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청춘캠프에 오기 전에 스님이 쓴
<젊은 불자들을 위한 수행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두 사람이 만날 때 각자 보름달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기도 힘들고, 그런 상대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혼자 살아야 할까요?
이미 온전한 보름달 같은 두 사람이 굳이 같이 살 이유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정토회에서 활동하며 불교의 가르침에 점점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할수록 저는 연애나 결혼과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에는 ‘결혼이 꼭 필요할까?’ 하는 의문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제 또래의 청년들은 연애와 결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애와 결혼은 조금 다릅니다.
연애는 상대에 대한 호감, 즉 좋은 감정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서로 인종이나 종교, 신분이 달라도 괜찮고
나이나 경제력 차이가 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국경이나 종교,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이렇게 연애는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만으로도 가능합니다.
다른 건 그리 문제 되지 않아요.
나이가 스무 살씩 차이가 나더라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조금 달라요.
결혼은 두 사람의 공동생활을 전제로 합니다.
연애는 각자 따로 생활하면서 한 번씩 만나죠.
가끔 만나서 사랑을 나누거나, 대화하고, 취미생활도 같이 합니다.
그런데 결혼은 같이 사는 공동생활입니다.
한 방이나 한집에서 같이 사는 거예요.
이런 공동생활을 하게 되면
서로 화장실 문제나, 청소, 음식의 맛이나 요리 문제 등 여러 곳에서
각자의 성향이 부딪힙니다.
그래서 열렬한 연애 감정만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연애할 때 열렬한 감정이 생기면
마치 결혼해도 잘 살 줄 알고 결혼을 하는데
막상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결혼은 공동생활입니다.
마치 룸메이트랑 사는 것과 같아요.
룸메이트와 둘이 방을 얻어 같이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룸메이트와 동거하는데
그의 외모나 경제력 같은 게 중요합니까?
서로 식사 당번을 정했으면 정한 대로 하고,
청소 당번을 정했으면 그대로 하는 게 더욱 중요합니다.
몇 시 이후에 자기로 했다면,
그 시간에 불 끄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룸메이트로서는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보통 10시에 자는데
상대가 12시까지 불 켜놓고 뭔가 하고 있다면,
또 나는 보통 아침에 늦게까지 자는데
상대가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소란하다면
그런 룸메이트와는 같이 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요즘같이 에어컨을 켜거나 겨울에 보일러를 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추위를 잘 타서 밤에는 에어컨을 꺼야 하는데
상대는 잘 때도 에어컨을 켜야 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는 따뜻하게 자는 걸 좋아하는데
나는 더운 게 힘들 수도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면 이런 것을 서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의 좋은 감정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런 생활을 서로 맞추지 않으면
같이 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결혼은 가족관계의 확대입니다.
부부 둘만 사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 배우자 한 사람만 보고 결혼하지만
막상 결혼하면 배우자의 아버지도 내 아버지가 되고
배우자의 어머니도 내 어머니가 됩니다.
그 사람의 형제들과도 관계가 생깁니다.
내 배우자 한 사람에게만 맞추는 것도 힘든데
그의 가족 모두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는 서로가 좋아서 결혼했기 때문에
상대가 돈이 좀 없어도, 신분이 낮거나, 외국인이라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은 절대 봐주지 않죠.
내 배우자처럼 그들도
내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걸 봐줄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내가 국적이 달라도 문제가 되고,
돈이 없어도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상대의 가족들과 부딪힙니다.
결혼해서 부부끼리는 좋지만
서로의 가족들 때문에 힘들어하다 이혼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어쩌면 부부 갈등보다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이혼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그런 갈등 속에서 배우자가 내 편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처지에서는
자기 가족과의 관계 때문에 내 편을 들어주기가 어렵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내 가족이니까요.
아무리 서로 좋아서 결혼한 부부라도
자기 가족들을 버리면서까지
내 편을 들어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해 없이
‘나는 당신만 보고 결혼했는데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라고 불평을 합니다.
결혼하면 이렇게 인간관계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만약 재혼까지 한다면 훨씬 더 관계가 복잡해지겠죠.
부부 둘만 생각하면 결혼해도 문제없고,
이혼이나 재혼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사회라고 하는 인간관계에서 보면
거미줄처럼 관계가 점점 복잡해져 갑니다.
이게 결혼입니다.
이렇게 결혼은 공동생활이며
가족관계의 확대라는 걸 알고 해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더라도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혼자 살아도 미련이 없습니다.
