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큰마음을 내어서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었는데도, 실제로는 수행생활을 제대로 못한 그런 경우가 부처님 당시에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내용을 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쉬라바스티의 안 부잣집 아들이 출가를 했어요.
부처님 법문을 들으니 너무너무 좋다고 자기도 출가를 했는데
재산이 많다보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출가를 했냐하면
자기 집에 있는 재산을 가지고 절을 하나 잘 지었어요.
그리고 절 안에 식사를 아주 맛있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도 잘 꾸려놓고,
다시 말하면 절을 잘 지었는데, 그 절이 세상의 아파트나 고급주택보다 더 잘 지어놓고 그렇게 출가를 했어요.
모양은 스님 모양을 하고, 승복도 입고, 정사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이 사람이 먹는 것은 아주 음식 만드는 분이 해주는 좋은 음식을 먹고,
자는 집도 아주 세상에 살 때와 다름없는 그런 집에서 살고,
옷도 모양만 다르지 아주 고급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이렇게 수행자로서 살았어요.
그런데 이런 걸 보고 자기도 수행자다 이러고 있으니까, 도반들이 몇 번 조언을 해도 안 들으니까, 부처님께 가서 말씀을 드렸어요.
부처님이 이 비구를 불렀어.
“너는 어떻게 생활을 하느냐?”
“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서 절을 하나 잘 지어놓고 시설을 잘 갖추어놓고 좋은 곳에서 저는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를 나무라셨어.
“나의 제자는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먹는 것? 아주 몸을 유지하는 최소한도의 음식만 먹고
입는 것? 그거 몸을 가릴 수 있는 한 벌의 옷만 입고
자는 것? 눈만 붙이고 자면 되기 때문에 나무 아래나 빈집이나 숲속이나 동굴이나 이런데서 자면 된다.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바로 남이 주는 대로 얻어먹고, 걸식을 하고, 또 설령 가끔 초청을 받으면 초청에 응하고.
또 옷은 가능하면 버려진 옷을 주워 입고, 그러나 버려진 옷이 없을 때는 새 옷을 보시 받아 입어도 좋다.
또 자는 것은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자야 되지만, 또 초대받아서 빈집 같은데 있다면 처마 밑에서 자도 된다.
아무튼 수행자는
이런 의식주에 집착하지 않고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해야 되는데
너는 어찌하여 출가를 했다 하면서 그렇게 속가의 재산을 가져와서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를 세속사람보다 더 부유하게 행하면서 나의 제자라고 하느냐?”
이렇게 나무랐어.
그랬더니 이 분이
“아이고 부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선 자기가 입고 있던 좋은 옷을 벗었어.
그러니까 제가 이제 이런 부유한 생활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선 입고 있던 옷부터 벗었어.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나의 제자는 이 좋은 옷 한 벌 이거 벗는다고
예를 든다면 잘 지은 집에서 내가 나온다고, 그렇지 않으면 부드러운 음식을 앞으로 안 먹는다고 그러면 훌륭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꾸중을 듣고는
“알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제가 좋은 옷 벗고, 다 떨어진 옷 입고 있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집에 안자고 나무 밑에서 자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집에서 밥 안 먹고 길거리가서 얻어먹겠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그러면 훌륭한 수행자냐?
그것 또한 아니다.
훌륭한 수행자라는 것은
마음속에 탐진치 3독을 버려야 훌륭한 수행자이지
겉모양을 갖고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가 없다는 거요.
쉽게 얘기하면 겉모양을 세상처럼 해도 훌륭한 수행자가 아니고,
겉모양만 뭔가 바꿔도 안 된다.
그 당시에 겉모양을 바꿔서 수행자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 있었어요?
첫째 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나는 무소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실오라기 한 올 안 걸친 사람들도 있죠.
그렇다고 저 사람은 “야, 정말 무소유구나”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바깥에 옷을 입었냐? 안 입었냐? 이게 핵심이 아니고
마음속에 탐욕이 사라졌나, 안 사라졌나?
이게 핵심이다.
그런데 마음속에 탐욕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들이
좋은 옷만 맨날 뽑아 입고 다니겠어요?
그건 아니겠죠.
설령 다 떨어진 옷을 입거나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 탐욕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것 또한 수행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발가벗음도 아니요, 머리를 헝클어뜨림도 아니다.”
