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와 무상(無常)에서 사용되는 '무(無)'의 의미와 공(空)의 개념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불교에서 이러한 단어들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문맥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 '무(無)'와 '공(空)'의 의미: 이 단어들은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어와 연결되어 사용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00:29]
- 치우침을 교정하는 도구: '있다' 또는 '없다'와 같은 주장이 극단으로 치우칠 때, 이를 교정하기 위해 '무(無)', '비(非)', '불(不)' 등의 부정어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00:45]
- 상황에 따른 해석: 단어의 의미는 시대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 달라지므로, 글자 자체의 절대적인 의미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01:38] 예를 들어, '중(中)'이라는 한자는 '가운데'라는 뜻 외에도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02:45]
- 언어의 다중적 의미: 언어는 사람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자체를 절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03:38]
- 절대화의 위험성: 서울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출발지에 따라 동쪽이나 북쪽으로 안내할 수 있지만, 이를 절대적인 방향으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04:41]
- 아트만(ātman)에 대한 비판: 인도 철학에서 불변하는 실체로 여겨지는 아트만에 대해, 부처님은 깊은 관찰을 통해 그러한 고정된 '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08:34] '나'라는 인식은 다양한 인연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09:19]
- 오온(五蘊)의 작용: '나'라는 것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작용이 연결된 모임일 뿐, 독립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아의 의미입니다. [11:19]
- 무상(無常)의 의미: 영원한 것은 없으며,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13:02]
- 부정어의 다양한 사용: '무(無)', '비(非)', '불(不)'은 단순히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주장을 절대화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15:07]
-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 우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사고해야 합니다. [15:53] 예를 들어, 신호등의 의미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16:06]
무아, 무상에서 ‘무’만 봤을 때
‘없다’가 무슨 뜻입니까?
또 ‘오온이 공하다’에서 ‘공’만 봤을 때
‘비어 있다’가 ‘없다’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無)라는 단어라든지, 공(空)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무슨 단어하고 같이 연결해서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야 된다.
사람들이 ‘신이 있다’ 이렇게 주장할 때는
그것이 갖는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이 없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이야”
이렇게 주장할 때는
‘신이 있다’ 이런 주장도 또 할 수 있는 거예요.
즉 치우친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가 있다.
그게 어떤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 이런 개념일 때는
단독의 언어로 ‘있다’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은
이 ‘무’가 다른 어떤 단어와 결합이 되어 있을 때는
그것은 반드시 그 시대 상황
그것의 의미는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서.
그래서 어떤 절대화시킨 것을 부정할 때 쓰는 단어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無)자를 붙일 경우도 있고
-아닐 비(非)자를 붙일 수가 있고
-아니 불(不)자를 붙일 때가 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할 때는 아닐 불(不)자를 붙였죠
그다음에 제상비상(諸相非相)할 때는 어때요?
아니 비(非)자를 붙였잖아요.
또 무상(無常)할 때는 무(無)자를 붙였죠.
한문으로 ‘그렇다고 고정할 수가 없다.’ 이럴 때
때때로 무(無)자를 붙일 때가 있고
비(非)자를 붙일 때가 있고
불(不)자를 붙일 때가 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해석할 때는
앞뒤 문맥을 봐서 해석해야지
글자 그 자체를 절대화하면 안 된다.
특히 한문 같은 건
예를 들면 가운데 중(中)자다.
그럼, 이거는 가운데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한문에 보면 1번은 가운데다 2번은 어떻다 해서 쭉 내려가면
13번에 적중(的中)이라는 의미의 중(中)자다, 이런 말도 나온다 이 말이야.
그럼 우리가 중도(中道) 할 때는 중(中)자가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고
‘적중한다’ 하는 의미의 중(中)자란 말이에요.
어떤 글자는 하나의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중에 어느 거냐?’ 하는 거는
앞뒤 문맥을 따라서 봐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언어가 갖는 다중적 의미에요.
근데 편협한 사람은 자꾸 언어를 절대화시키는 거예요.
말이라는 건
사람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데
말 자체를 신성시해 버린다 이거야.
성경에 ‘말씀’하면
그거를 사람을 위해서 말씀이 있는데
말씀에 사람이 복종을 해야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도 그래.
법은 고칠 수 있는데
김일성 수령님의 말씀은 못 고치는 거예요.
돌아가셔 버렸으니까.
