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깨달음의 실체가 없다고 하는데, 그럼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2025.05.22.)

Buddhastudy 2025. 5. 27. 20:07

 

 

  • 깨달음은 개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을 그냥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여 부를 뿐입니다. 그렇게 부를 뿐이지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정해진 바는 없다는 거예요." [01:56]
  • 비유를 통한 설명: 꿈을 꾸다 깨어나는 것에 비유하며, 꿈속의 일들이 깨고 나면 사라지듯, 깨달음 또한 어떤 실체가 있어서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02:06]
  • 언어의 한계: 우리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지칭하지만, 그 지칭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부를 뿐, 실체로서의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02:28]
  • '나'라는 개념과의 유사성: '나'라는 존재 또한 단지 지칭하는 말일 뿐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깨달음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03:14]
  •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 죽음 이후의 영혼 존재 여부처럼, 알 수 없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깨달음 또한 실체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언급하셨습니다. [03:33]
  • 집착 내려놓기: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괴로움이 생길 수 있으므로,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듯 깨달음에 대한 집착 또한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05:11]
  • 단순한 바라봄: 깨달음에 대한 특별한 공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06:07]
  • 괴로움이 없는 상태: 불교의 핵심은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06:42]
  • 꿈의 비유: 꿈에서 깨어나면 도망갈 일이 애초에 없듯이, 깨달음은 괴로움의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06:53]

 

 

저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힘들 때

영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요?//

 

 

반야심경은

깨달음이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려고 설해진 법문입니다.

, 그렇구나!’ 하는 것을

그냥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여 부를 뿐입니다.

그렇게 부를 뿐이지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정해진 바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꿈을 꾸다가 눈을 뜨면

내가 꿈에서 깼다.’라고 말하죠.

꿈속에서는 강도도 나오고 도와주는 사람도 나와요.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다 사라집니다.

그냥 꿈속에서 있었던 이야기일 뿐이에요.

 

이처럼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가 있어서

이것이 깨달음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꾸 무언가를 지칭합니다.

내가 간다.’, ‘내가 믿는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런 가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때를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부를 뿐이지

실제로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잖아요.

몸도 있고 생각도 있으면, ‘라는 것도 있는 게 아닌가요?)

 

그러면 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그 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몸뚱이가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저도 몸뚱이가 없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느낌도 있고, 생각도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냐는 겁니다.

라는 것은 단지 지칭하는 말일 뿐이지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를 질문자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만 질문자가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뿐이에요.

영혼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결국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으면 영혼이 사후 세계에 간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죽으면 천당에 간다.’,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옥과 천당이 과연 있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다만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맞지 않아요.

다만 그런 믿음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놓기 어려우면 그대로 들고 계세요.

그런데 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가 안 놓아진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안 놓아지는 라는 게 뭡니까? 잘 모르겠죠?

잘 모르면서 어떻게 들고 있나요?

 

제가 이렇게 질문하면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은 잘 모르면서 그냥 있다고 단정하는 겁니다.

라는 것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런 느낌이 들 수는 있습니다.

느낌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있다혹은 없다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대개는 근거가 없어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

이번에는 생각이 탁 바뀌어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없다고 말할 것도 없어요.

문제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괴롭다.'라고 할 때,

과연 그 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르겠다.’ 하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세 번만 물어보면 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르긴 하지만 아무튼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왜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라는 것이 없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왜 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따로 더 공부할 게 없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이 사람은 이렇게 믿는구나.’

저 사람은 빨리 가네

이 사람은 늦게 가네.’

이렇게 바라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오셨네요.’ 하고,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술 많이 드셨네요.’ 하고,

성질을 내면 화나셨네요.’ 하고,

이렇게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온갖 시비가 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실제로는 아무 일이 없는데

내가 상상해서 시비하고 문제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핵심은 바로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꿈에서는 열심히 도망가야 할 것 같지만

눈을 탁 뜨면 애초에 도망갈 일 자체가 없어지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