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자아 시리즈 part1] 진정한 나, 자기탐구를 위한 첫 번째 질문

Buddhastudy 2025. 3. 25. 19:33

 

 

지난 영상 등을 통해서

자유의지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봤습니다.

자 그리고 이제는

[자유의지의 주체로서 자아에 대해 탐구하는 단계]로 넘어왔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유의지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

바로 [자아]입니다.

사실 자아를 마지막 조건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최초의 선결 조건입니다.

 

자유의지를 논하기 이전에

나의 의지여야 하겠죠.

즉 주체인 나의 의지가 자유로워야 할 것이라는

전제가 만들어집니다.

 

그럼 자유로운 의지 이전에

나라는 것이 자유로워야 한다라는 건데

이 나의 자유를 가늠하기 전에 또 정의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된다를 논하기 전에

이 나는 누구일까요?

결국 자유의지 논쟁의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이 [의지의 주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로

귀결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그 내가 자유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죠.

 

자 그래서 드디어 그 유명한 자기 탐구

나는 누구인가?”까지 온 것입니다.

이쯤 되면 스스로가 기특해 보일 만합니다.

자부심을 느낄 만합니다.

왜냐면 드디어 철학적인 세계

보다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라고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게 함정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들뜰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자체가 사실 함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의 기본 명제였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자기 탐구 수행법의 유명세를 타고

널리 알려진 명제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명세 때문에

이 질문 자체에 은밀한 함정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유명한 명제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지레짐작하기 쉽습니다.

먼저 그 함정을 간파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사실 이 질문은 보편적인 해답을 낼 수가 없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라는 것은

정의되어 체험되는 대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누구]라는 단어는요

불특정한 인물,

혹은 특정하지만 정확한 신상을 알 수 없는 인물을 지칭할 때 쓰이는 의문 대명사입니다.

영어에서는 의문사 Who가 이와 거의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죠.

 

사실 원래 한국어에서 이 Who에 해당되는 표현은 그냥 누였습니다.

’, ‘

현대어 누구라는 거는 이 에 의문형 어미인 가 붙은 형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누고?’ 얘는 사투리처럼 많이 들어보셨죠?

현대어로 번역을 하자면 어떤 뜻이에요?

누군가그런 뜻이에요.

 

누고에서 마지막 모음이 변한 형태가

통째로 하나의 의문 대명사로 굳어진 것입니다.

누고누구로 굳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누구라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인물을 수식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의문의 화살이 주체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에 대해 이미 정의된 내용이 무엇인가?

그 주체가 어떤 것에 동일시 되어 있는가

그것에 대한 의문이 되는 것이에요.

 

즉 엄밀히 따지면

누구라는 것은 나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진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나라는 것이

이미 동일시된 어떤 대상에 대한 진술에 그치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홍길동이다라고 할 때

이 누구라는 말은

주체인 나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이라는 이름, 그 정체성에 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물에 대한 대명사이기 때문에

[누구]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어떤 사람이라는 전제]가 또 녹아 있게 되죠.

 

따라서 나에 대해 진짜로 알아보고자 한다면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무엇인가

이 무엇이라는 단어 또한 대명사예요.

 

자 그러나 누구와는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무엇

말하는 사람이 그 성격이나 내용에 대해

모르고 있는 물체나 물질 또는 일어난 현상 등을 가리켜

그것들의 정체를 묻는 의문 대명사이며

어떤 [대상을 특정한 것으로 국한하지 않고

막연하게 가리킬 때] 쓰는 부정칭 대명사예요.

 

따라서 무엇누구와는 다르게

문장의 주체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즉 의문의 대상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

[정체성 자체를 직접적으로 의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나는 홍길동이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이다라는 답도 도출을 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문인

나라는 것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 또한 성립시키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마지막 논점에 보다 어울리는 의문은

나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 인물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의지는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아니라

동일시를 통해서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될 수도 있는 이 나라는 것 자체가

일단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내려지는 답은

이미 구조적으로 [나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답을 낼 수가 없고]

끝없이 이미 규정이 끝난 것

동일시가 일어난 것만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에고의 자기 규정만 늘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이기 전에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자유의지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됩니다.

또한 이 지점부터 진정한 자기 탐구의 시작이 됩니다.

 

즉 자연스럽게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 탐구의 최상급 주제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자유로운 의지일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은

의지의 주체인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느냐?라고 말을 했었죠.

그럼 이 를 자유의 조건에 대입을 해보겠습니다.

