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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8 : 역모를 꾀하는 자들, 가후 & 유언

Buddhastudy 2024. 1. 4. 20:03

 

 

후한 말 악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어지러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를 찾아 나섰고

이러한 백성들의 분노는

황건적의 난, 오두미교의 등장, 흑산적의 활동, 변장ㆍ한수의 난 등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황보숭을 비롯한 중랑장들과 관군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백성들의 기대는 조정에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청류파 출신의 사족들 중에서도

점점 한나라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옅어져 갔습니다.

 

얼마 전, 한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던 황건적의 물결에

이를 진압했던 일등공신으로는 황보숭이 있었습니다.

황보숭은 각지의 우두머리를 생포하거나 격파하고

거록군 광종에서는 야습으로 장량 부대를 대파해

장각 삼형제를 모두 토벌한 공적으로

기주 목 및 좌거기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행보뿐만 아니라

대인군자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어

기주 목의 자리에 있을 때는

최근 백성들이,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힘들어했으니

황제에게 1년간 토지세를 면제해달라고 주청했습니다.

 

영제는 큰 공적이 있었던 황보숭의 청을 들어주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은 황보숭을 칭송하는 노래를 짓는가 하면

평소, 장군으로서의 행보는 부하들을 챙기는 마음으로

사졸들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자신도 식사를 시작하는 등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황보숭 주변 사람 중에

같은 량주 출신의 염충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삼국지 최고의 살아남는 처세술을 가진 인물인 가후를

젊은 시절부터 알아본 인물이었습니다.

 

잠시, 가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장수 휘하 시절, 장수의 능력으로는 조조를 이길 수 없다 여겨

군주를 지켜내야 한다는 충성심보다,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이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중요시 여기는 충과 의리보다

개인의 위신을 더 중요시 여긴다 하여

가후의 비중은 크게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능력과 처세 면에서 매우 뛰어난 모사로서

순욱, 순유와 함께 조조의 3대 모사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가후의 천재성은 촉나라의 제갈량이나 오나라의 주유와

비교되어지기도 하는데, 그들과의 차이점으로

제갈량과 주유가 적극적인 행보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면

가후는 무리에서 중심역할이 아닌, 겉도는 인물로

필요할 때만 일시적으로 조언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가후가 장수 휘하에 있을 때, 그의 계책은

전장에서 조조를 두 번이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조조의 아들인 조앙과 특급 장군인 전위를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결국 장수에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자신의 아들과 부하를 죽인 가후에게 복수를 실현하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가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등용하였고

이후,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가후의 지혜를 빌리게 됩니다.

 

 

 

가후의 눈에 띄지 않는 행동은

대부분의 이름있는 영웅들이 죽고 죽는 난세 동안에도

그는 80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게 했습니다.

가후는 천하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자신의 군주가 어떤 이념을 갖고 있든 무관심하였고

철저하게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라의 신하부터, 동탁, 장수, 조조 등

다양한 군주를 모신 가후는

조조가 대패한 적벽대전에서도

유일하게 신중론을 펼쳤을 정도로 매사에 조심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눈에 띄지 않은 행보로 인해

황보숭의 측근이었던 염충만이 그를 눈여겨보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재능과 기질을 살펴보던 염충은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이제, 한나라는 기울어져 가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 시기에 황보숭에게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지금 당장에는 황보숭의 공적을 치하했지만

환관들의 시기와 질투는 앞으로 장군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지금 낙양을 차지하고 환관들을 처벌하고 암군을 몰아내면

염충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가 따를 것이라 간했습니다.

 

하지만, 황보숭은 염충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당신의 계책은 보통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일이고

자신은 지금처럼 충성과 절도를 지켜야

후세에도 그 이름이 아름답게 남을 것이라며

염충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염충은 황보숭의 거절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황건적의 잔당들은

다시 곽태를 중심으로 모여

백파적이라는 이름으로 병주 태원군, 사예주 하동군 등의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을 이어나갔습니다.

 

황건적의 뜻을 이어받은 곽태는

한나라의 구석구석을 어지럽혔고

마침 남흉노의 어부라가 이에 가세하며

혼란의 기세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서쪽에서는 변장ㆍ한수의 난이

북쪽에서는 오환족이 난을 일으키니

영제는 곽태와 어부라 중심의 백파적을 방치했습니다.