당시 수행자중에는 머리에 손을 안대고 완전히 귀신처럼 헝클어뜨려놓습니다.
그러면 그것만 보고도 ‘야, 저 사람은 수행자구나.’
요즘 같으면 우리 머리를 빡빡 깎아도 수행자라지만 머리를 길게 해놔도 뭐 같아요? 도인 같죠.
‘오, 도사구나.’
모양만 보면 알 수 있잖아.
“진흙으로 몸을 바름도 아니오.”
그 당시에 수행자는 진흙으로 온 몸을 발라서 공부하는 그런 사람도 있었어요.
굶는 것도 아니다.
우리고 수행자는 50일 굶었다. 얼마 굶었다. 그 사람 밥 안 먹고 산다더라. 그 사람 물만 먹고 산다더라. 그 사람 소금 안 먹고 산다더라.
이러면 벌써 ‘와, 굉장히 수행자다.’ 이런 생각이 있잖아. 그죠.
그런 것도 아니다.
“흙바닥에 잠자는 것도 아니다.”
그는 절대로 편안하기 위해서 침대나 이런 데 안자고 흙바닥에 그냥 잔다.
그렇지 않으면 등허리를 땅에 안 붙인다.
잠을 안 잔다.
그런다고 수행자가 아니다.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앉아서 노력만 하는 것도 아니니,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는 남을 청정케 할 수가 없다.”
즉, 마음속에 번뇌가 있는 한
청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만약에 하루 한 끼만 먹고 다 떨어진 옷 한 벌만 입고, 아주 피를 가리는 수준에서 잠잔다고 훌륭한 수행자라면 둥게스리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마을 사람들은 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다 훌륭한 수행자들이에요.
왜냐하면 그 동네 가보면 다수가 옷은 정말 다 떨어진 한 벌 밖에 없습니다.
살림 도구?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비 피하는 처마만 있지, 벽도 없어요.
그런 집에 사는 사람 많아요.
그리고 밥은 늘 식사량이 부족해서 하루 한 끼도 겨우 얻어먹고 살아요.
그래서 빼빼하게 이렇게 살죠.
그러니까 모양만 가지면 그 보다 더한 수행자는 없습니다. 그죠?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수행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속에는 욕심이 많습니다.
갖고 싶은데 못 가져서 그렇게 살고 있는 거요.
갖고 싶은데 못 가져서 그렇게 살면 이건 뭐에요? 극빈자에요.
그래서 그걸 극빈자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능히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으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삼가서 적게 먹고,
능히 옷을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삼가서 한 벌의 옷을 입고 살고
잠자려면 능히 넓은 방에 잘 수 있지만 스스로 삼가서 작은 방에서 살면서
검소하게 생활한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 극빈자라고 그럽니까? 뭐라고 그래요? 청빈하다 그래요.
청빈하다.
가난은 똑같은데
앞에 것은 깨끗한 가난, 이렇게 불러요.
수행자는 청빈자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가는 거요.
마음속에 탐심을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생활하는 거요.
그런데 마음에 욕심은 가득한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억지로 그렇게 살면
이건 극빈자이지 청정한 수행자가 아니다.
그러면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욕심을 마음껏 누린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수행자가 아니다.
그런데서 비구가 그런 모양만 스님모양으로 했지
세속적인 그런 욕심에 근거한 안락한 생활을 추구했을 때 수행자가 아니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가 옷을 벗어서 모양을 바꾸려고 하니까
그렇게 모양만 바꾼다고 또한 청정한 수행자가 아니다.
마음속에 번뇌가 사라져야
그것이 청정한 수행자다.
마음속의 번뇌가 사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재물이 없어도 정진하기 좋고
재물이 많으면 보시할 수 있어서 좋고
지위가 없이 남의 구박을 받으면 인욕하기 좋고
지위가 높으면 세상을 이롭게 하기가 좋다.
사람들이 나를 욕하게 되면 인욕하기 좋죠.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따라주면
내가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하는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러니까 도무지 있고 없음에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그런데 여기 극단은 어떤 거냐? 있어야 된다고만 주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없어야 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극단에 속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생활을 보면 이런 세속적인 복락을 구하는 것을 불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불행하게도 오늘날 출가한 스님들이 출가한 승려의 모습만 가지고 있지, 그 생활하는 호화판의 정도가 세상 사람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도 우리는 부처님 법에 어긋난다.