주로 종교가 말씀을 절대화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못 고치니까
해석이 여러 가지가 나올 수 있겠죠.
그래서 그때그때 해석을 해서 하는데
-말씀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그 말은 앞뒤 문명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늘 얘기했지만은
“서울로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물었을 때
인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으로 가라고 말하고
수원 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라고 말한다.
이럴 때 동쪽과 북쪽이
서울 가는 길을 절대화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상황에 따라서 가는 방향이 달라지는 거다.
동이 무조건 절대화하면
강릉 사람에게도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야.” 이렇게 정해버리면
동해 바다에 빠져 죽는다.
그런 데서 이런 절대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나온 언어가
“동쪽으로 가라.” 이렇게 절대화를 하면
“서울 가는 길은 꼭 동쪽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다음 시대에.
그거를 절대화할 때 그런 비판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때 무동이라고 하든지, 비동이라고 하든지, 불동이라고 하든지
이런 말을 쓰게 된다.
그래서 인도 당시에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
그 이름을 브라만이라고 한다.
한문으로 고치면 범이라 그래요 범. 브라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신의 한 부분이 떨어져서
그 분신이 사람마다 다 내재해 있다. 신성이 내재해 있다.
이걸 뭐라 한다?
아트만이라고 한다.
그때 아트만 할 때의 아트만은
그냥 우리가 말하는 ‘나다.’ 이게 아니라
나에게 있는 나의 어떤 절대 불변하는 나만의 나라고 하는
어떤 신성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죽어도 그냥 있다.
이것이 죽어서
-소 속으로 들어가면 내가 소로 태어나고
-개 속으로 들어가면 개로 태어나고
-코끼리 속으로 들어가면 코끼리 태어나고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로 태어나고
요 신성이 윤회를 한다.
이거는 불변하다.
변하지도 않고, 쪼갤 수도 없고,
이거는 괴로울 수도 없어.
요 존재 자체는 괴로울 수가 없이
이거는 즐거움이고
이거는 더러울 수가 없어, 부정할 수가 없으니 청정하다.
이걸 갖다가 상락아정이라 그래
-항상하고
-즐겁고
-나만의 나고
-이거는 깨끗하다, 청정하다.
이런 나가 있다.
근데 우리는 이걸 지금 모르고 있는데
이걸 내가 발견하면
이거를 내가 알면 이것이 곧 뭐다?
하나님과 같은 거다. 신과 같은 거다.
이게 우파니사드 철학이에요.
이게 범아일여라 그래.
범과 내가, 하트만과 브라만이 하나다.
이런 철학이 지금도 이런 게 많죠.
-하나님이 밖에 있다.
-아니다. 하나님의 일부가 내 속에 있다.
불교는 “내가 곧 부처님이다” 이런 말은 있지.
내가 “내 속에 부처님의 분신이 있다” 이런 말은 안 하거든요.
그 당시에 인도의 신성이
이렇게 아트만이라는 용어가 이런 의미로 쓰여지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깊이 관찰해 봤을 때
그런 아트만이라고 할 만한, 아라고 할 만한
불변하는 것, 성스러운 것, 즐거운 것, 나만의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리 살펴봐도 없다.
있는 것 같지만,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 같지만 실제는 돌지 않는다.
그것처럼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그럼, 왜 이런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냐?
그거는 나라고 하는 용어 때문에 그렇다.
그 ‘나’라는 용어는 한 가지 의미가 아니고
여러 가지 의미로 그때그때 막 쓰인다는 거예요.
‘나의 집’ 할 때는
그때 ‘나’, 우리 집 할 때는
그 ‘나’ 속에 나하고 우리 가족이 다 들어가는 거예요.
엄마하고 둘 사이에서
엄마, ‘나’ 할 때는 요것만 의미하고
우리 고향, 나의 고향 할 때는
그 속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내가 차를 타면
‘나는 승객이다’ 할 때는
그 차 탄 인연에 따라서 ‘나’가 승객이 되고
내가 엄마다 할 때는 딸하고 관계 맺을 때
내가 딸이다 할 때는 엄마하고 관계를 맺을 때
학부형이다 할 때는 학교와 관계를 맺을 때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서
아까처럼 서울 가는 길이
인천에서 살면 동쪽이 되고
수원에서 살면 북쪽이 되듯이
그 인연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불릴 뿐이다, 이 말이야.
‘나’라고 하는 어떤 고정 확정된 게 없다는 거야.
