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상 자체를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희 비이원 시크릿 아카데미 카페에 올라와 있는
제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그런 영상을 한번 마련해 봤습니다.
첫 번째 테마는
비원성에 대해서 심화를 한번 해보는 거예요.
오프라인 강의에서는
아무래도 영상에서 불특정 다수를 만나야 되기 때문에
오프라인 강의에서 하는 내용보다는
조금 더 쉬운 내용으로 쉽게 쉽게 한번 가보겠습니다.
볼게요.
오늘 첫 번째 주제가 I AM THAT I AM이에요.
‘비이원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저희 카페에 보면
창조 원리에 올라와 있는 글입니다.
I AM THAT I AM이라는 문장 대중들한테 널리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네빌 고다드예요.
네빌 고다드가 I AM THAT I AM이라는 표현을
시크릿의 내부 원리로서 사용을 하면서 유명해지게 됐죠.
그런데 맞는 얘기입니다.
맞는 얘기인데 사실 이 I AM THAT I AM이라는 표현 표현은
그리스도교 성경에 나오는 표현이에요.
레벨 고다드가 만들어서 어떻게 쓴 그런 표현이 아니라
여러분들 오해하시면 안 돼요.
이미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교 성경에 정확하게 출애굽기 3장쯤에 나옵니다.
3장에 보면 그 유명한 모세가 하느님의 산, 호랩에 올라가요.
호랩에 올라가서 하느님을 만나는
이른바 모세의 신체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모세가 신을 체험하는 이야기죠.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떨기나무 한 그루를 봅니다.
그런데 그 떨기나무 한 그루가 불타고 있었어요.
불에 타고 있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나오죠.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마주친 모세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떨기나무에다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격화가 일어난 거죠.
인격화, 의인화를 시켜서 그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신적인 존재임을 직감을 한 다음에
묻는 장면이 나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모세가 묻게 되고
그 떨기나무가, 그러니까 하느님이
모세한테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I AM THAT I AM”
이 문장이에요. 이 문장.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문장이 되는 거죠.
I AM THAT I AM이라는 이 하느님의 대답은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어 왔습니다.
나열을 한번 해보면
-심플하게 나다
-나는 나인 자 그로다
-혹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이 정도로 번역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I AM THAT I AM이라는 그 영어 문장을 그대로 번역을 해보면
[나는
내가 나라고 규정하는
그것이다] 라는 뜻이에요.
결국엔 뭡니까?
I AM THAT I AM이라는 그 하느님의 대답, 하느님의 이름은
내가 나라고 규정하는 그것이다.
나는 나라고 규정하는 그 모든 것이다라는 뜻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느님이라고 그러면 조금 동떨어진 존재
하느님을 인식하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들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타자로서 고백이 되어왔어요, 생각이 되어 왔어요.
하지만 성경에서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의 정체가 뭐라는 뜻이에요?
I AM, 나 라는 뜻이에요.
I AM 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 되고, 하느님의 정체가 됩니다.
그래서 IAMness라는 순수존재의식을
신의식이라고도 불러요, 신의식.
다른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I AM이라고 증명을 해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한테 너무나 익숙한 사고방식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의거하면
하느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은 동떨어져 있어요.
전적인 타자로서 고백이 됩니다.
신이라는 것은.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하느님의 대화를
비이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게 완전히 다른 말로 들립니다.
모세가 하느님한테 묻는 장면이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하느님이 대답을 하죠.
“나는 나다 I AM THAT I AM ”
이 장면이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를 하다가 어떤 깨달음에 이르는 그 순간을
이렇게 대화 형식으로 문학적으로 묘사를 해놓은 거예요.
불교에서 화두를 수행합니다.
‘이 뭣고’라는 화두를 수행합니다.
‘이 뭣고’라는 화두를 수행하다가
자기가 무엇인지 ‘이 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팍 하고 피어나는 순간과 동일한 거예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나다’라는 대답하고
‘나는 나 스스로 나라고 규정하는 그것이다’라고 대답하는 이 순간이
‘이 뭣고’라는 화두를 들다가 팍하고 깨달음이, 앎이
깨어나는 순간과 동일한 것이에요.
다만 문학적으로 대화 형식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딴 게 아니라 성경 안에서 이미 신의 이름이
I AM, 나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I AM의 정체가 순수존재의식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순수존재의식이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를 하면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감이에요.
근원적인 존재감으로써 의식을 수행하는 명상 전통들이 있죠.
그런 수행 영성에서 순수의식 혹은 존재의식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게 명상을 깊이 해보신 분들은 알아요.