 

184~5년 무렵의 후한은

이렇듯 여기저기서 쉴새 없이 난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태상 벼슬을 하고 있던 유언(劉焉)은 조정에다가

도적질이 많이 들끓는 이유로는

자사의 위엄이 없기 때문에

한나라 제도에 손질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 기존의 량주자사, 병주 자사 등이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 왕실의 위엄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왕족 혈통인 유씨 중심으로 벼슬을 임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정에서는 유언의 의견을 받아 왕족의 전통성을 중시했고

유주 목에는 유우, 형주 목에는 유표, 익주 목에는 유언 등으로

유씨 집안을 내세웠습니다.

그 외, 청렴하기로 이름 높은 사람들인

황완을 예주 목, 가종을 기주 목으로 임명했습니다.

 

유주의 유우와 형주의 유표는 낙양과 가까이 있었는데 반해

유언은 남서쪽 구석의 익주를 원한 것은

현재의 중앙 정계가 혼란했다고 판단하였고

마음이 영제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새로운 자신의 본거지를 익주로 삼았습니다.

 

익주는 훗날, 아들 유장에게 물려주었는데

조조가 중국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을 때

유장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와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유장과 유비는 금세 갈등이 생겼고

결국, 유장은 유비에게 익주를 통째로 넘기게 됩니다.

 

 

 

한편, 기주에서는 제2차 당고의 금 때,

환관에게 살해된 진번의 아들인 진일이

185년에 기주 자사 왕분을 찾아갔습니다.

 

왕분은 예전에 진번과 가까웠던 사이로

진일의 방문에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진일은 지금의 조정은 붕괴할 조짐이 보이고

천문을 통해서도 조만간 환관에게 불리한 징조가 보이는 만큼

세력을 갖추고 있는 왕분에게

중심이 되어 황문과 상시들을 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왕분 또한 십상시를 비롯한 지금의 한나라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을 모아, 모의를 진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개인이 많은 군대를 이끌 수 없었기에

흑산적 토벌에 필요한 명목으로, 조정에 병사 징집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황제는 옛 고향인 하간을 방문하려 했는데

왕분과 진일은 이 기회를 틈타

흑산적으로부터 황제를 보호하려는 명분으로 호위를 맡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 나오면 측근들을 모두 죽이고

영제를 폐위한 후,

합비후를 옹립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은

원소와 조조의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허유로

재주는 빼어났으나 오만하다는 평을 받는 인물로

참고로 채널 내 삼국지 7, 허소 편에서도 등장합니다.

 

허유는 황제 폐위를 주도적으로 계획하였고

이 일에 걸맞는 능력 있는 인사를 모으고 위해

조조를 찾아가,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허유의 권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조조는 군주를 폐립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상서로운 일인데

이를 성공시키려면 명분뿐만 아니라, 철저한 준비도 필요하기 때문에

분위기에 휩싸여 일을 진행하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 답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조는 쿠데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왕분은 다음으로는 행동이 청결함으로 잘 알려진 화흠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맑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도구홍에게

영제 폐위와 합비후 옹립에 대한 뜻을 전달했습니다.

 

도구홍은 기주 자사인 왕분이 나서고

앞서 훌륭한 인재였던 진번의 아들까지 함께하니

뜻을 모아 세상을 바꾸고자 의지를 보였지만

화흠은 도구홍에게 왕분의 성격이

그리 치밀하지 못한 점을 들어, 모의 가담을 반대했습니다.

 

화흠은 훗날, 강동 지역에서도 손견의 첫째 아들인 손책이

어린 나이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일찍이 그의 용병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손책, 손권이 권력을 잡고나서 화흠은 대우를 받았고

조조도 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습니다.

 

결국,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있어

왕분과 진일의 예상보다 인재들은 많이 모이지 않았고

황제 측에서는 원래 계획했던 옛집 방문에 대한 일정을

천문의 징조를 보며, 취소하였습니다.

 

황제는 일정을 중지하고 나서는

왕분에게 집결된 군사들을 해산시키도록 명령하자

왕분은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난 줄 알고

두려워하며 도망가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18번째 시간으로

황건적의 난 이후, 지난 시간의 여러 반란들에 이어

이번 영상에서는 가후에 대한 약간의 언급과

황제의 신하들조차 역모를 꾀하는 내용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