그렇게 불리지.
서울 가는 길이 어떤 고정 확정된 길이 없다.
그것은 그 인연에 따라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이리저리 방향이 나오듯이.
그래서 이 아트만이 있다는 데에서
아트만이라고 하는 그런 고정불변하는 실체라는 것은 없다.
그러면 뭐냐?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그렇게 작용을 한다.
그래서 그 작용을
아트만이라는 단독자가 아니라
그거를 작용으로 보면 한 다섯 가지 작용이 묶여져 있다.
뭘 보고 “오 저 불상이네.”
이런 보고 인식하는 작용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생각하거나 해서
뭘 안다, 정신 작용
나는 봤다, 나는 들었다, 이런 작용이 있다.
그럴 때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좋다 하는
이런 느낌의 작용이 있다.
그다음에 생각의 작용이 있다는 거예요.
안 보고도, 안 듣고도, 우리가 상상하잖아.
기억하고 생각하고 하는 작용이 있다.
그다음에 이 작용에 보면
먹고 싶다, 가고 싶다, 싫다 좋다, 해야지 말아야지 하는
이런 작용도 있다는 거예요.
어떤 행위를 유발시키는 작용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고 이것들의 아주 바탕이 되는
어떤 사물을 인지하는, 식이라는 작용이 있다.
그래서 이걸 뭐라 한다?
색- 수- 상- 행- 식
나라는 것이 하나가 단독으로 된 게 아니라
이런 다섯 가지의 연결된, 다섯 가지의 모임에 불과하지
여기 단독자라고 할 만한 거는 없다.
이게 무아다.
무상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
태양이 영원한 것 같지만
지금 내 기준에서 볼 때, 내 개념에서 볼 땐
요 짧은 기간 안에는 변하지 않으니까 영원한 것 같지만
우주적 시간에 보면
저것도 불꽃놀이처럼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진다.
그래서 ‘항상 하는 것이 있다’ 하는 거에 대해서
‘항상 하는 것이 없다.’
‘아’라는 것이 있다 할 때
‘아’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가
즐거움이라고 할 것이 없다.
즉 그거는 고(告)라 그래 고.
청량한 것이, 성스러움이 있다 할 때 부처님께서는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다.
성스럽다고 한 것이 없다 할 때는
무정이라고 안 쓰고, 부정이라고 썼어요.
즐겁다고 할 것이 없다.
이거는 그냥 고라고 썼어요.
그래서 우리의 몸에는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
우리의 느낌에는 즐겁다 할 것이 없다.
우리의 느낌은 고다.
우리의 몸은 부정하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지 않는다. 늘 변한다.
그래서 이 무상하다.
법은 진리라고 하는 것이 정해진 ‘아’가 없다.
그것은 인연에 따라 변하는 거다.
그래서 무아.
그래서 몸을 관찰하면 관신부정(觀身不淨)
느낌을 관찰하면 관수시고(觀受是苦)
마음을 관찰하면 관심무상(觀心無常)
법을 관찰하면 관법무아(灌法無我)
이런 말도 있어요.
이게 사념처관(四念處觀)이죠.
그러니까 이런 데서
무자, 부자, 비자
이거는 누군가가 이렇다 할 때
그렇다고 고정할 수가 없다.
아예 그런 게 없다가 아니라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
틀렸다가 아니라
동쪽이라고 고정할 수가 없다.
이런 의미로 무(無)자, 비(非)자, 불(不)자가 쓰이고 있다.
...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서
어떤 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뭐든지 다 부정한다, 이 말이에요.
예를 들면
-파란 신호등은 가는 거다.
-빨간 거는 못 가는 거다.
이거 원래부터 있었던 거 아니에요.
사람이 편리를 위해서 그렇게 만들었지.
만약에 교통사고 나서
사람이 지금 병원에 가는 게 급하다
그러면 빨간 신호등이라도
무조건 빨간 신호등에도 갈 수 있다가 아니라
피해서 가야 된다.
근데 파란 신호등이라도
딴 차가 막 다니면
멈추고 있어야 된다, 사고 나니까.
그러니까 ‘절대화하지 마라’ 이런 뜻이지.
파란신호등도 뭐 가지 마라는 법도 없고
빨간신호등에 가라는 법도 없고, 못 가라는 법도 없으니까 막 다니자
이런 얘기가 아니다.
'법륜스님 > 즉문즉설(20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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