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수정란이 점점 자라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그 형상이 자라서 어린아이가 되고,
성인이 되고, 늙고 병들어서 죽고,
그 시신이 점점 해체되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그 영상을 빠른 속도로 돌려서
생애의 전 과정을 1분 만에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요?
무수히 많은 사람과 무수히 많은 생명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듯이
물이 얼었다가 녹듯이,
흙으로 빚은 소상(小像)이 만들어졌다가 부서지듯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에 크게 애착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크고 넓게 볼 수 있다면
슬퍼할 것도 없고,
괴로워할 것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에 사는 우리는
그렇게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잠시 만난 인연과 헤어질 때에도
집착해서 아쉬움을 느끼고,
때로는 그 아쉬움이 너무 커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시는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는 죽음 앞에 설 때는
그 아쉬움이 너무나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죽음 앞에서
슬픔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처님과 같은 성인들은
존재의 실상을 넓고 크게 여실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성인들은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을
파도가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자연의 한 현상으로 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실상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우리의 마음은 슬픔에 젖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죽은 뒤에 가는 좋은 세상이 있다’ 하는
내생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좋은 세상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의 헤어짐은 아쉽지만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게 사실이냐?’,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냐?’ 하며
이런 믿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병이 났을 때 우리는 약을 먹습니다.
약의 성분을 다 알고 먹는 사람은
이 약을 먹고 왜 낫는지를 알지만,
우리들 대다수는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그것이 약인 줄 알지
그 약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병이 낫는지를 알고 약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은 자동차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고장 나면 고칠 줄을 몰라도,
누구나 다 운전을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에게 자동차가 움직이는 원리를 아는지,
고장 나면 고칠 줄 아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를 잘 몰라도
죽은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믿음은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 위안을 통해서 우리는 커다란 슬픔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인간의 슬픔을 달래는 의식은
특정 종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인간이 사는 집단 어디에서나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인간은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농경 사회가 되면서
한 곳에 정착해서 살 수 있게 되었고,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계급도 발생하고 종교도 발생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발견된 유적 몇 군데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은 흔적도 없고
같이 모여 산 주거의 흔적도 없는데
신전과 같은 종교 의식을 행한 거대한 건축물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달리
종교의식이 먼저 있었고,
그 종교 의식을 하기 위해
건축물들을 만들려다 보니까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한 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된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앞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류 문명이 먼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종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어쩌면 종교가 먼저 시작되고
그로 인해 인류 문명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인지가 발달하면서 좋은 점은
그 경험을 기억해서 쌓을 수 있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좋지 않은 점은
그 기억으로 인해 집착이 생기고,
슬픔과 괴로움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석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 대다수가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사후 세계에 대한 여러 얘기들이 횡행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다 보니까
사후 세계나 윤회와 같은 종교적 믿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는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인류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문명의 하나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죽으면 그곳으로 간다고 하는 믿음으로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 가족도 죽으면 그곳으로 간다고 하는 믿음으로
이별의 슬픔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가 하늘나라에 있다고 믿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장례 의식이 생겨났고,
사후 세계가 저 깊은 지하에 있다고 믿으면
그에 맞게 장례를 치르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죽으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었던 곳에서는
시신을 화장해서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빨리 환생할 수 있도록 하는
장례 절차를 만들었습니다.
사후 세계가 저 바다 밑에 있다고 믿은 곳에서는
수장을 하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사후 세계를 그리는 방식에 따라
여러 장례 문화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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