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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이집트 역사 2: 이모텝 & 피라미드

Buddhastudy 2023. 4. 12. 20:14

 

 

 

현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 20km 떨어진 나일강 서안에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가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는 크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멤피스는 고왕국 시절의 수도로 제 6왕조 시대까지 번영했죠.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번화한 곳으로

각 지역에서 여러 가지 물품이 교환되며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멤피스 주변에는 이집트에서 오래된 여러 무덤 유적지가 발견되고는 했는데

멤피스에 거주하던 파라오들은

처음부터 무덤을 피라미드로 짓지는 않았죠.

 

1왕조와 제2왕조 시대의 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직사각형으로 지었는데

이 무덤은 마스타바라고 불렀습니다.

 

마스타바는 일반적인 분묘와는 달리

사람이 살 수 있는듯한 집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시신을 두는 곳 이외에도

살아있을 적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었으며

벽에는 벽화와 조각들로 장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도둑과 도굴꾼들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에

마스타바 안에 보관했던 왕의 물건들은

금세 도둑맞고 없어지면서 보안을 신경 쓰기 시작했죠.

 

이제 왕족은 무덤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멤피스 근처 사카라 사막에는

많은 수의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제 3왕조 2대왕이었던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였습니다.

 

피라미드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조세르 왕 피라미드는 6층으로 이루어졌고

이전 사각형 모양의 마스타바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덤이었죠.

 

62m 높이의 최초 피라미드는

계단식 피라미드라고도 불리는데

1층에는 예전처럼 마스타바가 있고, 시신이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위로 다섯 개 층에 각기 크기가 다른 마스타바를 올려서

마치, 무덤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느낌을 주었죠.

 

기원전 27세기 조세르 시대의 피라미드 공사를 맡았던 사람은

재상이자 건축가인 이모텝이었습니다.

이모텝은 최초로 계단식 피라미드를 설계한 사람으로

건축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의학에도 뛰어났죠.

 

당시 천재로 인정받게 된 인물로

사후에는 신격화되어 학문과 의술의 신이 되기도 하는데요

현대 사회의 미디어에서는 영화 미라에 등장하면서 인지도가 상승하였는데

학문의 신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메인 악역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왕의 물건을 훔쳐 가는 도굴꾼들에게 소문이 퍼지는 과정에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 왕의 잠을 깨우는 자에게는 이모텝의 저주를 받으리라

라는 내용으로 인해

이모텝의 저주라는 측면이 좀 더 부각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모텝이 조세르의 피라미드를 짓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마스타바를 공사했었는데

생각지 못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요

그 시절에는 파라오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무덤을 짓고 있는 풍조가 있어서

마스타바를 완성시키고도 조세르가 멀쩡하니

이모텝은 확장 공사를 고안해냈고

이것이 계단식 피라미드가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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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고왕국 시절은

3왕조부터 제6왕조까지의 시기를 뜻하는데

그중 3왕조의 2대왕인 조세르가 죽고 3명의 왕을 거쳐

스네프루 왕에 가서는 새로운 제4왕조를 맞이합니다.

 

스네프루는 정통 계승자가 아니라 사위였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가 열리게 된 거죠.

기원전 2613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존속된

4왕조는 스네프루 왕부터 총 6명의 왕이 통치했는데

이 시기는 이집트 고왕국의 황금시기로 불리게 됩니다.

 

스네프루는 야심이 있었던 왕으로

이전에 세워졌던 계단식 피라미드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어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데

바로 사각뿔 피라미드 건축에 도전하였죠.

 

내부에 좁고 높은 계단식의 건축을 쌓아 올리고

외부에 벽돌을 덧붙여 사각뿔로 마무리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횡력에 약한 작은 벽돌로 인해

새로운 시도는 건축 도중 무너지게 됩니다.

 

스네프루와 건축가들은 고민에 빠졌고

벽돌보다 더 크고 단단한 돌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하중 때문에 돌에 금이 가기 시작했죠.

그래서, 급하게 주변에 돌을 더 쌓아 바닥 면적을 늘렸더니

굴절 피라미드를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굴절 피라미드에 만족하지 못했던 스네프루와 기술자들은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내부에서 엄청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천장 역시 역 계단식으로 쌓게 되고

결국 레드 피라미드라고 하는 붉은 피라미드를 완성하게 되죠.

 

고왕국 시절의 제4왕조를 황금시기로 부르는 것은

스네프루와 같이 한 명의 왕이

3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할만한 자원과

인력동원할 수 있었던 경영 상황에 두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를 노예 20만 명이 건설했다고 기록했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노예가 아닌

농부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기간 동안

일자리로 대체되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노동자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적어놓은 낙서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오늘은 수당을 얼마 받았다

감독관과 싸워서 근무를 며칠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집에 있지말고 나가서 돈 벌어 와라등의 내용들이 적혀 있었죠.