그러면 반대로 그 생활모양만 갖고
움막을 쳐놓고 삐쩍 말라서 한 끼 밥만 먹으면 훌륭한 수행자냐,
그렇게 또 말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의 마음속이 어떠냐?
탐진치가 있느냐? 없느냐? 얼마나 적으냐?
그리고 그의 말이 어떠냐?
그가 부드럽고 자비롭게 말을 쓰느냐? 악담을 하고 욕설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의 행동이 남을 해치고 남을 손해 끼치는 행동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는가,
이런 것들을 보고
우리는 훌륭한 수행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가름해야 된다.
또 부처님 당시에 이런 분도 계셨습니다.
어느 해 가뭄이 많이 들어서 대중들도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는 일이 생기는, 그런 기아상태였어요.
자기도 음식이 없어서 굶어죽을 정도인데, 하물며 남에게 음식을 접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스님들이 걸식하기가 어려워졌어요.
다시 말해서 주민들이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데 스님들이 어떻게 탁발을 제대로 하겠느냐, 이거요.
이렇게 되니까, 스님들이 다 비쩍 말라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한마디로 말하면 피골이 상접한 이런 상태가 되었어요, 그해 여름은.
그런데 일단은 몇 명 비구들이 안거가 끝난 뒤에 부처님과 대중들이 모인 그런 자리에서 아주 몸이 윤택이 있는 그런 건강한 몸을 갖고 5명이 참가한 거요.
그래서 다 전부 완전히 피골이 상접한 모습인데, 그 5명만 번들번들 한 거요.
부처님이 불러서 물었어.
“너희들은 어떻게 지내냐?”
“저희들도 안거를 잘 했습니다.”
“공양은 잘 받았느냐?
“잘 받았습니다.”
“올해 가뭄이 심한데 어떻게 잘 받았느냐?” 이렇게 하나하나 물어보니까
“예, 부처님. 저희들은 사람들이 좀 뭔가 일체를 탁 깨친 것처럼 하면 굉장히 공경을 하고, 우리 같은 수준에서 처음에는 밥을 잘 못 얻어먹어서 저희들도 아라한인척하고 장로인척하고 이렇게 행동을 했더니 대중이 공양을 잘해서 이렇게 이번 안거를 잘 지냈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
당시에 비구스님들은 아무튼 자기 행동이 글렀다 하더라도 부처님 앞에서 거짓말 하거나 이런 건 안하거든요.
사실대로 얘기를 하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들으시고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자기의 수행정도를 속이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거짓말이다.
그래서 도인인체 하는 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다.
깨닫지 못한 자가 깨달았다. 이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고 더 큰 과보는 없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게송으로 교화하셨어요.
“차라리 달구어진 뜨거운 쇳덩어리를 삼킬지언정
계행이 없어 신구의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신심있는 신자의 공양을 받을 수 있으랴.”
그러면서 이렇게 거짓 행동을 보여주고,
보시를 받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이나 마음을 위선으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절대로 해탈의 길에 들 수가 없다.
수채 굶어서 죽는 게 낫지
그렇게 한 끼의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거짓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교화를 하셨습니다.
또 이런 분들도 계셨어요.
5명의 비구였는데, 이 사람들은 탁발하기가 어려우니까, 땅을 좀 구해서 자기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그래서 농사를 지어서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밥을 해먹고, 이렇게 지냈는데
나중에 그 소문을 듣고 부처님께서 불러서 이렇게 계행을 어기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는 일체의 세상사를 버리고 들어와서 수행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재가신자들은
이 수행자의 최소한도의 의식주 생활을 위해서
그들에게 걸식을 할 때 공양을 접대하고
옷이 없으면 옷을 접대하고
나무 밑이나 또는 이런데서 자고
비가 올 때는 신자들이 처마 밑이나 빈방에서 잘 수 있도록 하는 거다.
수행자는 일체의 수입이 없기 때문에 보시에 의거해서 최소한도의 생활을 행하는 거다.
그러나 재가 신자는 남의 보시에 의해서 생활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자기가 노력해서 자기와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남는 것은 보시를 해야 된다.
이런 지침인데, 출가한 승려가 세속사람처럼 그렇게, 요즘 말하면 당시 농사라는 건 요즘 말로 절을 운영하기 위해서 장사를 하는 거요. 아시겠습니까?