단순히 ‘나는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어. 그냥 결혼 안 할래’
이런 마음으로 살면
나이가 오십, 육십이 되어도 결혼에 대해 미련이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주변에 결혼으로 주저하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결혼해 보라고 권합니다.
괜히 주저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빨리 경험해 보는 게 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생해 보면
미련이 남지 않아서 다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결혼은 안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이건 말할 것도 없는 얘기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왕자였으니 사회적 지위도 높았습니다.
또 경전을 보면 부인도 아주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또한 부처님은 재능도 많았고, 자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출가를 하셨습니다.
수행자로 사는 것은 혼자인 것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류에게 어떤 새로운 길을 열려면
가족적 관점을 가져서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뒤에도
부처님을 부처로 보지 않고
늘 자기 아들로만 봤습니다.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 대해서도
늘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는지
잠은 어디서 자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걱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속적 관점으로만 부처님을 봤기 때문에
정반왕은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출가해서 스님이 되거나
혼자 살면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결혼을 반대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부처님께서
재가수행자의 길을 열어주셨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출가수행자의 길만 전해지고
재가수행자의 길은 없었겠죠.
수행자로 살더라도 사람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가정을 이루거나 사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더라도 그가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재가수행자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만 몇 가지는 꼭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계율입니다.
출가수행자가 살생할 일이 어디 있으며
다른 사람을 헤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출가한 사람이 타인의 물건을 훔치고
성추행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출가수행자는 자기 부인도 두고, 자기 물건도 다 놓고 나온 사람인데,
다른 여성을 추행하거나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행동은 하지 않겠죠.
그래서 출가수행자에게 계율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생활에 대한 계율만 있었습니다.
오계라는 중요 계율은
원래 재가수행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 사람들과 싸울 일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주먹이 나올 가능성도 큽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익을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결혼해서 살면 다른 이성에게 관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 욕할 일도 있고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 술 먹고 취할 수도 있습니다.
재가수행자가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은 허용하되
적어도 이 다섯 가지는 지켜야 한다며 나온 것이 오계입니다.
수행자라면
첫째, 폭력으로 어떤 문제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되
남에게 손해를 끼칠 정도로 이익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셋째, 내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넷째, 말로도 남을 괴롭히면 안 됩니다.
다섯째, 술이나 마약을 먹고 취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를 계율로 금하셨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본다면
이 오계는 모두 법률적으로 범죄에 속합니다.
오늘날 폭력이나 살인은 모두 범죄에 해당하잖아요.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것을 범죄로 보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제자를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주인이 하인을 때리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도
모두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봤습니다.
심지어 주인이 자기 노비를 죽이는 것도
주인의 권한으로 봤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주인이 부모이며
아내의 주인은 남편이고
노비의 주인은 양반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노비에게 어떻게 해도 별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600년 전에 살았던 부처님은
당시에 어떤 이유로든 남을 때리거나 죽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계율을 지키기가 쉽습니다.
그게 범죄 행위에 해당하니까요.
오계를 지킨다는 건
법 없이도 그런 나쁜 행위는 스스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재가수행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남자라는 반쪽과 여자라는 반쪽 둘이 만나
완전한 동그라미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연애나 결혼이 행복하려면 혼자서도 온전한 원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 각자 온전한 원이 되어 합하면
가운데 금이 없어요.
이게 수행자의 결혼입니다.
그런데 반원 둘이 합해서 원을 이루면
가운데 금이 생깁니다.
이러면 한 명이 죽거나 이혼하게 되면
다시 반원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다시 새 반쪽을 찾게 돼요.
그래서 재가수행자는 결혼을 해도 좋지만
가능하면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야 어떤 경우라도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애초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한 원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 생태계의 동물 대부분은 자기 혼자 삽니다.
작은 곤충도 혼자 살고, 하늘의 새도 혼자 삽니다.
다람쥐도 혼자 삽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왜 혼자 살 수 없을까요?
혼자 살 수 없다면
그는 스스로 생명이기를 포기했다고 봐야 합니다.
동물 중에도 펭귄처럼 짝을 지어 사는 동물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독립적으로 삽니다.
자기 종을 번식할 때는 잠시 같이 살지만
번식이 끝나면 다시 독립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독립적으로 산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움입니다.
또 독립적인 사람 두 명이 같이 살면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이런 걸 ‘혼자 살아도 좋고, 둘이 살아도 좋다’ 하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을 자꾸 반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 외롭고, 둘이 살면 귀찮아지니까
헤어지고 만나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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