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구멍가게와 살림집이 딸린 소담한 횟집.
그는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 평상을 네다섯 개 내어놓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고향이 경남 양산이었기에 사람들은 간판 없는 그 집을 ‘양산집’이라고 불렀지요.
아이스트림도 팔고, 모기향도 팔고, 초도 팔던 시절...
어느 날 그는 무심코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만히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거기가 신고받는 데 맞습니까?”
- 1992년 1월 17일 위안부 피해 신고 / 김복동 할머니
복 받을 ‘복’에 아이 ‘동’자, 아버지가 지어준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신고하고 큰언니가 발을 끊었어.”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40여 년을 마음 깊이 묻어왔던 그 일.
조용히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길 거부했습니다.
나를 찾고 싶어서... 용서하고 떠나고 싶어서...
그러나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조국은 물론, 가해국의 억지와 싸워야만 했고 “나를 찾고 더 쓸쓸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모두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그래서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그들의 고통을 세세하게 가늠해본 적은 과연 있었을까...
1992년 1월 17일, 나를 찾고 싶어서 묻어두었던 그 일을 세상 앞에 꺼내놓았던 사람.
그는 내내 두고 온 부산의 바다를 그리워했습니다.
“볼 수 없어도, 바다가 그리워...
애타게 가보고 싶다가도 두려워...
누가 나를 반겨줄까 싶어... 마음이 찡해”
-김복동 증언집
‘금방 끝날 줄 알았고, 용서하고 가고 싶었다’는 그의 희망과는 달리 해결의 시간은 더디 가고 있지만...
그가 자신 스스로를 되찾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이를 위해서 힘겹게 걸어간 좁고 험한 길은 이제 여러 갈래로 번져, 넓어지고 있으니...
김복동(1926~2019)
14살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소녀의 이름은 복 받을 ‘복’에 아이 ‘동’자
‘슬픔이 아름다운 거라네.
아름다운 거라서
내가 평생 놓지 못하고 있었나 봐’
-김숨<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항상 바다를 그리워했다는 그분의 마음에도 너른 바다가 가득 담기길...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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