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쾌락도 고행도 아닌 길, 부처님이 발견한 중도의 의미. (2025.05.20.)

Buddhastudy 2025. 5. 26. 20:28

 

 

  • 쾌락과 고행의 한계: 부처님은 젊은 시절 왕자로서 쾌락을 누렸고, 출가 후에는 극한의 고행을 했지만, 어느 쪽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즐거움은 일시적이며 더 큰 욕망을 낳아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고행은 욕망을 억압하여 몸과 마음에 긴장을 유발한다고 설명했습니다. [21:38]
  • 중도의 발견: 부처님은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 제3의 길인 중도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욕망을 따르거나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23:01]
  • 알아차림의 중요성: 중도는 어떤 의도나 욕망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상태입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을 알아차리고, 감각이 일어나면 감각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23:35]
  • 의도를 내려놓는 수행: 수행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도를 내려놓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중도의 길이며, 이를 통해 심신의 편안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24:01]
  • 중도는 절충이 아닌 새로운 길: 중도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타협이나 절충이 아니라, 그 둘을 완전히 초월한 새로운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23:23]

 

 

부처님의 고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로 존경스러웠을지 모르나

그 내면의 심리 상태는 큰 긴장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며

그 자체로 큰 고통이고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수행을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부처님은 어린 시절 농경제에 참석했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가 죽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깊은 명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바로 그 순간이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집중됐던 때였다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그 사실을 자각한 뒤

부처님은 고행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쾌락도 고행도 아닌 길, 부처님이 발견한 중도의 의미

 

부처님은 젊은 시절에는 왕자로서 쾌락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출가한 뒤에는 고행의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길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며 부처님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즐거움을 느끼고

그렇지 못하면 괴로움에 빠진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다시 얻기 위해 애쓰지만

그 즐거움은 지속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더 큰 욕망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끝없이 늘어나는 욕망은 언제나 충족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즐거움 안에 괴로움이 들어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즐거움을 버리고 고행을 택한다면

고행은 곧 욕망을 억압하기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결과 몸과 마음은 지속적인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된다.

늘 긴장된 상태를 과연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는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는 겉으로 보면 정반대로 보입니다.

하나는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 다 욕망에 반응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쾌락도 고행도 아닌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 제3의 길인 중도(中道)를 발견하셨습니다.

욕망을 따라가지도 억누르지 않고,

다만 알아차리는 길이었습니다.

그저 알아차리기만 하면

욕망에 끌려갈 일도 없고, 억지로 참을 일도 없습니다.

욕망을 따르면 과보를 받고

욕망을 억누르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만

욕망에 반응하지 않으면 과보도 스트레스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중도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절충이 아닙니다.

이 둘을 초월한 완전히 새로운 길입니다.

중도는 그저 알아차릴 뿐입니다.

어떤 의도도, 욕망도 없이 다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을 알아차리고

감각이 일어나면 감각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중도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알아차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 말에는 무언가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모든 의도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모든 의도를 내려놓고 편안한 가운데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 발견하신 중도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마침내 심신의 편안함에 이르렀습니다.

길을 찾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정진뿐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숲속에서 나와 네이란자라강(Nairañjanā)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몸을 씻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유미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강가에 있는 피팔라(Pippala)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마지막 정진을 위해 선정에 들었습니다.

 

훗날, 이 나무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로 보리수라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본 다섯 수행자는 실망하게 됩니다.

붓다가 목욕을 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나무 아래에 풀을 깔고 편히 앉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왕자 출신은 어쩔 수 없구나. 그는 타락했다.’ 이렇게 말하며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 곁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결국 홀로 남아 마지막 선정에 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