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제 남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동생이 힘든 줄 몰랐던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저희 가족이 다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동생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동생이 있을 때
동생으로 인해서
집안에 오히려 걱정이 많고 시끄러웠습니까?
동생이 있어서
항상 행복하고 웃음소리가 났습니까?
...
그래서 동생 때문에 엄마 아빠는 아무 걱정도 안 했습니까?
...
그럼 동생이 지금 죽고 나도
크게 걱정끼칠 일은 없잖아요.
평소에 있는 둥 없는 둥, 조용하게 지방에 들어가서 있었는데
그러니까 자기 혼자 살았고, 이미 떨어져 살았고.
물론 죽었다고 하니까 슬픔은 있겠지만
생활상에 큰 무슨 문제는 없잖아요.
같이 살아서 나한테 일을 많이 도와줬다든지
돈을 벌어왔다든지
어떤 일을 했다 그러면
동생이 없으니까 수입이 줄었다든지
동생이 없으니까 일꾼이 없다든지
아들이 없으니까 부모가 수입이 없다든지
이게 아니라
동생은 자기가 수입을 아직 확보를 못 했잖아요. 그죠?
부모 돈을 쓴 수준이잖아.
이미 부모하고 떨어져 살았잖아요.
그 떨어져 지금까지 쭉 같이 살아왔잖아요. 그죠?
그리고 원래 조용했고
그러면 지금 새삼스럽게 변한 게 뭐가 있어요?
아무런 변한 것도 없잖아요.
지출이 줄었으면 줄었지
지출이 더 는 것도 아니고
원래 따로따로 살았기 때문에 떨어져 살았고
같이 살다 보면
한 사람이 없으면 좀 허전해지잖아요. 그죠?
그것도 이미 다 경험을 해서 따로 살았고.
그런데 그게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사실 하나, 용어
‘죽었다’ 하는 용어 하나 빼고
생활상에 아무런 변화가 지금 없잖아요.
그런데 왜 그게 그렇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 할 정도입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면 되지.
어떻게 생각해요?
...
자기가 만약에 남편이라면
남편이 없으니까 밤에 허전하다든지
남편이 없으니까 수입이 줄었다든지
그러면 조금 생활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지금 좀 어렵다.
이거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된단 말이에요.
동생하고 뭐 같이 이미 떨어져 살았고
앞으로 같이 살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물론 ‘동생이 죽었다’ 하는 이 말이
내 기억에 닿으면서 나의 슬픔이 시작이 됐고
그래서 슬픈 건 이해가 되는데
앞으로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적어도 그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
부모님도 아들하고 따로 살면서 지금까지 잘 살았고
돈이 왔으면 돈을 안 보내주면 어떻게 사느냐 말이 되는데
보내주는 돈을 안 보내줘도 되는데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다”는 말은
좀 맞지 않지 않나
제가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해보는 거예요.
지금 너무 ‘죽었다’는 사실에만 초점이 맞히니까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현재 우리 가족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면 돼요.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근데 더 질문 있으면 하세요.
요점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일 뿐이에요.
그거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지금까지 산 대로 살면 된다.
왜냐하면 나의 삶이든 부모님의 삶에
아무 변화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것만 계산하면
‘지출이 줄어들었다’ 이렇게까지 볼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 사는 거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걱정되는 거 있으면
더 물어봐요.
...
누가?
자기가 왜 희망이 안 보여?
저기 몇 살이에요?
32살이면 자기가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면 되고
애기 낳고 싶으면 애기 낳으면 되고
직장 다니고 싶으면 직장 다니면 되고
이렇게 살면 되는데 앞이 왜 안 보여요?
자기가 어떤 미래를 설계하는데
동생이 들어와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근데 동생이 없는데 왜
자기가 갑자기 희망이 안 보여?
처음에 자기가 얘기할 때 말했듯이
지금 이렇게 마음이 슬프지만
얼마 지나면 또 괜찮겠지만
이런 얘기했잖아요.
괜찮을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지금은 어떤 가족관계에서 어떤 변화가 있으니까 충격이 있는데
자기 사는 데 지금 아무런 변화가 없거든요.
자기 인생 설계에도
이렇게 특별히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곧 가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쉬울 정도지
지금 시간이 흐르면 크게 문제가 안 될 거예요.
근데 부모님은 조금 달라요.
부모님은 자기 인생 설계에
상당히 지금 한 구멍이 빠졌어요.
아들이 커서 집을 사고 손자가 생기고 하고 하는
어떤 설계가 있거든요.
그 설계의 부모님은 하나가 빠졌기 때문에
당분간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근데 자기는 큰 문제가 없어요. 사실은.
자기 고민 다 끝난 거예요?
