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처님의 말씀을 얘기할 때는 꼭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부처님의 전생얘기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인격이 6년의 수행생활 가지고 있을 수 있겠느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짧은 수행생활을 거쳐서 저렇게 훌륭한 인격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니 비록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생의 것밖에 아니지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 바로 전생의 수많은 공덕을 짓고,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저렇게 위대한 인물이 출현할 수 있었다.
이런데서 부처님의 전생 얘기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부처님의 전생 얘기에 대한 기록을 우리가 자카타, 이렇게 부르죠.
본생다음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자카타에는 547가지의 전생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547번 윤회했느냐, 이런 얘기가 아니고,수많은 얘기가 있겠지마는 현재 남아 있는 얘기가 547개가 남아있다.
그 전생 얘기는 대부분 다 부처를 이루기 이전에 보디사트바, 보살로 수행할 때에 중생을 위해서 한없는 희생과 봉사, 그리고 끊임없는 정진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생에 부처님으로 출현하시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부처님의 전생얘기 가운데어서 오늘은 한 얘기를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과거생에 보디사트바로 활동을 할 때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사슴의 왕으로 태어나신 적이 있습니다.
사슴의 왕으로 태어나서 수많은 사슴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임금이 사슴고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임금은 매일매일 활을 가지고 동산으로 가서 사슴을 한 마리 잡아서 그 고기로 하루의 요기를 했다.
이렇게 되다보니까
사슴들은 매일 아침마다 그 왕이 사냥을 하는데 있어서 놀라서 서로 피해서 이리뛰고 저리뛰다 보니까, 화살에 맞아 죽는 사슴이 한 마리라면
다쳐서 죽는 사슴, 또 다친 사슴이 수십 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늘 매일 아침마다 초조와 불안 속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날을 보내면서 사슴들의 생활이 초조하고 불안하니까,
이 지혜로운 사슴의 왕은 서로 의논을 해서 이렇게 매일매일 사슴 한 마리가 어차피 사슴에 맞아 죽을 바에야 우리가 순서를 정해서 매일매일 한 마리씩 임금의 요리사에게로가서 죽는다면,
임금도 수고로히 화살을 쏘아서 사슴을 잡을 필요가 없고,
또 사슴들도 어차피 하루에 한 마리씩은 죽으니까, 차례대로 순서를 정해서 죽는다면 그 순번에 해당되지 않는 사슴들은 놀라지도 않고 나머지 날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지 않느냐.
또 수많은 사슴들이 다치는 이런 불상사는 겪지 않아도 되느냐.
이런데서 사슴들이 의논을 해서 다 좋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슴왕은 임금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을 전했고, 임금도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슴동산에 사는 사슴들은 평화를 얻었습니다.
순번을 정해서 매일매일 한 마리씩 임금의 요리사에게로 가서 스스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런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바로 자신의 순번이 된 암사슴이 임금의 요리사에게로 가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계속 울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슴왕이 왜 그런지 사유를 물었더니 이 암사슴이 하는 말이
“내가 순번이 되어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지금 내 배에 아기 사슴을 가지고 있는데, 며칠만 시간 여유를 준다면 이 아기 사슴을 낳고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두 목숨이 한꺼번에 죽지 않고 나만 죽고 새끼는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순번이 지금 나에게 이르러서 나뿐만 아니라 새끼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너무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프다.”
이렇게 자기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 이 사슴왕은 자신도 또한 그 어미사슴처럼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사슴왕이 그 어미 사슴에게
“알겠습니다. 그러면 새끼를 낳고 당신 차례를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순번을 면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렇게 되면, 그러면 다음 순번이 누구냐?
하루 당겨서 순번대로 나가라.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한 사람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진다.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모순이 있기 때문에 바로 사슴왕은 그 암사슴 대신 자기가 순번이 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면 자기희생을 통해서 그 암사슴을 구하고, 그 사슴동산에 있는 아무 다른 사슴도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임금의 요리사에게 갔더니 임금의 요리사가 사슴왕이 온 것을 보고 임금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나와서 보니까, 정말 황금빛 나는 사슴왕이 요리사 앞으로 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임금이 물었어요.
“왜 네가 왔느냐?” 이렇게 말했더니 이 사슴왕이 자초지정을 얘기했던 거예요.
그 얘기를 다 들으니 임금이 생각하기를
“짐승이지만 정말 갸륵하다. 사람도 이런 사람이 없는데, 어찌 짐승이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런데서 임금님이 너무너무 감동을 해서
“알았다. 오늘 내가 사슴고기를 먹기 않고 보내겠다. 그러니 사슴왕을 살려주어라.”
