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량이라 불리는 양주 지역에 대한
후한 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자
184년부터,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중심으로
양주의 난이 일어납니다.
반란군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는데
이들의 세가 확장되어 가는 동안
양주 반란군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으로 인해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비롯한 수뇌부 대부분은
한수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한수는 여러 지역 반란군들을 한 세력으로 통합한 뒤
왕국을 반란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고
한수와 마등은 의기투합하여 한나라 중앙 정부를 위협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서량의 난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장온을 면직시키고
명성이 자자한 황보숭과 동탁을 불러, 새로운 정부군을 구성했는데
총지휘권은 과거 황건적의 난을 진압했던 황보숭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동탁은 이러한 조정의 처사에 불만이 쌓였습니다.
동탁이 볼 때 황보숭은
초기 ‘서량의 난’ 진압 실패로 문책을 받고
이제 막 해임되어 복귀했는데,
혁혁한 공이 하나 없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리로 다시 부임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에 반해, 자신은 다른 관군들이 반란군으로부터 모조리 괴멸될 때도
동탁의 부대는 홀로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고 있어
내심, 한나라를 지켜낸 것도 다 자신의 덕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실패한 후 다시 겨우 전장에 돌아온 황보숭이
근래 들어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활약을 뛰어넘어
자신의 윗사람이 되는 지금 상황이 전혀 납득되지 않았던 겁니다.
이렇듯, 황보숭과 동탁은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전으로서의 실력은 뛰어나
이전에 장온이 이끌었던 정부군과는 달리
서량의 반란군들을 차례차례 진압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반란군 왕국이 퇴각할 무렵, 적을 섬멸하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황보숭과 동탁은 작전회의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습니다.
이 작전에서 황보숭은 왕국을 끝까지 쫓아 적을 섬멸하였는데
동탁은 후방을 지키면서, 모든 공은 황보숭에게 돌아갔습니다.
결과적으로 황보숭의 활약이 커지게 되자
동탁은 이전 상사인 장온에 연이어
황보숭에게도 시기와 분노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황보숭의 조카인 황보력은 반란군 진압 과정에서
동탁이 제멋대로 구는 행실을 보며
황보숭에게 동탁을 없애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선한 성정을 가졌던 황보숭은
직접 벌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처사이며, 조정에 보고만 올렸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동탁을 책망하며
동탁 휘하에 있는 부대를 황보숭에게 모두 넘기고
황보숭의 명령을 따르라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동탁은 자신의 부하들은 자신만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답하며
조정의 명령에도 끝까지 무시하는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동탁은 어떻게든 자신의 군사력을 계속해서 지켜나갔고
그러면서, 자신의 세력을 군벌화 해나갔습니다.
훗날, 동탁은 국정을 장악했을 때, 황보숭을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인해 목숨만은 살려주게 됩니다.
서량 지방에서 일어난 양주의 난은
앞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보다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해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비중이 매우 적었습니다.
하지만, 양주의 난이라는 사건 이후
한나라는 북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양주의 난, 초기 반란 세력 주동자들과는 달리
북서 지방은 한수와 마등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조정에서는 황보숭과 동탁을 출정시켜
우선, 혼란을 일단락하는 데 그쳤습니다.
한편, 황보숭이 진압을 맡기 이전 장온 휘하에 있던 손견은
장온이 물러남에 따라, 장온과 같이 낙양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장온 군대가 적과의 교전에서 싸운 공적은 없었기에
상을 받은 자는 없었는데,
손견은 누구나 눈치를 보고 있는 동탁을
직접적으로 참하라는 태도를 일관해 주목 받고 있었습니다.
동탁은 따르는 부하들이 그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충성심도 높았고
궁정 내부에까지 든든한 후원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동탁을 두고 이제 막 중앙에 얼굴을 내비친 손견은
이에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조정 내에서는 배포가 큰 젊은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정에서는 손견이 황건적에서 활동한 내역과
서량 반란군 진압 과정에서의 활동 등을 참작해
예전에 조조도 몸을 담았던 의랑직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의랑직은 황제의 질문에 답하거나, 건의하는 자리로
평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손견에게 이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187년 10월에 형주 장사(長沙)군에서
구성이란 자가 1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려
자신을 장군이라 자칭하며, 성읍들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이에, 형주자사와 장사태수는 대응을 해보았지만
구성의 무리를 막아내진 못했습니다.
구성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의 규모가 진압되지 않자
조정에서는 이를 막아낼 수 있는 새로운 태수를 임명했는데
이때, 의랑직으로는 그리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손견을 불러
장사의 새로운 태수로 임명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손견은 장사로 출발하기에 앞서
측근인 조무를 불러, 동료들을 불러모으자고 제안했습니다.