개체적인 존재로서의 나라는 존재감이
의식 안으로 깊숙히 침잠에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개체성 자체가 사라집니다.
자체가 사라지면서
보다 비인격적인 어떤 전체적인 의식, 편재하는 의식, 전체적인 앎으로
그 형태가 변해요.
본질적으로 그러니까 질적인 도약이 일어나는 거죠.
의식에 질적인 도약이 일어납니다.
깊이 깊이 명상을 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나는 무엇이다’라는
무언가와 동일시되어 있는 어떤 나에 대한 규정이 있어요.
나는 이 몸이다. 그렇죠?
이것 자체가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변할 때 만나게 되는
나다라는 그 근원적인 존재감이 있어요.
내가 있음이라는 존재감
이것 자체가 우리의 본래 모습이고
이것 자체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만들어 낸 하느님이란 얘기예요.
신이란 얘기예요.
기존에 종교에 익숙하신 분들한테는 조금 충격으로 다가오죠.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워낙에 이제까지 이분법적이고 이원적인 어떤 도식 안에서
그 고정관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지만 이러한 고정관념 하나가 깨어지게 되면
나의 인식, 나의 관점에 어마어마한 확장이 일어납니다.
말 그대로 폭발적인 확장이 일어나고
나중에 가서는 ‘메타노이아’라고 부르는 관점의 전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원적인 눈에서
비이원의 눈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바뀌게 되는 거죠.
이 순수존재의식의 상태는요.
‘나는 무엇이다’라는 그런 느낌 자체가 사라져요.
‘나는 무엇이다’라고 동일시돼서 한계를 짓고 있는 그런 느낌 자체가 사라집니다.
순수한 존재의 느낌만이 남게 돼요.
아주 순수한 인식이에요.
이 지점이 바로 순수존재의식의 상태인 거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순수한 존재 의식 안으로
스스로에 대한 ‘나는 무엇이다’라는 자아 정체성 자체가
녹아들어 버린 상태인 겁니다.
재밌죠.
결론은 뭐예요?
인간이 깊은 명상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순수한 존재의식의 상태
이것을 성경에서는 이 상태를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딴 게 아니라.
결국엔 뭡니까?
인간이 인간 의식 자체가 깊이깊이 침잠하고 주파수가 높아지면서 고양됩니다.
고양되면서 의식이 성숙하게 되죠.
이렇게 깊은 의식의 고양 안에서 경험되는 상태가
하느님의 정체이며 하느님의 이름이라면은
결국엔 무슨 뜻이에요?
인간이 뭐라는 얘기예요?
인간이 하느님의 현현이라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영성 전통 중에서
‘나는 하느님이다’ ‘나는 신이다’라고 말할 때
이 나가 바로 이 순수존재의식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개체의 존재와 동일시되어 있는
딱 붙어서 ‘나는 이 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리고 이 개체 존재로서의 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가 말을 하는 ‘나’
예수는 ‘나’에 대해서 엄청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따르라’ 그런 거 있죠.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막 이런 표현들 있죠.
이 나가 죄다
개체적인 존재로서의 나자렛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수존재의식으로서의 근원적인 존재감
순수의식 나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믿을 수가 없죠.
그렇다면은 뭘 하면 됩니까?
증명을 하면 됩니다.
순수존재의식이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면 되고
결국에는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사유를 하면서 증명을 해나가면 되는 거예요.
결국은 뭡니까?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말씀드리는 하느님의 정체로서의
이 신의식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이렇게 인간의 개체의식은 ‘나는 누구인지’를 찾는
그리고 마침내는 하느님에게 도달하게 되는 유일한 여정인
비이원성의 앎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거죠.
이 여정이 시작되는 동기
그다음에 그것이 펼쳐지는 과정은 개개인마다 달라요.
왜냐하면 개개인마다 현실 출력의 회로들
카르마가 구성되어 있는 그 모습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깨달음이라는 게 드러나는 형태와 드러나는 과정들이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달라요.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단 하나의 진리가 있겠죠.
그 단 하나의 진리에 모두 동일하게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고금의 모든 영성들이
결국 하나의 진리를, 하나의 진실을 이야기하게 되어 있는 거죠.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테마에 대해서
한번 탐구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나’
나가 무엇인가?
나가 무엇일까요?
이전 영상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나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입니다.
어떤 식으로 나에 대해서 정의를 하더라도
결국 나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볼 때 뭡니까?
나라는 것은 내가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보는 주체가 되는 거예요.
보통 이 몸이라고 생각을 하죠.