이렇게 해서 사슴왕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을 각오를 했다가 바로 죽으려고 한 것이 곧 사는 길이 되어서 살아났을 때, 이것만해도 참 훌륭한 일이죠.
그래서 고맙습니다 하고 와야 될 텐데, 사슴왕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임금님, 저에게 한 가지 건의사항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저는 오늘 임금의 은혜로 이렇게 목숨을 구했지마는 내일 또 다른 사슴들은 이런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던 거요.
그러니까 오늘 당신의 은혜로 나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에 고마운 일이지만, 또 내일 매일매일아침에 이런 고통이 우리 사슴들에게는 진행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목숨이 살았는데 다른 사슴들의 목숨까지 걱정한 거죠.
그러니까 임금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그래.
“아, 갸륵하다. 한 마리의 새끼를 밴 어미사슴만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고, 제 동족 전체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구나. 정말 갸륵하구나.
그래, 좋다, 그러면 내가 네 동족을 전부 살려주마. 앞으로 나는 사슴 고기를 먹지 않겠다.”
그래서 사슴에 대해서 누구도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내가 엄명을 내리겠다.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사슴왕은 아직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생각할 때, 왜 기뻐하지 않느냐. 이만하면 네가 기뻐하지 할 만하지 않는가.
그랬더니 사슴왕이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사슴고기를 먹지 않으신다면 필히 사슴고기 대신 다른 고기를 드실 거 아닙니까.”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염소고기든 다른 고기를 드실 거 아니냐.
“그러니 오늘 임금님의 은혜로 이렇게 사슴들은 목숨을 구하고 평화를 얻었지마는, 숲속에 있는 다른 짐승들은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되지 않습니까.”
임금이 생각하니 그 맞는 얘기요.
그래서 “이야, 짐승이지마는 제 동족을 넘어서서 뭇생명들을 사랑하구나.”
그렇게 해서 “좋다. 그러면 내가 짐승들에 대한 사냥을 금하겠다.”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또 사슴왕이 말했습니다.
“임금님이시여, 오늘 숲속에 있는 기는 짐승들은 임금님의 은혜로 평화를 얻지만 저 날짐승들은 어찌합니까?”
다시 말하면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결국은 닭이나 새나 이런 조류들의 고기를 먹지 않겠느냐.
그래서 임금이
“좋다.”
그래서 새에 대한 사냥도 금지시켰어요.
그러자 사슴왕은 또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육지와 하늘에 있는 짐승들은 평화를 얻었지만 저 물속에 있는 짐승들, 즉 물고기들은 어찌합니까?”
그때야 임금은
“그래, 네 말이 옳다. 내가 앞으로 일체 사냥을 하지 않고, 모든 생명들을 살려주겠노라. 일체의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
이렇게 해서 전국방방곡곡에 사냥을 금지시키고 임금님 스스로 육식을 금했다.
이렇게 해서 사슴왕은 매우 기뻐했다.
바로 이 사슴왕이 부처님의 전생이다. 이런 얘기에요.
우리는 이 얘기가 사실이든,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설화든 그것의 진실여부보다도 바로 이러한 사슴왕의 마음, 이것이 보디사트바, 보살의 마음이고, 이 마음이 완성된 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다.
바로 부처님은 이렇게
일체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그 고통을 대신하고, 근원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어떠냐?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그런 행복을 우리가 추구한다.
프라세나짓왕에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타인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는다. 이렇게 표현을 하죠.
오늘 나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동반하고 있다.
오늘 나의 승리는
다른 사람의 패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부유함은
다른 사람의 가난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항상 다른 사람의 고통과 근거해서 바로 나의 행복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날 이 경쟁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다.
이렇게 말하죠.
그러나 오늘 우리가 승리했다고 기뻐할 때,
그때 누군가는 패배했다고 괴로워하는 것이 늘 그 이면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 또한 승리해서 기뻐할 때,
내가 패배해서 괴로워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승리와 패배가
괴로움과 즐거움이
늘 이렇게 시소가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뒤바뀌면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을 윤회의 사슬이다. 이렇게 부릅니다.
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오늘 기쁘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고통과 눈물에 딛고 서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뒤 바뀌게 되면 나에게 또한 고통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타인의 고통에 딛고 서 있지 않는 행복
바로 타인을 행복하게 함으로 해서 나도 행복한 인생
이것이 부처님이 가르치고 불교가 추구하는 행복이다.
이런 행복을 니르바나, 열반이라고 부른다.
이런 고락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자유
이것을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사슴왕이 추구하는 게 그렇죠.
