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전법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불교를 걷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앉은뱅이 종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불교는 앉아서 자기수행을 하는 그런 종교이지, 불교를 널리 세상에 적극적으로 전하는 그런 전교, 전법의 종교가 아니다. 이런 얘기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왜 우리들에게 이런 관념이 생겨났는가. 그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전래된 이 불교, 이것은 500년 동안 척불을 당한 그런 역사적 유산입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불교는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습니다. 도시에 있는 모든 사찰은 다 없어졌고, 출가한 승려들을 다 속퇴 시켰고, 그래도 승려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죽이지는 못하니까, 종의 신분으로 전락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스님이 지나가면
“중아, 중놈아.” 이렇게 부르는, 천시하는 이런 문화가 형성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세상과 담을 쌓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조선시대에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약자층, 신분적으로는 평민이나 천민들, 그리고 성별로는 여성들, 이런 분들이 불교를 옹호하는 지지 세력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의 남자는 누구도 불교를 신봉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자들은 글을 몰랐고, 또 스님들은 세상과 등지고 살았기 때문에 스님이 된다는 것은 은둔생활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세상을 완전히 등지는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신자가 되니까,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복을 비는 사람들만 모여들게 된 것이
그래서 오늘 역사적으로 전수받은 전통불교는
이런 담마, 법이 없는
복을 비는 그런 기복 불교였고,
주 지지계층이 여성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좋게 생각하면 차별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런 측면에서는 500년의 고난의 경험은 우리 불교인들에게 소중한 유산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가 세상을 리드하고, 세상을 개혁하고, 세상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치료하는 이런 희망의 종교, 비전을 제시하는 종교, 가르침을 펴는 종교, 이런 이미지는 없어져버린 겁니다.
그러나 신라시대만 보더라도 스님들이 다 당대의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중국에 유학을 가고, 선진 문물을 배우고, 왕과 대신들을 가르치는, 그래서 국사 왕사 이런 분들이 나왔지 않습니까?
부처님 당시는 말할 것도 없죠. 부처님은 모든 왕들의 모든 사업가들의 또 당시에 바라문들의 스승 역할을 했지 않습니까. 부처니 당시에 한 예를 들어보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설법제일 부르나 존자가 있습니다.
이 부르나 존자는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해하고, 또 행해서 그 법을 체험하고 나서는
마음속에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래서 숲속에서 홀로 정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이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마음을 얼굴 전면에 집중을 해서 호흡이 들어나가는 것을 관찰하거나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면서 정신을 집중할 때,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은 다 사라짐을 관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나’라고 할 만 것이 없다는 것을 깊이 관하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하고 지혜는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행생활이 너무나 기뻤고, 그 기쁨이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법에 있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기원정사로 찾아와서 부처님께 자신이 도를 닦는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부르나의 도를 닦는 즐거움을 들으시고는
“선재선재라, 착하고 착하구나 부르나 존자여.” 하고 부르나를 칭찬해줬습니다.
그러자 부르나가 부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닫고, 이와 같이 기쁜데, 이 좋은 법을. 법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과 나눠가지고 싶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여, 허락하여 주십시오. 저는 서방 수로나 국으로 가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법을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전법의 길을 떠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부르나 존자를 칭찬했습니다.
“장하다 부르나 존자여, 이 좋은 법을, 법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부르나 존자여, 당신이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해서 이 좋은 법을 전하지만, 그들은 당신을 환영하고, 법문 듣기를 즐거이 하고, 법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당신에게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외면을 하고 이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부르나 존자께서
“부처님시여, 그들은 저를 비난하고 욕설하고 외면할지언정, 그들은 나를 돌멩이를 던지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이러면서 내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부르나 존자여, 나는 그들이 매우 거칠고 사납다고 들었다. 그들은 너를 돌팔매질을 하고, 몽둥이로 때리고 내쫓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 부르나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부처님시여, 수루나국 사람들은 매우 현명합니다. 그들은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고, 나를 내쫓을지언정,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부르나 존자여, 수루나국 사람들은 매우 거칠다고 들었다. 그들은 전법하는 당신을 칼로 쳐 죽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부르나 존자께서
“부처님이시여, 태어난 것은 다 죽게 마련입니다. 이 몸은 무상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비심으로 방편을 써서 이 몸이 무상한 줄을 깨우쳐준다면, 저는 기꺼이 열반에 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
“장하다 부르나여,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전법을 한다면 능히 교화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능히 뛰어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부르나 존자를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부르나 존자는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멀리 수루나국으로 홀로 가서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갖가지 어려움을 뚫고 전법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수많은 절을 짓고 그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10대 제자가 되었습니다. 설법 제일 부르나 존자다.
이런 걸 볼 때, 어떻게 불교를 앉은뱅이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도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하려고 하는 것이 불자들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불교인들은
왜 그러면 이런 마음이 잘 들지 않느냐?
그것은 부처님 법을 듣고, 이해하고, 경험해서
자기 속에 있는 갖가지 번뇌가 사라지는
고가 사라지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너무나 법을 만난 기쁨이 있고, 그 기쁨에 겨워서 제일 먼저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이 좋은 법을 전해야 되겠다하는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치 우리가 어디 여행을 가서 좋은 경치를 보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걸 보여주고 싶잖아요.
“아, 우리 어머니께서 이걸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우리 아내가 이걸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우리 애들이 이걸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옛날에 내가 사랑하던 애인이 이걸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아 이거 꼭 좀 보여주고 싶다.” 이런 생각하잖아요.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자기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아, 이것 좀 먹여 줬으면 좋겠다.” 좋은 영화를 보고도
“아, 이거 보여줬으면 좋겠다.” 이게 사람들의 보통 마음이란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저희들이 운영하는 수련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깨달음의 장에 참여했던 분들은 깨닫고 나니 너무너무 기쁘고 좋단 말이오. 그래서 늘 보면
“누구에게 이 수련회 권유하고 싶습니까?” 하면 자기가 가장 아끼던 사람이오.
