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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이집트 역사 1: 1대 파라오, 오시리스

Buddhastudy 2023. 4. 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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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이 문명을 형성할 무렵

이집트에서도 문명이 발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변덕이 심했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과는 달리

순한 양 같았던 나일강이 있던 이집트는

일찍부터 농사를 짓는데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해마다 때가 되면, 장맛비가 내려

빗물이 강으로 흘러가면서 강이 불어났는데

서서히 줄어들다 많은 물이 빠져나가게 되면

강변에는 비옥한 땅이 남게 되었죠.

 

이집트인들은 이렇게 좋은 땅을 이용하기 위해

관개농업, 토목공사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여러 촌락은 하나둘 더 큰 공동체가 되어갔습니다.

 

그들은 소와 함께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며

식량을 자급자족해가는 생활을 이어 나갔는데

기원전 3200년경에는 지역의 구분에 따라

두 가지 큰 연합군인

상이집트하이집트로 나뉘었습니다.

 

상이집트는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하이집트는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여기서 상하 이집트 단어의 이상한 점은

상이집트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나침반의 개념이 없었던 그 시기에는

남쪽과 북쪽을 구분할 수 없었고

강이 출발된 지점이 위쪽이라 생각했는데요

바로 나일강의 흐르는 방향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렀기 때문에

강의 출발지인 남쪽이 상이집트라고 했던 겁니다.

 

북쪽에 있는 하이집트는 광대한 평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일 삼각주를 중심으로 농사짓기 좋은 땅과 양을 방목할 수 있어

상이집트에 비해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좋았던 하이집트는

여러 명의 지도자가 힘의 균형을 맞추느라

권력의 중심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 데 반해

남부에 있던 상이집트는

상대적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일찍이 힘의 우위를 중심으로

권력이 한군데로 모이는 형태를 만들었죠.

 

야망이 있던 왕은 상이집트를 통합한 후

안정적인 군사력을 키워가며

북부에 있던 하이집트의 다수 통치자를 굴복시키고

고대 이집트의 제1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이집트를 최초로 통일한 왕은 메네스로 알려져 있는데

나르메르 왕과 동일 인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유물로는

메네스 왕의 화장판혹은 메니스 왕의 팔레트라고 하는 석판이 있는데요

 

메네스 화장판은

이집트 예술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앞면에는 상이집트가 하이집트를 정복하는 과정을 묘사했으며

뒷면에는 메네스가 이집트 전체를 통일한 후

기념하는 내용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화장판은 녹색 아이섀도의 원료인

공작석을 가는데 사용되었다고 추측하며

많은 여성들의 독특한 분위기와 개성을 나타내게 하는

아이섀도의 역사도 5천 년 이상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합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최초의 시간으로 여겨졌는데요.

기존의 상이집트에서는 백색왕관을 착용했고

하이집트에서는 적색왕관을 착용했는데

통일 후에 메네스는 통합을 상징하는 듯이

흰색과 적색이 결합된 왕관을 쓰며

첫 번째 파라오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후, 메네스의 아들이 수도인 멤피스에 궁전을 세우는데

궁전에다가 위대한 거처라는 뜻의 페르-라는 이름을 지었고

파라오는 이 페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이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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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멤피스는 백색의 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사자와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 신이 묻힌 곳이기도 했죠.

 

고대 이집트의 유물에는 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나

구역성서의 창세기 같은 체계적인 기록은 없지만

여러 자료들이 신전이나 신들의 계보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이러한 자료들을 모아서, 추리하여 재구성하다 보니

이집트 신화에도 창세신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도 멤피스에는 오시리스 신화가 있었죠.

 

이집트의 그림을 보다 보면

옥좌에 앉아 있는 녹색 피부의 남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오시리스입니다.

 

죽기 이전에는 식물신이자 생산의 신이었기 때문에

생명과 풍요를 상징하는 녹색이라고도 하나

또 다른 해석으로는 반대로

죽게 된 이후의 차게 식어버린 창백한 색으로 해석하기도 하죠.

 

신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오시리스 신은 이집트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데

오남매 중에서 맏형이었고

여동생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여

`이집트를 28년간 다스리게 됩니다.

 

하지만, 오시리스는 또 다른 동생인 세트신에게 살해당하고,

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상자 안에 넣어 나일강으로 흘러보냅니다.

상자는 흘러흘러 지중해로 가는 해안까지 갔는데

아내였던 이시스는 남편의 시신이 들어있는 상자를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마침내 남편을 되찾게 됩니다.

 

하지만, 세트는 오시리스의 완전한 죽음을 위해

이시스로부터 시체를 빼앗아

14조각으로 잘라내서는 온 나라에 뿌려버리죠.