우리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타인을 죽음에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데,
사슴왕은 아기 밴 사슴, 다른 사슴의 고통을 자기가 대신 짊어졌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가 대신 짊어진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바로 구조적으로, 근원적으로 이 세상은 고통위에 살 수 밖에 없다.
임금이 사슴 고기를 좋아하는 한, 어떤 사슴도 희생될 수밖에 없고
임금이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기를 먹는 한은
사슴 고기가 아니면 다른 짐승의 고기가.
또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면 다른 조류의 고기가
조류가 아니라면 어류의 고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이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이 되려면 바로 사냥을 하지 않아야 된다.
사냥을 하지 않으려면 육식을 행하지 않을 때만이 사냥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바로 그러한 답을 추구하는 것,
그런 고통의 뿌리, 근원을 해결해 나가는 것,
이것이 보살의 길이고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훈을 보면서 불교가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한다.
세상의 문제를 외면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된 불교, 왜곡된 불교의 모습이지,
경전에 기록되어 있고, 경전에서 우리에게 끝없이 가르치려고 하는 그 가르침은 아니다.
그 가르침에는 바로 이런 사슴왕이
바로 부처님의 전생으로, 그리고 수행자의 어떤 이상적 표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거죠.
이런 데서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희생해서 바로 타인의 행복을 구하는,
바로 그럴 때 자신도 살 수 있는, 자신의 행복이 얻어진다는
이런 것을 불교 용어로 뭐라고 합니까?
자리이타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하나라는 거죠.
다른 측면에서 상구보리하고 하와중생한다.
위로 보리를 구하고
즉, 깨달음을 얻는 그 구도적인 행위와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중생교화의 길이 둘이 아니다.
그런데서 부처님의 45년간의 그 일생은 수행자의 길이면서 동시에 중생을 구제하는 그런 구세주의 길이다.
즉, 구도자의 길이기도 하고, 구세자의 길이기도 하다.
이런데서 부처님은 우리 중생의 구원자다 이렇게 볼 수도 있죠.
또 부처님은 끊임없이 도를 구하는 구도자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것이 분리되어 있다.
구원자로서의 부처님, 이런 측면에서
부처님께 매달리고 빌고 복을 구하는 그런 범위에 멈추고,
우리도 부처님 같이 되겠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겠다고 하는
부처님의 인격에 대한 흠모, 그 가르침의 추종, 이런 것은 없어지고,
오직 나의 고통을 하소연하고,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이런 보통 종교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어떤 기복불교 또는 구원의 불교. 이런 쪽에 치우쳐있다면
또 다른 쪽은 부처님의 그 구도의 길만을 바라보고
세상을 외면하고 오직 스스로 깨달음의 길로 들겠다라고 하는
그 분야만이 너무 지나치게 특화되어서 세상 문제에 무관심하다. 이런 얘기에요.
우리가 세상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욕망, 그리고 그런 어떤 진심, 어리석음,
탐진치 삼독을 떠나라는 얘기죠.
또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어떤 집착도 버려라.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아끼고 하라는 것은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더욱더 가지고,
중생을 보살피는 그런 마음으로 내라.
이런데서 우리는 세상을 떠나라 하는 것을
세상을 외면하는 것으로 잘못해석하거나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사랑을 보이신 부처님의 구원의 행각이
오히려 세상의 이익과 결합하는, 세상에 뒤섞여서 속화되는
이런 과정과 혼동되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았느냐.
그런데서 오늘 우리 불자들은
이제 우리가 부처님의 원 가르침, 본래의 가르침에 귀의해서
세상에 그러한 재물과 그리고 권력과 그리고 명예,
이런 것으로부터는 좀 더 초연한,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
그러므로 해서 청빈한, 수도자다운, 그런 모습을 우리들이 가지면서도
또 세상에서 뒤처지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능력이 없거나 또는 어떤 경쟁면에서 떨어진 그런 사람들을 보살피는 마음
또 어리석음에 의해서 고통받는 사람을 근원적으로 깨우쳐서
바로 해탈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이런 어떤 전법의 길,
이런 것들을 우리들은 굳건히 나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서 이 사슴왕으로 상징되는 그러한 수행자의 모습을
오늘 우리들이 재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혼란이 있습니다.
미국과 북한간의 갈등, 그리고 남북간의 갈등,
그 문제를 둘러싼 남남간의 갈등,
이런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주변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이럴 때 이런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을까
그런데서 한반도 주변을 평화롭게 하는 일,
그로 인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사슴왕이 뭇 생명들이 근원적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길을 추구한 것과 같지 않겠느냐.
그런데서 우리 불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말고
세상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직시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중생들을 복되게 하는
그런 일에 조금씩 참여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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