첫째는 우리 어머니, 우리 아내, 남편, 큰아들, 언니, 아이고, 우리 언니가 요즘 괴로워하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돈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고, 여기에 권유하면 내가 복 받아서도 아니에요. 너무너무 내가 법을 경험한 기쁨이 있기에 이 기쁨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함께 누렸으면 하는 그 마음이에요.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기쁨을 49일 동안 만끽하시고, 이 좋은 법을 나눠가질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첫 번째 떠오르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아끼고 가르쳐줬던 사람인 스승 부타카 라만 푸트라였어요. 그러나 그 분은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가셨어요. 안타까웠죠. 다음에 떠 오른 분이 역시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였어요. 그러나 그 분도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셨어요.
세 번째 떠오르는 분이 누구였느냐? 자신과 함께 6년 동안 수행 정진했던 자기 친구들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고 저 멀리 바라나시 성 밖의 사르나트로(녹야원)으로 떠나버렸던 그들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나를 비난하고 갔지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나서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거요.
“그들이 이 좋은 법을 안다면, 그들이라면 이 좋은 법을 알 수 있을 거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스스로 그 먼 곳을 걸어서 그들과 이 좋은 법을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갔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줄 선물을 한보따리 안고 갔지만, 어리석은 그들은 부처님이 오자
“저기 고타마가 온다. 그는 수행을 포기한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 그가 오거든 그를 수행자로 환대하지 말자.” 이런 생각을 했던 거요.
오히려 부처님을 보고
“고타마시여, 신수가 좋구려.” 이것은 칭찬 같지만 사실은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들어있습니다. ‘고행을 포기하고, 맛있는 거 먹고, 목욕도 하고 그러더니 때깔이 좋구나.’ 이 말이지.
그때 부처님께서
“나를 이제 더 이상 고타마라 부르지 마시오. 나를 여래라고 부르시오.”
이 여래라는 말은 어떤 높인 말이 아닙니다. 여래라는 말은 모든 번뇌가 다 해서 오고감이 없는 자다. 여여이 오고 여여이 간자다. 인도말로 타타가타. 나를 여래라고 부르시오. 그러니까
“아니, 그렇다면 모든 번뇌가 다했단 말이오? 깨달았단 말이오? 당신은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하고도 깨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수행을 포기하고 깨쳤단 말이오.” 이렇게 곧이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그런데 부처님께서
“여러분, 저와 6년을 함께 살면서 제가 한번이라도 여러분께 거짓말 한적 있었습니까?”
“아니오. 당신은 항상 진실했습니다. 거짓말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나는 사실대로 말하는 거요. 나는 좋은 법을 증득하였소. 나는 이 좋은 법을 여러분과 나눠 갖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소.”
그들은 부처님을 믿고 그 좋은 법을 들려주기를 청했고, 그래서 부처님은 그분들에게 이 좋은 미묘한 법을 설했고, 그들은 그 법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 법을 듣고 깨달았을 때, 부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오, 콘다냐가 깨달았다. 오 콘다냐가 드디어 깨달았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법을 전하는 기쁨, 그것은 본인이 법을 증득한 기쁨이 있기에 법을 전하려고 하는 원력도 전해서, 그들이 깨달았을 때 그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느끼는 이런 원력 전법의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 전법을 하셨고, 말년에는 늙고 병든 몸을 이끄시고도 전법을 하셨던 겁니다. 그 정신을 계승해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다 편집을 해서 다 기억을 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널리널리 전했던 겁니다.
이것이 후대에는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을 넘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서 중국으로 전래가 되었던 거고, 그 전법사들은 중국을 거쳐서 고구려로 백제로 신라로 일본으로 이렇게 전법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르나 존자와 같은 그런 정신이에요.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절을 짓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어리석어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연민하고 흡수하는 마음으로 그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이 좋은 법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르나 존자는 그들을 위해서 법을 전하기 때문에 그들이 설령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섭섭해 하거나 그들을 저주하거나 그러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하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
어떤 종교를 보면, 굉장히 적극적으로 전법을 합니다. 그 전법의 목적은 전법을 함으로 해서 죽어서 좋은데 나기 위해서 전법을 해서 세력을 얻기 위해서, 전법을 해서 뭔가 개인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이득을 얻기 위해서, 또 그 전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주를 하죠.
그들은 저 지옥을 불구덩이에 떨어지리라. 불교의 전법 정신은 이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열 번을 거절해도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더더욱 저주해서는 안 된다. 법을 전하는 나의 마음속에서는
법을 받아들이는 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전하기 때문에
그가 받아들이면 좋은 일이고,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외면하거나 실망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그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전법의 정신입니다.
이 전법정신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부르나 존자의 전법의 자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부르나 존자의 전법의 자세를 칭찬하셨고, 또 부르나 존자가 새로운 곳에 낯선 곳에 가서 전법을 한다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부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런 어려움에 닥쳤을 때,
부르나 존자가 어떤 퇴고심을 낼까 해서 미리 점검을 하셨고, 부르나 존자가 어떤 경우에도 법에 맞게 임할 거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칭찬하고 파견을 했고, 부르나 존자는 부처님의 법을 부촉 받고 그대로 전법을 잘 완수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도 봄을 맞아서 이런 부르나의 정신으로 마음자세로 이 좋은 법을 우리 주위에 널리 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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