수입을 만들기 위해서 장사를 하고, 뭘 경영을 하고, 사업을 하고 이렇게 했을 때,
여기에 부처님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는 다만 법을 전하고, 전공이 법이니까 법을 전하고
법을 스스로 닦고 전하고, 신도들에게 전법하고,
신도들은 그 법을 듣고 기뻐하고,
그래서 신도들은 자신이 행하는 재물 중에 일부를 보시하고,
이렇게 재보시와 법보시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가도록 되어있는데,
먹고 살기 좀 힘들다고 자기가 직접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오늘에 와서는 특히 우리 중국이나 한국에 들어와서는 선농일치라 해서 수도원이 보시에 의해서 생활하지 않고 자급자족시스템이 되어 있죠.
이런 데서는 여기에 대한 평가가 조금 다르지마는 남방불교에서는 절대로 스님들이 생산 활동, 돈을 버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절 안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먹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걸식을 하고, 그다음에 그런 보시에 의해서 생활을 하고, 대신 본인은 부지런히 정진해서 신자들을 위해서 좋은 설법을 하고 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된다.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오면서 중국문화에서는 걸식하는 것이 굉장히 나쁘게 인식이 되었죠.
그리고 또 많은 불교가 너무 지나친 부유한 사람들의 보시에 의해서 생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에 좀 비판적으로 스님들이 수행자라면 자기 수행에 전념해야지 권력이나 재물과 결탁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렇게 해서 그런 왕이나 대신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보시에 의하는 생활을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산속으로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검소하게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보시를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수도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 날 선불교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다보니까 거기에는 스스로 자급자족하지 않고는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이것이 부처님 계율에 어긋나는 요소도 또 있죠.
그래서 여기에 뭐가 나옵니까?
선농일치라는 말이 나오는 거요.
농사를 짓는 것이 형식만 보면 세속생활 같지만,
사실은 그때도 정진하는 이 본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수행자답다.
그래서 농사짓는 행위,
즉 일하는 행위가 그대로 마음 닦는 행위와 둘이 아닌 원리를 찾아낸 거죠.
이렇게 되면서 나중에는 백장선사의 가르침인 백장청규 같은 데서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항상 최소한도의 노동을 행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야 된다.
이것은 보시가 없는 상태 하에서의 수행자들의 생활원칙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서 오늘날 우리가 계율에 근거한다면
만약에 제가 승려로서 학교선생이 되거나 교수가 되거나 해서
어떤 법문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 하면
이것은 엄격하게 보면 수입 잡는 행위라면 계율에 어긋난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이것을 안 하면 되느냐?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
이 핵심은 수입을 잡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하지마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법을 설하고,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교육을 하는 거는 하되,
그 수입을 위해서 일을 하지 마라는 얘기죠.
그것이 사회시스템에서 들어오게 되면
그것을 보시로 계산을 하고,
바로 공익을 위해서 사용해 버린다면
그것은 하나의 직업적인 행위는 아니 된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잘못하면 수행자가 직업적 행위를 하기가 매우 쉽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전부 직업이 분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수행자는 세속생활을 떠난다 하는 것은
세속에서 떠난다, 산 속에 들어 가버린다 하는 의미가 아니라.
세속적인 이양을 추구하는 삶으로부터 떠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법을 할 때도
설법에 대한 어떤 대가를 받기 위해서 설법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법을 이익을 탐하는 수단으로 쓰기 때문에.
다만 설법을 할 뿐이다.
그것으로 끝나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설법을 했을 때, 보시를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어때요?
누가 강의료를 준다면 그것은 보시로 취급이 되어야 된다.
설법한 대가라기보다는 설법을 듣고 고마워서 주는 보시로 받아들여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이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일을 하는데, 법을 전하는 데,
또는 사찰 같으면 공금으로 취급이 되어야 된다.
그럴 때 계율의 정신에 좀 맞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점점 자본주의 사회에 귀착되다 보니까
우리도 모르게 이 세속의 원리,
세속의 가치관이 승단 안에 점점 침투되어서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하게 되죠.
그래서 설법을 하려면 ‘강사료 얼마 줄 거냐?’ 이거부터 먼저 얘기된다면
이것은 이양을 탐하는 법을 전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계율에 어긋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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