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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알려드림) 그는 정말 낙제생이었나? 아인슈타인에 대해 당신이 몰랐던 8가지 사실

Buddhastudy 2025. 4. 17. 19:47

 

 

  • 아인슈타인은 어릴 적에 공부를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며, 그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했습니다 [00:22].
  • 아인슈타인의 혀를 내미는 사진은 그의 괴짜스럽고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01:56].
  • 아인슈타인은 대중 강연회를 귀찮아해서 운전기사에게 대리 강연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02:39].
  • 아인슈타인은 보험 회사에 다니다가 해고당하고, 동창의 도움으로 특허청에 취직했습니다 [04:03].
  •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틈틈이 연구를 계속하여 놀라운 업적들을 세웠습니다 [04:41].
  • 아인슈타인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으며,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습니다 [05:32].
  •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 대통령직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07:31].
  • 아인슈타인의 뇌는 일반인보다 특정 부위가 컸으며, 사후에 무단으로 적출되어 연구되었습니다 [07:43].

 

 

 

--1. 어렸을 적 공부를 못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인 아인슈타인

그는 지금까지도 천재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 아인슈타인이

어릴 적엔 공부를 잘 못했다는 일화가 종종 떠도는데요.

이는 잘못된 사실이고

사실 아인슈타인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겁나게 잘했습니다.

 

그는 1점부터 6점으로 평가받는 스위스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에서

수학이랑 물리학 분야에서 모조리 최고점인 6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서는 성적 표기가 점수제가 아닌 등급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성적표를 본 독일 사람들이 일부 오해를 했는데요.

점수제가 아닌 등급제로 오해해서 6등급,

즉 낙제 등급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와전되어

마치 어릴 적에 공부를 못한 낙제생이었다는 일화가 떠돌게 되었습니다.

아 물론 낙제를 한 적이 있긴 있는데

대학 시절 기초물리학 실험 수업에 출석을 자주 빼먹어서 낙제를 했다고 합니다.

뭐 기초물리학이 너무 시시했나 봅니다.

 

 

--2. 인생 사진

 

아인슈타인은 헤어스타일, 표정, 주름, 눈빛

이런 독특한 외모가 주는 천재의 이미지 때문에

대중들에게도 얼굴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진들이 남아 있는데

특히 이 혀를 내미는 사진은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메롱 사진이 아닐까요?

 

아인슈타인의 72세 생일 파티가 있던 날

사진 기자들이 끈질기게 포즈를 요구했고

평소에 사진 찍기를 귀찮아하던 아인슈타인은

심드렁하게 차에 올라서 문을 닫았습니다.

대부분의 사진 기자들이 멋진 사진을 담는 걸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기자만이 남아서 끝까지 기회를 노렸는데요.

이때 아인슈타인이 갑자기 창문을 내리고 혀를 내밀었던 것입니다.

그의 괴짜스럽고 탈권위적인 모습이 잘 담겨 있는 사진이 나온 거죠.

그리고 이 사진은 그 해에 뉴욕 신문 사진작가상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수없이 복제되면서, 세기의 걸작 사진이 됩니다.

 

아인슈타인 본인도 이 사진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사진 기자에게 9장을 프린트해 달라고 요청해서

친구들에게 보내주곤 했습니다.

그중 한 장은 2009년에 경매에서

7만 달러가 넘는 금액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3. 대리 강연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타고 나서 인기가 높아지자

대중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자주 열게 되었는데요.

이를 매우 귀찮아하던 아인슈타인은

하루는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게 한 다음에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테니까

나보다 말재주 좋은 네가 강의해라라고 하면서

실제로 운전기사에게 대리 강의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수준 높은 질문이 들어오면

이건 내 운전기사도 풀 수 있는 문제다라는 말과 함께

운전기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진짜 자신을 불러내서 문제를 풀게 했죠.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막스 플랑크 버전도 사실 있습니다.

어떤 버전이 진짜인지는

공식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여기서 유래한 운전자의 지식이라는 말이 현재까지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척만 하는 지식을 가르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4. 직장 생활

 

아인슈타인의 첫 직장이 특허청 심사관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보험회사에 취직해서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지도 교수가

그의 자만심과 불성실한 태도를 싫어해서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서

물리학적으로 취직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보험회사의 일이 굉장히 따분하고 월급도 적었던 지라

그는 투잡을 떼기 위해서 과외 알바를 시작하는데요.