‘나는 듣는다’ 할 때 이 내가 됐잖아요.
몸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듣는다라고 상정을 하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듣는다’라는 인식의 주체인 거예요.
맛본다, 만진다, 느낀다, 생각한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인식 행위의 주체가 바로 나가 되는 거예요.
걸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움직일 때도 마찬가지로
일을 할 때, 밥을 먹을 때, 행위를 할 때
이 행위라는 것이 인식이 되죠.
행위하는 주체이며 동시에 인식하는 주체가 나가 되겠죠.
감정들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기쁘다, 슬프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키가 크다 작다, 나는 뚱뚱하다 날씬하다, 뭐 이런 못 생겼다 잘생겼다
여러 가지 그런 잣대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뭐예요?
인식이에요.
그 인식되는 내용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를 나로 설정을 해놓고서
나를 찾는 여정을 한번 논리적으로 사유 해보는 거죠.
이제까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탐구의 수행은
전통적으로 어떻게 직관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그게 컸어요.
하지만 그러다 보니까 뭡니까?
우리의 이성 자체가 납득을 잘 안 하죠.
납득하는 그게 더뎌요.
그러다 보니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앎 자체가 깨어나는 그 시간이
앎이 딱 깨어나는 그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막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논리적 사유를 통해서, 이성의 납득을 통해서
이 앎을 완성시키는 거죠.
지금 저희가 알아보고 있는
자기 탐구의 내용을 통해서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인간 존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무엇을 인식하고 하든지 간에
그것은 인식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존재합니다.
인식을 통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아는 거죠.
그러니까 앎을 생성하는 형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이러한 모든 인식의 내용 행위를 아는 자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보는 자이고 아는 자, 인식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나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 인식의 주체를 찾아보는 겁니다.
이 나를 사유로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찾을 때 한 가지 대전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마치 이 눈이
보는 주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면서도 스스로를 볼 수는 없죠.
자기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거울 빼놓고, 거울로 보지 않고 자기 눈 자체를 대상으로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코도 마찬가지예요.
개중에 이런 분들 계셔서
‘저는 제 코 냄새 맞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죠.
그런 뜻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대상으로서 나타날 수 없다라는
어떤 그런 도식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인 겁니다.
제가 ‘손은 모든 것을 만지지만 스스로를 만질 수 없다’라고 그랬더니
‘저는 제 손 만지는데요. 이렇게 만지는데’
뭐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이런 게 아니에요, 이런 차원이
표현이 조금 서툴렀던 거죠.
눈으로 돌아가 볼게요.
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봅니다.
지금 여러분들 귀로 듣고, 그다음에 눈으로 이 화면을 보고 계시잖아요.
눈은 모든 것을 보는데 자기 자신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이유는 뭡니까?
눈 자체가 보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식작용이라는 하나의 현상 안에서
눈은 보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으로서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심플하죠.
그 얘기는 뭡니까?
주체는 대상이 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이게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이유죠.
이 도식을 대입해서 나를 찾아보면 돼요.
어떻게 찾습니까?
인식의 대상으로서 포착되는 그 모든 것들은
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배제시켜 나가시면 돼요.
사유를 한번 시작을 해볼게요.
카페 글을 통해서
카페들을 못 보신 분들도 계실 테니까
처음에 하늘부터 가볼게요.
하늘 한번 봐보세요.
하늘 좋죠?
미세먼지로 덮여 있든 아니면 청명한 하늘이든
하늘
인식의 대상이죠.
인식의 대상이라면 무슨 얘기입니까?
하늘은 내가 될 수 없는 거예요.
바다
바다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바닷가에 사시는 분들은 바다를 보셔도 돼요.
만약에 도시에 사시고 바다 가까이 안 계신 분들은 그냥 바다를 떠올려보세요.
기억으로 심상으로.
떠올려보세요.
이 바다도 내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이유는 뭡니까?
인식되잖아요.
여기까지 쉽죠.
육체
이 몸이 과연 나일까요?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이 몸이 나일까요?
이 몸마저도 어떻게 됩니까?
인식이 됩니다. 인식이 돼요.
보이기도 하고요. 자세히 귀 기울여 보면 몸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느낌도 느껴지고요. 그렇죠?
몸이 있다라는 감각으로서 어쨌든 지각되는 대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도 결국엔 뭡니까?
육체도 내가 아닌 겁니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지만 이 몸은 내가 아니에요.
그럼, 감정 한번 볼게요.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
감정, 인식되죠? 무슨 얘기예요?
