않지 않느냐.
이렇게 우리가 자꾸 돌아보면서 정진을 해간다면 우리도 그런 경지로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 불자들은 좀 틀린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하기가 부끄러운 것은 불자는 고사하고 우리 스님들마저도 이렇게 안 돼서, 자기 마음에 안 들고 자기 생각에 틀리고, 자기 이익에 위배된다고 폭력을 휘두르고 욕설을 하고 이런 일이 있었죠.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까지 있어서 많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인간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 하고, 또 이것을 앞으로는 극복을 해야 한다.
이것은 뛰어 넘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불교다운, 그런 맛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다.
그래서 “왜 당신은 안 되면서 우리에게 하라고 그러느냐”이렇게 하지 말고
‘모든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가 이렇게 한번 해보자.’
이런 목표를 지어서 함께 해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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