--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
어떤 죽음이라는 어떤 일이
너무 과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으로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면서
태어남,
이거 자연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하나의 사회 현상이에요.
근데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
과대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결혼,
거기에도 너무 과대하게 의미를 부여해요.
그러니까 평소에 콩나물 사러 가서
천 원짜리 900원에 800원에 100원을 깎는 그렇게 깎아놓고는
결혼할 때는 막 드레스 한 벌에 몇백만 원 빌려 써요.
그거 한 번 입고 그냥 버리는 건데
이렇게 과대하게 책정이 돼 있다.
“결혼을 검소하게 해라”
이런 뜻으로 제가 말하는 게 아니에요.
특히 장례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대하게 여러분들이 그 계산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특히 장례식에서
상을 차리거나 무슨 하는 거는
과대하게 포장된 그것으로 인해서 오는 허전함을 달리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돈을 쓰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사는 게 별거 아니에요.
관혼상제가 사는 게 전부요.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고
여기에 막 어쩌면 자기 평생 써야 될 거의
절반 이상을 쓴다는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관혼상제를 한 때는 뭐라 그랬어요?
허례허식이다, 이런 말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위로를 하는 적절한 문화는 필요합니다.
근데 이게 좀 너무 과대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연현상 중에 널리 있는 현상이잖아요.
여러분들이 오늘에서 내일로 늙어가듯이
죽음이라는 것도 그냥 늘 있는 일이고
태어남도 있는 일이에요.
헤어짐도 있는 일이고 만남도 있는 일이에요.
이 세상에 헤어지는 수만큼 만남이 있어요.
만나는 수만큼 헤어짐이 있는 거예요.
태어나는 수만큼 죽는 일이 있는 거예요.
근데 태어나면 기뻐하고, 죽으면 슬퍼해요.
그래서 슬픔을 없애기 위해서
“안 죽는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태어남만 계속 있고 죽지를 않는다.
오래 사는 거 좋아했지만
요즘은 고령화 인구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문제의 문제에요? 문제 아니에요?
문제가 지금 점점 되잖아.
갈수록 더 심해지겠죠.
그러면 죽지도 않는 정도가 아니라
수명이 한 70에서 한 90, 100으로 늘었다고
사회에 큰 온갖 재정 지출이든 사회 변화든
온갖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건 잘못됐나?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전의 세상하고
전체 인구가 노령화되면서
거기에 맞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되는데
우리는 그 전 시스템을 갖고 있다 보니
이게 굉장히 지금 어려운 문제예요.
그런데 또 전부 다 거기에 맞게끔 시스템을 바꾸면
목표에 맞게끔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그래서 죽음을 찬양할 일은 아니지만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고 크게 문제 삼는 거는
이거는 의미를 과대하게 부여했다.
자연현상 중에 어떤 한 현상에
너무 의미를 크게 부여를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거기에 따르는 충격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대하게 포장된 거 많습니다.
성이라는 게 있죠, 성.
이것도 너무 의미를 과대하게 부여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특히 여성은
성적인 어떤 문제에 어마어마하게
막 자살하고, 평생 상처 입고 이러잖아.
그게 과대하게 부여돼 있다, 의미를.
여러분들은 잘 모르죠.
태어나서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슬퍼하거나 그렇게까지 괴로워 안 해도 되는데
그게 너무 문화가 과대한 의미를 부여해 놨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면
엄청난 충격을 갖고 그러죠.
오늘날은 남자 여자 손 잡고 뽀뽀하는 것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옛날에는 여성이 남자한테 손만 잡혀도
큰일이에요?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에요.
목욕하는 걸 누가 봤다 그러면
그건 큰일이에요.
완전히 손만 잡혀도
그 집은 무조건 시집 가야 돼.
이게 과대하게 의미가 부여돼 있다.
그리고 자살은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권장할 일도 아니고.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타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는데
자기가 자기 생명을 선택한 거를
너무 그걸 갖다가
자기가 자기를 결정한 건데
그걸 너무 옆에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이 얘기에요.
자기가 자기 생을 결정했는데
왜 옆에서 그 결정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문제를 지나치게 제기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물론 이제 자기가 자기 생명을 해치는 거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나를 위해서도 자기가 자기 생명을 해친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런 걸 뭐라한다?
의사라든지
여성이 그러면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도 아주 높이 받들고 이랬잖아.
그러나 대다수 생명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해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그럼 자기가 자기 생명을 해치는 행위는
정신적으로 약간 고장이 났다.
즉 비정상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서
치료하는 게 좋다 이거야.
그러나 수많은 병 때문에 죽듯이
그러한 질환으로 인해서 그러한 결정이 난다고 해서
그걸 너무 과민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예방할 거냐는 관점에 서서 해야 실효성이 있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거기에 의미를 많이 부여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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