내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생각
생각 머릿속에 떠다니는 여러 가지 생각들
아무리 고상하고 삐까번쩍한 생각이라도 그거 뭐예요?
모두 인식되죠.
무슨 뜻입니까?
내가 아니에요.
그러면 조금 더 형이상학적인 부분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럼 나일까요?
몸도 내가 아니고 생각 감정 느낌도 내가 아니고
마음
마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를 하든지 간에
개념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해당하는 상이 하나 생겨납니다.
인식의 대상으로요.
무슨 얘기입니까?
마음이라는 것도 인식되는 거예요.
결국엔 뭡니까?
내가 아니에요.
그럼 영혼,
영혼이 나일까요?
원래 영혼은 ‘영’이라는 단어하고 ‘혼’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인데
앎과 그 느낌의 합성어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다’라는 어떤 느낌인데 그것을 아는 앎
그것 자체가 영혼의 실체거든요.
이것도 뭡니까?
내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니까요, 주체는.
결국엔 뭐예요?
영혼이라고 우리가 상정하는 것도, 우리가 느끼는 것도
인식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나일까요?
인식되잖아요.
자기 자신에게 부여되어 있는 온갖 타이틀들
그다음 온갖 정체성들
나는 누구 아들이고, 누구 아빠고,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부인이고, 누구 딸이고 뭐 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어쩌고 저쩌고
수많은 정체성들이 그럼 나일까요?
인식되잖아요.
어떤 식으로든지 인식이 됩니다.
그래서 뭐예요?
인식의 대상인 거예요.
그렇다면 뭡니까?
인식의 주체인 나는 아니란 얘기에요.
증오, 기쁨, 슬픔, 행복 뭐 이런 모든 것들
인식되는 일체의 것들은 어쨌든 간에 대상이기 때문에
내가 아닙니다.
볼게요.
행복이라는 얘기 나왔어요.
궁극의 행복, 궁극의 지복, 뭐 그것이 나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인식되잖아요.
지복의 상태, 궁극의 행복의 상태, 평정 지복의 상태
아니면 심지어 순수 의식으로 내려가서 이렇게 쫙
존재감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상태
그리고 뭐가 되더라도 결국엔 뭡니까?
인식되죠.
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명상 수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영적 체험
뭐 그런 것들이 나일까요?
될 수가 없죠.
내가 아니에요.
나에게 나에 의해서 인식되는 대상인 거죠. 그것도.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영적 체험도 내가 아니에요.
의식을 수행하다가 보면
경험하게 되는 텅 비어가지고 고요한 의식의 평정지복한 상태
아까도 말했지만 인식됩니다.
내가 아니에요
텅 비어 충만한 어떤 상태
깊은 고요.
내가 아니에요 왜?
인식되기 때문에.
이렇게 배제를 시켜 나가다 보면은
이름이라는 거, 이름을 가진 것
그건 뭡니까?
개념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름이 부여되고 개념 지어진 것들은
그 무엇이 되더라도 내가 아니다]라는 얘기입니다.
충격이죠.
모조리 인식의 대상이에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무형상의 그것이다.
네 좋습니다.
무형상의 그것이라고 말을 하는 순간 뭐가 돼버려요?
그것마저도 인식의 대상이 돼버리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을 가졌잖아요.
개념을 가졌잖아요.
무형상, 형태 없는 것이라는 그 이름을 가진 거예요.
인식의 주체는 결코 인지될 수가 없습니다.
아쉽게도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인식이 된다면 그것은 대상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그 무엇을 가지고 ‘나는 이것이다’라고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인식의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 안으로 들어와 버린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만나게 됩니다.
인식의 주체인 나가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식의 주체는 없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될까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나는 없다’ ‘나라는 것은 없다.’
근데 이걸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있다 없다, 유무의 형태로 인식이라는 것을 규정지으시면
오류에 빠지게 돼요.
인식의 주체가 없으면 인식은 어떻게 일어나는 거겠어요?
인식의 주체라는 것은 있어요.
나라는 것은 있습니다.
근데 어떻게 있느냐?
[대상으로부터 따로 떨어져서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라는 엄청난 사실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인식의 주체라는 건
따로, 독립적으로 인지가 될 수는 없지만
항상 있어요.
인식의 주체로서의 나라는 느낌이 항상 있기 때문에
인식 작용이 일어나는 거예요.
다만 대상으로서 포착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대상으로서, 인식의 주체인 나를 포착할 수 없다면
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몸 안에 있을까요?
몸 밖에 있을까요?
다른 차원에 있을까요?
그게 아니에요.