 

자유의지 시리즈 첫 영상에서 자유에 대해서 뭐라고 정의했었죠?

이거 다 기억하시죠?

만약 여러분 기억 안 난다면 다시 한번 보고 오셔야 합니다.

자유의 정의를 외부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말미암을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정의했었습니다.

전제예요, 이게.

 

이걸 똑같이 라는 것에게 한번 적용시키면

라는 것이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에서 나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자아

이 둘은 사실 차이가 있습니다.

 

[자아]는 스스로 자()와 나 아()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스스로 말미암아 있는 나혹은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나라는 뜻이죠.

철학적으로는 대상의 세계와 구별되는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를 의미를 하고

심리학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자아는 여러 가지 범주로 고찰이 가능한 개념이에요.

철학적인 범주, 심리학적인 범주, 종교적인 범주, 의학적인 범주

그 개념이 다 달라요, 조금씩.

반면에 라는 것은 매우 심플합니다.

나는 주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주체 그 자체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바로 [보편적인 주체]를 의미합니다.

 

상대적 세상의 기본 구조인 주객 도식에서

[주체 역할]을 맡는 것이 바로 입니다.

 

보편적인 주체성을 의미하는 이 라는 것이

어떤 모습을 입거나 무언가와 동일시될 때

여러 가지의 나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나는 나는

나 자체가 아닌 [조건에 의해 가공된 나]입니다.

대표적으로 자아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 자아를 스스로 말미암아 있는 나

혹은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나를 뜻한다고 했죠.

이때 스스로 있다혹은 스스로 자각한다라는 부분을

나로부터 한번 떼어보세요.

어떻게 되죠?

스스로 +

스스로를 자각하는+ 나가 됩니다.

 

수식하는 내용과 주체인 나가 분리되네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아 정체성을 표현하는 이 문장을 한번 볼게요.

나는 홍길동이다.’

이 문장을 잘 보시면

’ + ‘홍길동의 구조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하다이 문장도 잘 보세요.

’ + ‘이러이러함의 구조입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보편 주체인 나라는 것은

어떤 조건을 입은 자아라는 것 이전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수식어가 아니라 수식어에 의해 수식되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떤 수식을 하든 간에

[나라는 것은 자아 이전의 모습 원형에 해당하는 개념]이에요.

 

이를 적용하면

나는 누구다라고 말을 할 때

이 누구라는 것은 자아감각이고

그 이전에 나라는 것은 나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 이전의 보편 주체라는 속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재밌지 않으세요?

 

이제껏 별 생각 없이 나와 자아를 같은 것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사실 이 둘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면

인간 의식은 결코 내가 진짜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볼게요.

지금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나는 누구지?” 질문해 보세요.

 

여러분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 홍길동이지

나는 이러이러 하지

이렇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걸 분석을 해보면

가장 먼저 이 [‘라는 느낌은 몸에] 찰싹 붙어버릴 것입니다.

몸에 딱 붙어 있어요. 잘 보세요.

 

그래서 사실 나는 누구지?”라고 질문을 하고는 있지만

그 질문을 해부를 해보면

이미 그 [질문 안에 이 몸이 나다라는 느낌이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몸이 나오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지?”라는 이 질문은

사실 이 몸은 누구지?”라는 의문이 되어 버립니다.

 

나를 이미 몸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이 상태에서

이 몸이 누구지?”를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의문은

라는 것의 진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질문이에요.

이미 몸에, 그리고 이름에, 또 뭐예요?

그 이름이 가지는 수많은 사회적인 역할에

동일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 이름, 사회적 역할, 등과의 동일시를

떼어내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기 탐구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나]에 닿지 못합니다.

그저 이미 무언가와 [동일시되어 가공된 2차 생산물인 자아]를 만날 수 있을 뿐이에요.

 

정리하자면

나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체 역할을 하는

보편적인 주체성

그 자체를 의미를 하는 것이고,

자아라는 것은

임의 어떤 조건에 의해 규격화된 주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이 좀 오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고 말을 할 때

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와 이미 동일시된

어떤 관념에 이미 수식되어 만들어진 자아입니다.

 

나에게 익숙한 나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실 나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와 결합해 나타난 일종의 감각 [자아 감각]입니다.

 

자유의지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로운 의지란

자아의 의지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아가 외부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는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나와 자아라는 것은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홀로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반드시 대상과의 관계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하나의 관념이에요.

그렇다면 뭐예요?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네요.