이때 냈던 광고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인 교습, 수학과 물리학

전 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철저한 지도

이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공학 교사 자격증 소지

게레히티크카이츠 가 32번지, 1

시범 강의 무료

 

세계 최강의 과외 전단지 짤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알바 때문에 상사와 다투고 보험회사에서 해고당하는데요.

한동안 실업자 신세를 겪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인슈타인의 대학 동창이자

잘 나가는 가문 출신이었던 마르첼 그로스만이

백수인 아인슈타인을 돕기 위해서

아버지 빽으로 특허청에 취직을 시켜줍니다.

소위 말하는 낙하산 인사

바로 고위 공무원 부정 청탁을 통해서 특허청에 취직하게 되는 거죠.

 

참 현재까지의 행보만 보면 물리학 영재가

본인 재능 믿고 학교 불성실하게 다니다가

어떻게 인맥 발로 괜찮은 일자리 하나 구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 특허청 심사관 일을 하는 몇 년 동안

근무 외 자투리 시간에 그는 틈틈이 연구를 계속하는데요.

이때 세상을 뒤집을 만한 놀라운 업적들을 많이 세우게 됩니다.

 

특히 1905년에는 5편의 논문을 연속으로 발표하는데요.

그중 3편은 하나하나가 노벨상급이라고 평가받는 엄청난 논문이었어요.

-바로 브라운 운동,

-광양자 가설,

-특수 상대성 이론이죠.

세 가지 논문 모두 후대 물리학의 세부 학문을 만들어 낼 정도로

엄청난 논문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광양자 가설은

1921년에 실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습니다.

 

 

--근친(?) 재혼

 

물리학에서 엄청난 업적을 세우고 존경받는 그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존경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1903년에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와 결혼했고

16년 뒤인 1919년에 이혼하고 두 번째 부인 엘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위인전이나 교과서에는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까 가정에 소홀해서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와 이혼했다이 정도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하지만 실상은

그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립국으로 피신해 있던 도중에

엘자라는 여성과 바람이 나서

윌레바를 저버리고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엘자라는 여성은 바로 이종사촌 누나였다고 하는데요.

지금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친척 간 혼인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혼 뒤에도

자식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예요.

첫 번째 부인인 밀레바는 홀몸으로 고생하면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지적 장애를 앓고 있던 둘째 아들이 발작을 일으키면서

밀레바를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 일로 인해서 둘째 아들은

평생 정신병원에 수감 된 채로 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모두에게 존경받는 아인슈타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부분에서는

도저히 쉴드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결혼생활과 가족관계였습니다.

 

 

6) 대통령이 될 뻔하다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대통령직을 제안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나치로부터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은 이후에

그들이 직접 건국한 나라이며,

초대 대통령 자리에 누가 좋을지 고민 끝에

학계에서 전설적인 존재이자 같은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선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정치적으로도 활발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는데요.

1900년대 초부터 지적 자유, 인종차별, 원자 폭탄 등등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견해를 표현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대통령직을 사양했죠.

본인에겐 사람을 다룰 만한 능력도 경험도 없으며

정치가 물리학보다도 더 어렵다는 이유였습니다.

 

 

--7. 아인슈타인의 뇌

 

아인슈타인의 뇌는 현재까지도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뇌는 생각보다 크기가 크지 않지만

공간지각이나 수학 등을 담당하는 두정엽은

일반인보다 15%에서 30%가량 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뇌에 얽힌 황당한 일화가 있는데요.

아인슈타인은 원래 본인이 죽은 뒤에 화장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체 부검을 맡았던 프린스턴 병원의 하비 박사는

그에게 생전에 동의를 구한 적 없이

무단으로 그의 뇌를 적출하여

240조각으로 잘라내서 보관해 둔 것입니다.

 

상상해 보면 너무 끔찍하고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당연히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하비 박사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그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맞서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때 국내 TV 프로그램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룬 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연구를 위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고인의 동의도 없이 신체의 일부를 적출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8. 실패한 연구들

 

192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그의 광양자 가설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양자역학 태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유명한 그는

모든 상태가 확률로 결정되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끝까지 지지하지 않고

젊은 과학자들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또한 말년을 통일장 이론 연구에 바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기도 했으며

중력 방정식을 우주 전체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우주상수를 도입해서 연구하다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는

우주상수 개념을 폐기하고,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과학은 수천 수만번의 잘못된 접근을 통해서

단 하나의 올바른 접근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이룬 엄청난 업적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이상 인류 최고의 천재라 불리우는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당신이 몰랐던 8가지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너스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