지각하는 대상 그 자체에, 인식의 대상 그 자체에
항상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요?
인식의 주체라는, 나라는 느낌의 형태로 항상 드러나 있는 거예요.
지각의 대상, 인식의 대상에 항상 드러나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결국엔 뭡니까?
인식의 주체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해도
인지되는 순간 그 대상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이에요.
마지막까지 끝까지 남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인식의 대상이 곧 인식의 주체와 같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나의 착각인 거예요.
보는 놈으로서의 나와
보이는 대상, 인식의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라는 이 느낌 자체가
하나의 착각이라는 얘기예요.
결국엔 뭡니까?
[나라는 것은 애시당초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얘기입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얘기예요.
이를 일컬어 가지고 [비이원]이라고 부르는 거죠.
이 인식의 대상이 모두 나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식되는 모든 대상이
동시에 인식의 주체란 얘기이며
인식의 대상 자체가 인식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불 이, 비이원이라고 부르는 거죠.
인도의 수많은 아드바이타 성자들이
‘마지막에 남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마지막에 남는 게 뭐냐 하면
끝까지 결국은 대상만 남거든요.
이 대상 자체가 바로 우리가 찾는 그것이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어찌 됐든 간에
인식 안에서 드러나 있는 세상 안에서는
인식의 주체 자체를 따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인식의 주체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그 인식의 주체는 사실
인식되는 모든 대상 그 자체였다라는 얘기예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그런 진실이죠.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인식의 주체가 그대로 인식의 대상]입니다.
[내가 그대로 인식되는 모든 것]이에요.
나중에 또 공부를 또 깊이깊이 해나가겠지만
이 ‘나’라는 것은 일종의 허수가 되는 것이죠, 허수.
인식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이라는 삼위일체의 인식작용의 도식을
성립시키기 위해 나타난
하나의 [허수]예요.
그런데 이 허수가 있어야지만 세상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드러나죠?
개체 존재라는 고유 우주를 통해 체험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어요.
이 허수가 있어야만.
그러면 뭡니까?
허수, 허깨비라는 얘기예요.
나 자체가.
독립되어 있는 나 자체가 따로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허깨비에게 보여지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뭐라는 얘기입니까?
헛깨비라는 얘기예요.
허상이에요.
그래서 꿈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환영이에요. 환영]
정리를 해볼게요.
나라는 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있죠?
하나의 허수로써 있어요.
환영으로, 환과 영의 형태로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이에요.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라는
이 하나의 착각, 이 하나의 생각의 형태로 있는 것이 나예요.
사실은 뭡니까?
나라는 것은 우주 전체인 거죠.
인식되는 세상 그 자체가 바로 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나에 대한 정체성의 지평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지는 거죠.
이 작은 몸만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다가
이제는 어떻게 돼버리는 겁니까?
온 세상 자체가, 온 우주 자체가 나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 나가 뭐라고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이름, I AM의 현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요?
THAT I AM의 형태로.
순수존재의식인 I AM이
자기 자신을 ‘나는 이것이다’라는 형태로 규정하여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듯이
바라보고 있을 때 나타나는 세상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지금 체험하고 계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에요.
인식의 주체가 인식의 대상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
엄청난 사실인 거죠.
이 모든 것이 나라는 사실
성경이 이 나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라고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결국엔 뭡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작은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 모든 것이고
우리가 바로 하느님, 현현입니다.
하느님의 현현이죠.
결국엔 뭡니까?
나라는 것은
나 아닌 것을 따로 가지지 않는 전체성으로서의 나예요.
그런데 그 나라는 것이 작용을 할 때는
나 아닌 것
그러니까 남이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나타나서
마치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분리되었다’라는 착각이 있어야지
이원성으로 표현되는 세상이 드러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잘못된 게 아닙니다.
나를 찾아가는 사유에 대해서
오늘 좀 간략하게 알아봤습니다.
본래는 제대로 공부하려면
깊게 깊게, 깊게 깊게, 천천히 사유하시면서
내면으로 한번 들어가 보셔야 돼요.
이 영상을 통해서는
어떤 식으로 사유를 할 것이며
어떤 식으로 찾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일종의 가이드처럼 말씀을 드리는 거죠, 다른 게 아니라.
이 영상을 보신 여러분들
오늘 당장, 지금 당장
한번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찾아가 보세요.
느껴보세요.
인식의 대상으로서 드러나는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될 수 없다라는 전제하에
차근차근히 천천히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 찾아가 보세요.
그게 제가 이 영상을 만든 이유입니다.
파이팅!
다음 시간에 또 다른 영상으로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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