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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어떻게 형성되고 확장되는지,
그리고 자아 관념이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유의지와 자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집니다 [00:12].
*인간은 타인과 대화할 때 자신과 관련된 단어를 많이 사용하며,
이는 자아 감각에 기반합니다 [02:28].
*자아는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는 의식에서 시작되며,
개인 자아는 보편적인 주체성에서 비롯됩니다 [05:59].
*자아는 움직임을 제어하고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의되며,
이는 통제력과 자각이 닿는 범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09:29].
*자아는 몸과의 동일시를 통해 확장되거나 유지되며
이는 분리감과 생존 본능에 기인합니다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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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시리즈에 이어서
자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의지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듯 보일 테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왜?
자유의지와 자아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주제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는 분기점이죠.
그래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해
자연스럽게 [인간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는 것을
영상 제작 목표로 잡았습니다.
자, 인간의 의지가 자유의지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
바로 자아예요.
무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시리즈 형식으로 지겹게 살펴봤던 이 자유의지 논쟁의 본질이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의 자유인가?/
자유의지 논쟁의 중심은 애당초 처음부터
의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의 주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 볼게요.
전통적으로 인간은 의지 이전에
자아를 지닌 존재로 여겨져 왔습니다.
최근에야 여러 가지 과학실험을 통해서
이 자아하고, 의지의 서열이 조금 퇴색된 감이 있어요.
하지만 자아는 의지의 주체라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죠?
즉 이 의지가 자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한 이유도 사실 간단합니다.
의지의 주체가 가지는 자유를 증명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자유의지를 풀었으면 자유로운 의지가 되죠?
누구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뜻입니까?
나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자유의지 실험의 숨은 의도는
내가 자유롭게 의지를 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자아가 자유로워야 합니다.
만약 인간의 자아가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자아에 귀속되어 있는 의지 또한
자동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아는 항상 인간의 삶의 기준이었어요.
기준이며, 존재의 중앙 무대를 차지하는 그 핵심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럼 이렇게 중요한 자아의 실체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해 다각도로 공부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타인하고 대화를 할 때
가장 많이 사용을 하는 단어가 뭘까요?
이 단어라는 것은 곧 개념이니까
우리의 삶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이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언어심리학자들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요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90% 이상이
[나]와 관련된 단어라고 합니다.
혹시 이런 결과 예상 못하셨어요?
그럼, 이번 기회에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들을 잘 한번 관찰을 해보세요.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중 대부분은
3가지 형태의 자아감각
즉 I/ ME/ MINE에 기반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회사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들에게 물어봅니다.
“이 기획안 누가 했어?”
한 사람이 대답합니다.
“제가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획안이 상세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해요.
“너 이걸 기획이라고 한 거야? 처음부터 다시 해서 올려”
큰 충격을 받은 그 직원은 퇴근 후에
입사 동기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래, 그 기획안? 내가 했어. 내가 한 거 맞아.
그런데 아무리 부족해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어떻게 나(Me)한테 그럴 수 있어?
도대체 나(Me)를 뭘로 보는 거야?”
“혹시 너한테도 그래?”
“아니 나한테는 그래도 잘 해주는 편인 것 같다.
이번에 네게 하는 거 보고 놀랐지만
그런데 이 술잔 내 건가(Mine)?”
“아니 이거 내 거야 바보야”
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대화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대화 안에서
이 두 사람은 부지불식 간에
나와 관련된
그것이 확장되거나 변형된 표현들을 사용을 합니다.
뭐예요?
내가, 나를, 나에게, 이 표현들이죠.
주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사 전달에 크게 무리가 없는 우리 말보다
주어가 없으면 없는 주어를 만들어서라도 사용을 하는
영어를 비롯한 서양 언어의 경우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에요.
그래서 우리 영어 배울 때 영어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결국
나, 나에게, 나의 것, 이거밖에 없어요.
I, Me, Mine, 이런 것들밖에 안 들려요.
이 나, 나에게, 나의 것이라는 이 세 가지 표현이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자아의 3가지 모습]이에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것은
첫 번째 영상에서 말씀드렸던 보편 주체를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규정된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헷갈리지 마세요.
대체로 만 2세 때부터
아이들은 I, Me, Mine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이미 2살 경부터 나와 너에 대한 구분,
즉 주객이분의 의식이 명료해짐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 영상에서 본래
이 [나라는 것하고 자아는 다른 것]이라고 말을 했죠.
나라는 것은
상대적 세상을 인식하기 위한 기본 틀인
그 주객도식, 주체와 대상의 구조 안에서
주체 역할을 하는 성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립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주체적인 성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 영상에서는 보편적 주체성이라고 말을 했죠.
실제로는 뚜렷하고 독립적인 대상이 될 수 없는
보편적인 성질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 주체성이 이성과 지성, 감성의 발달에 의해서
하나의 몸과
그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신 심리 작용하고 동일시되어서
개인이라는 느낌,
즉 개체적 자아의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이 개인 자아가 마치 자신이 주체인 양 행동하게 됩니다.
즉 보편적인 주체성의 나라는 것에서
이 한 몸뚱이와 그에 동반되는 정신 작용에 국한된
자아감각으로 제한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자아가 나를 대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성장 과정은
주체와 대상에 대한 분리가 없는
주객 미분의 그 순수한 의식 상태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리시켜서 분별하는
이원적인 의식으로의 분열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간다라는 것은
영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오히려 본연의 전체성을 잃어버리고
전체의 한 조각의 자신을 가두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뭐예요?
