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반 공부를 하면서 진리로서의 불교를 제대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임했던 천도재 같은 종교로서의 불교의식들이
이제는 어쩐지 좀 퇴색돼서 다가오고 간절한 마음이 덜합니다
이런 저의 마음의 변화가 좀 혼란스러운데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불교에는 현실에서는 3가지 불교가 있다.
1. 종교로서의 불교, 종교로서의 불교의 가장 바탕은 믿음입니다. 믿음.
2. 철학으로서의 불교,
이것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입니다. 이해.
그 교리, 그 논리체계를 이해해야 해요.
그러니까 종교로서의 불교는 주로 절에 가서 많이 행해지고 있죠.
종교로서의 불교는 대중의 관심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실에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좀 극복하는데 힘 있는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걸 현세 구복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죽고 나서 나든 누구든,
죽고 나서 좀 좋은데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미래 구복이죠.
내생을 기원하는 거예요.
종교는 크게 역할이 2가지입니다.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심오한 사상, 논리입니다.
이건 주로 동국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이 있고,
또 승가대학에서 배우는 이게 학문으로서의 불교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여기는 내가 머리가 명석하고 논리를 잘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불교는 그런 머리가 명석하고 이런 게 중요한 게 나이에요.
그것을 믿고, 행하는 게 중요하다. 믿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보통 이 둘은 굉장히 모순 관계에 있어요.
그러니까 청년들이 불교 교리를 너무 배워버리면 믿음이 없어지고
할머니들은 믿음은 굉장히 있는데, 불교를 논리적으로 전혀 몰라요.
불교의 교주가 석가모니 부처님인지 아미타 부처님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30%가 된데요.
불교 교주가 누구냐 그러면 아미타불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그런데 그분들한테는 교주가 석가모니든, 아미타불이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교리를 너무 이해를 하면 믿음이 신심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신심이 있는 여성 불자들은 너무 불교를 잘 모른다. 또 이렇게 표현을 하거든요.
우리는 이거 2가지만 있어요.
주로 믿음의 불교, 종교로서의 불교로 있다가
“불교 신자가 불교를 몰라서 되나? 불교를 알아야 된다.”
불교 대학에 다니고, 한때 유행했거든요.
이게 교리 체계, 논리 체계를 이해하는 거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믿음으로서의 불교나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가지고는
내 괴로움이 해결이 잘 안돼요.
아이가 학교를 안 간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이러면 믿음으로서의 불교는
아이가 학교에 가야하고, 남편이 나만 쳐다봐야 하고
그게 내 뜻대로 안되니까 부처님께 간절하게 빌어서 좀 바꿔달라고 하는 거고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철학 불교 해봐야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감정은 그대로 일어나는 거다.
3. 그럼 수행으로서의 불교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에, 이런 경우에 나에게 화가 나거나 괴로움이 일어난다면
왜 화가 나고 괴롭지? 하고 그 원인을 알아차려서
그 원인을 알아차릴 때, 그런 원인을 알아차리는, 그것이 나중에 변해서 뭐다?
교리 체계가 된 게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그래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삶이다.
그래서 이것은 실천이 중요하고 즉, 행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해서 내가 경험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이 수행을 한다고 해서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남편이 나만 쳐다보고 이런 게 아니에요.
아이가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남편이 나만 쳐다보든 딴 사람 쳐다보든,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내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수행으로서의 불교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저희 정토회에서는 이 셋 중에
수행으로서의 불교에 좀 비중을 많이 두고, 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수행공동체 정토회다, 이렇게 창립을 한 거란 말이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이런 논리체계, 사상체계도 공부하니까
불교대학 같은 데서는 철학으로서의 불교도 일부 배움이 있고
또 천도재를 지낸다든지, 정초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거는
종교로서의 불교도 일부 있다.
그러니까 일반 절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대부분이고,
학교에 가면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대부분이고
그런데 우리는 중심이 수행으로서의 불교이고
그다음에 철학으로서의 불교나 종교로서의 불교가 조금 남아있다.
왜 그러냐?
이 종교로서의 불교는 문화가 되어 있는 거요. 문화가.
우리가 그런 문화를 수용해야 하고, 아무리 수행해도 아직 우리가 수행이 부족한 상태이다 보니까
어려움이 되면 도움을 얻고자 하는 종교심이 현실적으로 생겨난다는 거요.
그래서 이런 흔적이 좀 남아있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잘못됐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돼요.
이런 셋 중에 우리는 수행으로서의 불교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는 곳이고, 체험하는 곳이다.
수행으로서의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기의 가르침이 수행에 방점을 둔 불교가 아니었나
그러니까 그 근본 가르침으로 우리가 돌아가자.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해탈하는 경지가 아니다 보니까
이 삶이 어려우면 뭔가 도움을 얻고 싶은 그런 게 다 사람이 있잖아, 그죠?
그러면 이것은 수행으로의 불교에 어긋난 게 아니라
아직 중생이다 보니까 그런 심리가 일어나는 것을 어느 정도 수용을 한다.
그러나 정토회가 그것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정도 수용은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가 그런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하다 보니까
그런 종교로서의 불교에 조금 등한시된다고 하는 거는 나쁜 현상이 아니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걸 잘못 공부하면 종교로서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든지
이렇게 배타적으로 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성격이 달라서,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탁 들으면
‘아, 이거다, 나는 이게 맞다’ 이런 사람도 있고
‘아, 그건 너무 힘들다, 나는 절에 가면 조용하고 뭔가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앉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사람도 있거든요.
그런 사람은 또 그것을 선택하는 거고
또 제법이 공하다느니 하는 이런 논리가 너무 불교사상이 심오하다 해서 그걸 막 책을 읽고 공부하고, 그런 거를 남하고 논리적으로 해서 불교가 최고다, 이런 거에 또 재미 붙인 사람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거를 우리가 탓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만 정토회에는 다른 것을 배타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 중에, 여기에 방점을 두고 있다.
축구가 최고이고 농구는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운동 중에 농구도 있고, 축구도 있고, 배구도 있는데
우리는 주로 축구를 중심으로 해서 동호회를 모았다.
가끔가다가 ‘배구 한 게임 하자’ 해서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주 목표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다.
이런 관점에서 보시고요,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전에는 배구도 좋아했는데 맨 요즘 모여서 축구만 하다보니 배구가 좀 시들해졌다. 좋아하는게.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지, 그게 이상한 게 아니다.
우리가 이 사람 좋아하다, 저 사람 좋아하다보면 이 사람하고 좀 시들해지는게
배신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전에 이거 좋아했는데 저쪽 거를 새로 먹어보니 맛있어.
그거 먹다 보니 이쪽 식당에 안 간다.
전에는 중국집에 잘 가다가 요새 피자 즐겨 먹다 보니 중국집에 좀 덜 가게 된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시면 돼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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