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하루] 어떻게 스님은 평생 동안 흔들림 없이 활동할 수 있었나요? (2024.08.17.)

Buddhastudy 2024. 8. 26. 19:30

 

 

스님께서는 약 40년 전

30대에 수행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님도 젊은 시절에 경험한 농경제와 사문유관이

부처님의 출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과 번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아무리 좋고

그래서 이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더라도

늘 흔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즐길 거리도 참 많고, 직업에 대한 진로 고민도 있고

경제생활도 조금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소소하게 계속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스님께서는 과거 젊은 시절에

연애와 결혼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서 스님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평생 동안 사회실천과 전법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나 놓고 보니 확신에 찬 길을 걸은 셈이고

당시에는 제가 확신에 찼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흔들릴 때가 있었어요.

 

제가 가장 크게 흔들렸던 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저도 큰 충격을 받았어요.

같은 해에 10.27 법난이 있었습니다.

1027일 날 신군부가 스님들 몇백 명을 삼청교육대로 잡아간 사건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불교계가 민중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이 컸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10.27 법난이 일어났을 때는

본인들이 군홧발에 짓밟히면서도

아무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불교계에 대해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집단이라면 나도 떠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딱 들어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는 속가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저에게 미국으로 오라고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 물리학자나 천문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절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 꿈을 잊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해 두 사건을 겪으면서

이렇게 된 바에야 지금이라도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6개월 정도 지냈을 무렵

광주에서 있었던 학살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소문만 들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비디오로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던 거죠.

미국에서 공부를 했지만

이 길이 내 길이라는 감이 딱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잘 살든 못 살든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몸부림을 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때가 가장 크게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조금 기분이 나쁜 적은 있었지만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적은 없었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미국에서 그냥 학문하는 길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보니까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그 열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났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는 새롭게 밑바닥부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불교 신도가 천만이라고는 하지만

다 허수였기 때문입니다.

천만 명의 불자 중에

사회 정의를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도 없었어요.

 

제가 경상도 지역에서 10년 동안 활동하면서 다졌던

인적 네트워크와 자산들은

그런 면에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생들을 데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82, 제 나이로 29살 때예요.

그전에는 전통 불교 안에서 주로 중고등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변화를 일으키려고 했다면

이제는 서울로 올라와서

사회운동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해석하고 강의하는 쪽으로 활동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잘 가르쳤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반에 담임선생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과를 학습하면서 반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쳤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선생님 집에 방을 얻어 들어가서

그 집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서 생활비를 벌고

학교는 장학금을 받고 다녔어요.

중고등학생 때는 불교학생회 회장과 영남불교연합회 회장을 하고

그다음 바로 포교사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 경력이 대단히 길어요.

조기 교육을 아주 잘 받은 거죠.

그 덕분에 일찍 자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할 때도

자립을 해서 활동을 했지 다른 곳의 도움을 받지 않았어요.

항상 새로운 길을 갔기 때문에 남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스승님도 돈 한 푼 도와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스승님이 하는 전통적인 불교 활동을 해야 도움을 주는데

저는 전통적인 불교 활동이 아닌 새로운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도 폐품을 주워 모아서 팔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립 운동을 했지

이런 좋은 운동을 하니까 좀 도와주세요하고

어른들에게 손을 벌린 적이 없었습니다.

수련을 할 때 학생들이 먹을 음식이 모자라서 리어카를 끌고 인근 사찰에 쌀이나 된장을 얻으러 간 적은 있지만,

돈을 지원해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자립하는 방식으로 모든 활동을 했기 때문에

사업을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정토회를 창립하고 나서도 이어졌어요.

 

초창기 정토회의 모든 활동가들이

굉장히 헌신적으로 활동을 했지만

자립이 안 되는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절에 사는 행자들이 인도 성지순례를 갈 때도

3개월 휴가를 주어서

행자들이 스스로 비행기값을 벌어서 순례를 가도록 했습니다.

 

이런 활동 방식이 가능했던 이유는

저의 개인적인 이력과 성향이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크게 보면 제가 살았던 시대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가 형성되는 변화의 시대였어요.

농민이 줄고, 도시 빈민이 형성되고,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갖가지 문제가 터지는 때였습니다.

둘째, 여성도 교육을 받으면서 성평등 문제가 제기되고

여러 가지 사회 이슈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다 보니 조금 정신이 깨어 있다면

세상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어요.

그러한 것들을 보고도 세상 문제에 관여를 안 했다면

그건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판사가 되든, 검사가 되든, 의사가 되든,

기득권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문제에 대해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문제를 보면서 그걸 외면하기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제가 북한을 돕는 일을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압록강변에서 북한 주민들의 시신이 떠내려오고,

난민이 거지가 되어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것을 직접 봤기 때문에

그들은 돕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인도에서도 처음부터 호텔에 묵으면서 순례를 다녔다면

거지들을 조금 보는 선에서 그쳤을 겁니다.

그러나 하필 제가 캘커타로 들어가서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았어요.

저는 캘커타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이 경험한 사문유관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한국이 왕궁이고 캘커타가 왕궁 밖이었어요.

 

물론 그런 모습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다 나서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저의 성향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고 봐야겠죠.

불완전하지만 어떤 이상이 있었고

그것이 현실과 부딪치는 상황을 겪으면서

조금씩 중심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연애를 하고 싶다면 한번 해보세요.

직접 연애를 해보면

연애는 굉장히 골치 아픈 것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람 한 명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정토회 활동가 전체를 데리고 사는 것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법당 총무가 되어서 회원들의 비위를 맞춰보고 너무 힘드니까

이런 소리를 했어요.

내가 한 인간의 비위를 못 맞춰서

수십 명의 비위를 맞추는 과보를 받는다.’

 

그분은 남편과 살다가 도저히 안 맞아서 이혼을 했거든요.

남편 한 명의 비위만 잘 맞추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걸 못해서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의 비위를 맞추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함께 사는 사람이 많으면

개개인의 요구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과 같이 살면

그 요구가 수십 명의 요구보다 훨씬 더 많아요.

같이 살면 작은 것 하나까지 일일이 요구를 하거든요.

한 인간의 미묘한 감정과 비위를 다 맞추는 것은

천 명의 요구를 맞추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연애를 해보고 싶다면 한번 해보세요.

연애를 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결혼이나 동거도 해보고

연애를 해봤더니 나와는 도저히 안 맞는다 싶으면

남이야 그걸 하든지 말든지 나는 관심을 딱 끊고

다른 활동을 하면 됩니다.

 

저는 출가하면서 어머니의 정을 끊는 것이 참 어려웠어요.

겉으로는 쉽게 끊은 것 같지만 속으로는 힘든 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선택을 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인연인데도 정을 끊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해서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은

도저히 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땡이가 부은 인간들이나 그렇게 하지

나는 간이 작아서 그렇게는 못하겠다.

있는 인연도 해결을 못해 힘들어하면서

여기에 무슨 인연을 더 맺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래서 항상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해서

부처님 법을 기준으로 관점을 정리해야 해요.

 

그렇게 관점이 정리가 되어도

다음에 또 번뇌가 생깁니다.

그러면 다시 경험을 하면서 또 정리가 되고

이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한 번에 탁 깨달았더니 모든 번뇌가 끊어졌다,

이런 경우는 없어요.

저의 경우도 지나 놓고 보니 아무 문제 없이 외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사실은 운 좋게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의 제목이

<방황해도 괜찮아>입니다.

젊을 때는 방황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방황할 때는 스스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지나 놓고 보면 한 길을 쭉 걸어온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