몸은 성장하지만
의식의 순수성은 오히려 퇴보해 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몸의 성장이
순수성, 전체성의 차원에서는 퇴보하는 것이니까 역설적이죠.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는
다 깊은 의미와 숨은 이유가 있지만
이 의식의 비이원적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영성에서는
이와 같은 자아의 영역 확장과 자기 동일시를
[최초의 환상], [무명], [원초적 착각], [환영], [마야]라고 부르면서
진짜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헌데 자아현상을 가짜 나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나, 내 것, 나에게를 끈질기게 고집하는 자아는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주객미분의 전체성에서 주객이분의 상대성으로 변화하는 이 현상이
피할 수 없이
말 그대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겪어야 할 일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이원화되어 가는 과정 자체가
자연스럽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편적인 주체로부터 탄생하게 되는 개인적 자아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자아가 고집되고 있다면
이건 뭐예요? 단순한 고집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에 집착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숨은 이유를 차근차근 알아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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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와 같은 자아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탄생하고 확정되게 되는 걸까요?
자아라는 것을 간단하게 말을 하자면
내가 나라고 받아들여서
알아볼 수 있는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요?
인간의 정체성은 나에 대한 예측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예측이란 [범위]에 의해 좌우됩니다.
예측 능력은 예측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작동을 하죠.
그렇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나는 내가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인식 범위의 한계]까지로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영성적인 측면에서의 나는
이런 통상적인 한계를 완전히 초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말하기보다는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 선에서 살펴보는 거예요.
[나는 내가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고
예측을 할 수 있는 범위의 안쪽으로 안쪽으로 ]정의가 된다.
[개인의 나라는 관념 정의의 핵심]은
나를 나라고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나의 통제력과 자각이 닿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즉 내 손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에요.
내 손 안에.
타인의 생각을 알 수가 없고
타인의 몸을 내가 인식하고 통제할 수 없다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아감각은
내가 움직임을 통해
환경을 제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의 범위까지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가늠하는 기준을 보세요.
무엇을 기준으로 안팎을 나눕니까?
우리 몸의 가장 바깥쪽 경계 바로 피부입니다.
내 피부에 돋아나 있는 작은 솜털 하나까지 나라고 받아들이지만
그 경계선에서 한 치라도 멀어져 버리면
바로 외부라고 판단을 해버립니다.
내 솜털까지는 내 영향력이 닿고, 컨트롤 할 수 있지만
그 솜털로부터 0.1mm라도 떨어진 허공에는
이미 영향력이 닿지 않습니다.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영역부터는 나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아 또한 마찬가지예요.
/나는 스스로 움직임을 컨트롤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토 안으로 한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별이 개체적 자아의식의 시작입니다.
재미있는 연구가 있어요.
동물의 자아인식 범위를 측정하기 위해
어떤 연구에서 아기 원숭이 팔 끝에 막대를 묶어 놨어요.
그러면 이 아기 원숭이는
자기 팔이 닿는 범위까지가 아니라
/팔 끝에 막대기가 닿는 범위까지
예측 가능한 영역이라고 인식한다고 합니다./
뭐예요?
원숭이가 막대기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면
이제 나뭇가지 끝까지의 영역이 뭐가 되는 겁니까?
I, Me, Mine이 되는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인 나뭇가지까지를 나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반대로
없는 것을 고집하는 현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환상통이에요.
이게 헛통증 또는 환상통증이라고 부르는데
이 몸의 한 부위나 장기가
물리적으로는 없는 상태임에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감각을 말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뇌에서 느끼는 것으로 보고 있죠.
절단 후에 사지와 연결되었던 신경들이 스스로 재결합을 해서
신경 회로를 구축하면서 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는 이유는요.
자기공명영상이나 양자방출, 단층촬영 같은 영상스캔을 통해서 보면
환상통을 느끼고 있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동을 하는 것이 관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른쪽 다리 전체가 절단돼서
내 몸 전체로부터 분리된 경우에
“내가 무릎을 굽혀야지”, “오른쪽 발가락에 힘을 더해야지”와 같이
이전에 가능했던 이 움직임들을 제어할 수가 없게 됩니다.
더 이상 내 오른쪽 다리, 내 몸의 일부분이 아니게 됩니다.
절단된 오른쪽 다리는
물리적으로 이제 나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외부의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으로는 나의 오른쪽 다리에 통증으로 발생을 합니다.
신체 부위는 어떻게 됐어요?
없어졌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자아가 여전히 작용하는 경우
환상통이 발생합니다.
신체 부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거기로 전달되는 신경 체계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없는 통증이 발생하는 것인데
이처럼 지속적인 신호를 보내는 이유 또한 자아관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아에게는 무언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2살의 몸과 12살의 몸, 그리고 42살의 몸은 다릅니다.
변해갑니다.
몸과 마찬가지로 2살의 행위, 12살의 행위, 42살의 행위도 변해갑니다.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그 누구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변해 간다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때요?
12살의 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나요?
혹은 10년 뒤에 내 모습을 상상을 하면서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여기세요?
사는 환경, 생각하는 방식, 내 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인정을 하더라도
[나는 나이지 않습니까?]
즉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도 자아감각은 유지가 되네요.
이처럼 [자아]관념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구심점으로 삼아]서
[그 구심점]에 보편적인 주체 감각인 [나와의 동일시]가 일어나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동일시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기도 하고
혹은 상실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동일시의 대상이 바로 몸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개인의 자아 관념이
기본적으로 몸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에요./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코어관념, 루시딩 플러스 2
관념 계급도 편에 좀 나와 있어요.
이 공부하셨던 분들 참고하세요.
그럼, 이 같은 현상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자아는 그 원초적인 이유를 지키기 위해 발생]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는 [분리감]이고
-두 번째는 [생존 본능]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발달시킨 기관이 바로 [뇌]입니다.
다음 영상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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