 

[]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 아닌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단 나와 나 아닌 것이 구분되어야 하고

그 관계에서 나라는 [주체 역할]을 맡게 되는 무언가에게

[자아 감각이 발생]하게 됩니다.

발생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신생아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자타구분이 없어요.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은 주객미분의 세계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태어났다는 인식조차 사실 없어요.

그저 엄마 뱃속에 있다가 외부로 나왔을 뿐이죠.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요.

그러니까 갓 태어났을 때.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몸이라는 감각이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몸의 느낌에 나라는 주체성이 동일시]되면서

내가 있구나

나는 이 몸이구나라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자아 감각의 시작이에요.

개체적인 자아의식의 시작이에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조차 꾸지 않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는 그 순간

한동안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아 감각이 없어요.

이 순간이 의식적으로 볼 때는 [순수 존재 상태]에 해당합니다.

그저 존재 감각만 있지, 자아 감각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이 상태에서의 자아는

객체적인 자아의식이 아닌

우주적 자아의식, 혹은 보편적 자아의식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 몸하고

나라는 주체 감각의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그제서야, 그러고 나서야

어 나는 누구 누구고 지금 침대에 누워 있다라는 인식이 일어납니다.

이때가 바로 [대체적 자아의식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잠을 잘 잤네, 못 잤네

아이고 회사에 늦었네, 늦지 않았네를 따지게 되죠.

 

이 두 가지 간단한 예를 살펴보면

자아라는 것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나요?

그렇지 않죠.

 

자아 감각은 몸에 있어야 발생하며

그 몸에게 부여된 수많은 조건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갑니다.

나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것은 반드시 나 아닌 것이 있어야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가 되든, 자아가 되든

스스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네요.

어찌 보면 뭐예요?

나를 나에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것이 나를 성립시키는 것이네요.

즉 나라는 것도

그 나가 한 몸뚱이에 동일시되어 만들어진 자아라는 것도

다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네요.

 

따라서 자아는 타인으로부터

타 존재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남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고

동시에 나 또한 남을 낳습니다.

나와 나 아닌 다른 것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성립시켜주는

상호 의존 관계, 연기 관계에 있게 됩니다.

 

다시 자아로 돌아와서

이 자아가 자유롭기 위한 첫 번째 조건

외부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음이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네요. 그렇죠?

오히려 무엇에 구애받고 있습니까?

전적으로 대상에 구애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결국

[주객도식이라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인 것입니다.

무언가에 의해 영향받아 자아가 발생을 하고 있다면

그 자아는 애초에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조건이라는 구속에 의해서 생겨난 이 존재의 의지가

자유로운 의지일 수 있을까요?

 

의지와 행위는

수많은 조건과 환경에 영향받아 만들어짐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아 또한 마찬가지예요.

자아가 조건과 환경에 의해,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자아 정체성에 끝없이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애당초 의지의 주체인 나의 자아가

조건에 의해 혼란스러운 마당에

그런 존재의 의지라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당신의 의지를 잘 살펴보세요.

자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서

이리저리 변하고 흔들립니다.

 

의지는 자아의 상태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고

자아는 조건과 환경에 의해 규정된 자기 정체성에 따라 또 이리저리 변합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자유로운 자아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것은 하나의 환상입니다.

개념일 뿐입니다.

 

그럼 이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환상으로부터 이 환상이 있어야지만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피어날 수가 있어요.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씨앗이

이 환상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콘텐츠를 기획을 하면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자유의지에 이어서 자아 탐구로 이어지는

이 주제가 주제인 만큼

가볍게 다루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다각도로 조명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왕 선정한 주제인 만큼

피상적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전달을 하고 싶었어요.

조회수를 포기하더라도 말이죠.

 

자유의지에 대한 콘텐츠들은

이미 인터넷 상에서 쉽게 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용 콘텐츠라고 해서

모두 보기 쉬운 내용들만 담고 있다면

또 진지하게 공부하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큰 영향가가 없을 수 있죠.

 

자유의지에 이어서

자아 탐구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는

진지하게 보다 깊게 공부하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니

저희 마음도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한 주제의 마무리가

또 다른 보다 고차원적인 주제의 포문을 연 것이죠.

 

그러니 이 시리즈 영상들은

개별적으로 끊어서 보지 마시고

최대한 연결해서 보시면서 사유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여러분

비이원성에 바탕을 둔 진리 탐구와 현실창조의 조화

라이프로 시딩 채널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느긋하게 공부해 보세요.

느긋하게 조급하지 마시고

 

, 그러면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영상에서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