또한, 근무 출석현황판이 있었는데

결근 사유로 병결이나 과음 등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스네프루의 사후에는 대를 이은 왕으로는

쿠푸, 제데프레, 카프레 등이 있었는데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로 이어지는 대피라미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기자에 거대한 피라미드 단지를 남겼죠.

 

이 때문인지,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짓지 않는 기간에는

무덤을 건축하는 단조로운 삶의 패턴이 이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공동 프로젝트로

목적이 비슷한 사람들의 사회시스템 속에

큰 갈등 없이 평화의 시대가 이집트 제 4왕조 동안 지속되게 됩니다.

 

특히, 기원전 2570년경이 건축된 쿠푸의 대피라미드는

140미터로 아파트 45층 정도의 높이로

기원 후 1300년까지 약 3천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죠.

 

쿠푸 왕은 아버지 스네프루의 붉은 피라미드를 보고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두고 자신은 더 크게 지었는데

내부 하중을 견디지 못해 돌이 금이 가는 현상이 생겨

5중 겹까지 쌓으며 하중분산을 시킬 수 있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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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중에서도 초기 시대라 할 수 있는

고왕국 시절에 지어진 피라미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외계인이 내려와서 만들었다는 등의 추측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 대다수의 학자들은 당대 이집트의 능력으로

충분히 피라미드 건설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집트인들은 해가 지는 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

먼저 강의 서쪽에 장소를 정하고

무거운 돌을 끌고 와도 무너지지 않을

지면이 단단한 땅을 골라서

기술자들이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는 똑같지만은 않아서

각기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공통적인 부분은 입구가 북극성을 향하도록 지었던 겁니다.

 

아직 나침반이 나오려면 기원후 220년은 되어야

중국에서 처음 발명했을 텐데

이집트인들은 어떻게 북극이라는 방위를 측정했을까요?

 

먼저, 동쪽 하늘에서 별이 뜰 때

벽에다가 별의 위치를 표시한 후

밤새도록 별을 쫓아서는 별이 질 때도 벽에 표시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서 있던 원의 중심까지 선을 그어 2등분을 만들고

동쪽과 서쪽 사이의 중간 지점은 북쪽이라고 판단했죠.

 

돌을 공급해야 할 채석장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중간에 나일강으로 건널 수 없었지만

되려 강의 범람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돌을 계속해서 이동시킬 수 있었고

이런 식으로 하루에 10만 개도 넘는 석재를 이동시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지하실을 만든 다음에는 경사를 이용해서

밧줄로 묶은 돌을 끌어올리고

나무망치나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구슬 등을 이용한

작고 정교한 도구들로 꼼꼼한 과정을 거쳐

거대한 피라미드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집트 건축술의 대단했던 점은

무게가 1톤이 넘어가는 단위의 돌들을

100미터 넘게 쌓아 올린 부분도 있지만

부실 공사가 아니어서,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죠.

 

피라미드의 외벽에 이용된 석회석은

보통 2톤 내외로 계산되고 있으며

경사로와 둥근 나무 등을 이용하면

한 번에 10명 정도의 사람이 붙어서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대학의 건축학과에서도

피라미드 건축 실험으로 30~40명의 인원으로 3주 만에 거대한 돌을 이용해

8층짜리 피라미드를 완성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요.

 

피라미드 주변의 무덤이나 여러 자료 등에 의하면

건설에 동원된 주민은 1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230만개 정도 돌들의 피라미드는 7년 정도 계산이 나오지만

농한기에만 건설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수십년은 걸렸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죠.

 

피라미드는 높게 하나만 지어졌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여러 구조물도 함께 있었습니다.

신전이라든가 신전에서 시작되는 참배의 길이 존재했었죠.

 

신전 옆에는 도랑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서쪽에 있는 사후 세계로 간다고 믿어서

길이가 제법 긴 나무배도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엄청나게 크며, 기하학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웠으며

이집트를 구성하는 사각돌의 크기와 무게도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는 당대의 이집트인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약 4000년이 넘는 시간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죠.

 

특히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560년에 146미터를 달생했다고 하니

그 후로 3871년동안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기원후 1311년이 되어서야

영국의 링컨 대성당의 첨탑이

피라미드보다 높게 건설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두 번째 시간으로

최초의 피라미드를 설계했던

학문과 의술의 신 이모텝에 대한 이야기와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그리고 피라미드가 제작되는 과정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