조무는 손견의 그림자처럼 항시 붙어 다닌 손견의 심복으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쌍검의 달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손견은 장온 휘하에 있을 때는 단순한 참모직이어서
별도의 군대를 거느릴 수가 없었는데
청년 시절부터 함께해 온 동료들은 대부분
황건적을 진압할 때부터, 주준 휘하에 계속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주준은 재생목록 삼국지 13편에 등장한 인물로
황건적에게 승전을 거두고, 그 공으로 우거기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흑산적이 크게 위세를 떨치며, 하내를 침략하니
조정에서는 주준을 하내태수로 임명해 장연에 맞서도록 했습니다.
손견은 조무를 주준이 있는 하내군으로 보내, 주준에게 양해를 구하여
손견이 가장 믿고 있는 동료들인 정보와 한당을 빼냈습니다.
이들은 모두 손견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하급관리거나 소년배의 우두머리 출신들로
조무와 정보, 한당은 언제나 손견과 함께 했습니다.
주준에게 허락을 받고 손견을 향해 빨리 달려온 정보와 한당은
군장을 그대로 갖춘 채, 손견의 집으로 들어왔고
손견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재회를 나누었습니다.
정보는 원래 주군의 관리로 일하는 자였는데
전장에서의 지휘 능력뿐만 아니라 지략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어
지역의 많은 호걸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전문적인 모사는 아니었지만, 손견의 머리 역할을 하였고
손견과는 형체처럼 두터운 사이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정보가 지략적인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면
한당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하고
완력이 뛰어나, 힘과 싸움 실력으로 손견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손견을 따라 두루 돌아다니며, 손씨 가문이 성장하는 동안
어려운 일을 도맡으며 적을 무너뜨린 역할을 했습니다.
손견은 조무, 정보, 한당과 재회의 술자리를 갖고
반가움과 앞으로의 각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손견은 장사 태수로서
동료들과 수많은 기병들을 데리고 장사로 향하였습니다.
손견의 일행이 장사에 도착을 하자
구성이 일으킨 반군은 그동안 세력이 더욱 커져 있었습니다.
장사군 뿐만 아니라, 영릉군과 계양군에서도 동참했는데
영릉군의 반군을 이끄는 자는 곽석,
계양군의 반군을 이끄는 자는 주조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장사와 영릉, 계양군은
낙양에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인구는 많이 있음에도 수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였습니다.
게다가, 면적이 광대하여 미개간지가 널려있었으며
주민들도 한족이 적고, 다양한 부족들이 잡거하고 있었습니다.
구성은 거칠고 강인한 1만여 명의 반군으로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고
곽석과 주조 또한 각기 1만여 명의 반군으로
서로 호응하며 지역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손견은 장사군에 부임한 후, 우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지역 호족의 자제들이나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병사를 모집해 군대를 조직하였고
동료들과 함께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의 실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리고, 선봉에는 손견이 직접 나서 적을 토벌하였고
정보와 한당 또한 각각의 부대를 지휘하여
이전 태수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구성의 부대를
한 달 만에 진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성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 손견은
자신의 관할 지역이 아닌 영릉과 계양까지 군대를 몰고 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주조와 곽석까지 모조리 격파하였는데
월권행위로 처벌받기는커녕 이 공으로 오정후로 승진했습니다.
이 무렵, 손견은 영릉군의 반군을 진압하다
손씨 가문에 없어서는 안 될 충신을 얻게 됩니다.
영릉군에서 만난 황개라는 자는
어렸을 때부터 고아가 되어
흉난을 만나 일찍이 갖은 고생을 겪었으나
빈천한 삶을 살아가는데도 병법과 무공을 익힌 자였습니다.
서른이 조금 넘는 나이에 자력으로 군의 태수에 오른 손견은
장사, 영릉, 계양 3개 군을 모두 평정하였고
조정에서는 손견의 전공을 모두 역사에 기록했습니다.
그는 강동의 호랑이라는 후세의 별명답게
10대 시절부터 30대의 이른 나이로 빠른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젊은 시절의 손견이 활약하던 시절부터 따라다닌 4명은
손견의 심복이자 그림자 역할을 하는 조무
머리가 비상한 정보,
힘이 장사인 한당,
훗날, 적벽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황개까지
이들을 두고서는 손씨 가문 세력의 사천왕이라고도 불립니다.
오늘은 삼국지 21번째 시간으로
동탁과 황보숭과의 갈등,
그리고 손견의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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