 

이시스는 또다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각을 모았고

다른 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을 받아

결국 오시리스를 원상복구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의식을 행하여 부활에 성공시켰지만,

이미 한 번 죽은 몸으로

이 세상에서는 온전하게 살 수는 없게 되어

그 때부터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이 되었죠.

 

그런데, 조각을 모으는 과정에서

14조각을 모두 찾지는 못했었고

찾지 못했던 그 한 조각은 물고기가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생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며

특히 사자의 제사상에는 물고기를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오시리스는 죽음의 신인 상태에서

아내와의 사랑 끝에 자식을 낳게 되는데

호루스의 눈으로 유명한 호루스였죠.

 

그리고 호루스는 자라서 아버지의 원수인 세트와 싸워 이기고

.하 이집트를 모두 통솔하는 왕이 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의 호루스

파라오를 상징하면서 파라오의 수호신이기도 했죠.

 

오시리스의 사망과 부활은

파라오의 죽음과 죽은 뒤의 삶을 상징하는 미라와도 연결이 됩니다.

파라오는 살아있을 적에는 호루스의 화신이었지만

죽어서는 오시리스가 되어 서쪽에 있는 죽은 자의 땅을 다스린다고 믿었죠.

 

오시리스는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는

헬레니즘화로 인해, 그리스의 하데스와 결합하여

세라피스라는 이름의 신으로 숭배됩니다.

 

그리고 7,800년간 신앙이 유지되었다가

기원후 4세기에 접어들어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국교화로 인해 힘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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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1대 파라오 메네스가 새롭게 정한 수도 멤피스는

풍부한 식량을 오랫동안 제공해주는 땅이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결혼의 여신인 이시스가

죽은 남편인 오시리스 신을 위해 울었을 때

그 눈물이 나일강에 떨어져 수위가 높아졌다고 믿었는데

강의 범람으로 인해, 강변에는 양질의 토양이 충적되었고

멤피스는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장소가 되었죠.

 

이집트를 통일할 때, 전쟁에 능했던 메네스는

뿐만 아니라 행정에서도 체계적인 국가기틀을 세우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나라를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 노메스라 불렀습니다.

 

노메스는 지리적 구역과 경제적인 행정단위였으며

각 노메스에는 노마르크라는 책임자를 배치했죠.

 

노마르크는 사람들이 신에 대한 외경심과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해

종교적인 역할도 하며

각 지방의 고위사제를 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파라오 메네스는 통일 이집트에서는

안정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할 일이 많다고 여겨

법과 개간사업에도 많은 신경을 썼는데요

초기 국가시스템의 중앙권력화와 법을 집행하며

빠른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또한, 이집트 전역에 제방을 세우고 운하를 건설했으며

땅이 패인 곳은 메우고, 충적토로 인한 언덕은 평지로 만들었죠.

 

메네스의 이러한 초기 국가 건설사업은

그가 죽고 나서도

이집트가 부유한 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식물은

구워 먹거나 생으로 먹었는 파피루스였습니다.

섬유질이 많고 단맛이 나는 파피루스의 주요 목적은

식용으로 대량 생산되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먹는 것 보다는 종이로 더 유명해졌죠.

 

파피루스의 껍질을 벗겨내서, 얇게 저민 줄기를

가로세로로 놓고 헝겊으로 덮은 다음

나무망치로 두들겨 얇게 펴 종이를 만들었는데요

 

이렇게 종이가 발달된 이집트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시스템과 맞물려

관료계급에서 서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제로 태어나게 되어서

신분을 바꿀 수 없었지만

평민이 귀족만큼의 위세를 부릴 수 있었던 유일한 직업이 서기였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떻게든 서기관 시험에 합격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서기가 되면 몸을 쓰는 노동을 하지 않게 되고

평생동안 세금도 면제가 되었죠.

 

10살 무렵이면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나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약 3,000개 정도의 그림처럼 보이는 문자들이 있었으며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조합하는 능력까지 기르려면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엘리트로 서기가 되었습니다.

 

학교는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반복과 암기, 측량술 등의 전문적인 기술 분야 등을

학생들에게 엄하게 훈련했으며

체벌은 회초리를 이용하여 무자비하게 훈육하기도 했죠.

 

한 예를 들면,

아이들의 귀는 등에 있어서, 등을 때리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서기가 되면 관청의 각 부서에 배치되어

공무를 담당하게 되고, 승진하면 고급관리나 신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첫 번째 시간으로

기원전 3200~3100년경

상하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와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중앙집권화된 고대 이집트의 서기에 대한 역할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