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깨달음] 물리학자가 밝히는 과학의 난제, 의식이란 무엇인가?|과학에서 신으로

Buddhastudy 2024. 5. 13. 19:35

 

 

물질계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는 데에는 과학이 크게 성공했지만,

사고, 감각, 직관, 꿈과 같은 내면세계에 이르게 되면

과학은 할 말이 거의 없다.

 

우주는 어떻게 의식적이게 되었을까?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피터 러셀은

물리학을 아무리 연구해도

심오하고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의식의 본질을 알기 위해 동양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인도로 떠나 초월명상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그는 <과학에서 신으로>라는 책을 통해

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과학의 난제가 아니라

현재의 과학적 세계관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라고 말한다.

 

피터 러셀은, 우리가 의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게 기폭제가 되어

조만간 서구 과학은, 패러다임 전환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의식이라는 키워드를 핵심으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다룬 책, <과학에서 신으로>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의식은 모두에게 존재한다

 

우리의 모든 과학적 패러다임은 물리세계가 실세계이며

시간, 공간, 물질 및 에너지가 실재의 근본 요소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물리세계의 기능만 제대로 이해하면

우주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모든 과학적 패러다임은 이런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비물질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면

비로소 물질적 세계관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의식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물질에는 의식이 없다고 가정한다.

 

인식능력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동물에게는 우리와 같은 수준의 자아인식능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동물들이 내면적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경험이 아무리 다를지라도

그들 모두 의식능력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까?

우리는 의식이 존재하려면, 뇌나 신경계가 필요할 거라고 가정한다.

물질적인 패러다임에서 보면, 이런 가정은 당연하다.

의식이 물질계에 작용해서 생기는 거라면

그런 작용이 어디에선가 일어나야 하는데

가장 지목되는 곳이 바로 신경계이다.

 

그러나 이때 물질주의자의 패러다임에 내재된 문제에 부딪힌다.

즉 순수한 물질의 작용에서 도대체 어떻게 의식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식은 뉴런의 특정 배열이나 뉴런 간에 일어나는 작용

또는 그 밖의 물리적 특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의식은 언제나 존재한다.

의식 능력이 언제나 존재한다면

의식과 신경계의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

 

신경계는 의식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의식을 확대하여 경험의 양과 질을 향상시킨다.

 

영화 영사기에 비유하자면

신경계가 있다는 건

곧 영사기에 렌즈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렌즈가 없어도 빛은 여전히 존재한다.

 

철학계에서 만물의 의식이 있다는 견해를, 범심론이라 하는데

범은 모두를 의미하고

심은 영혼 또는 마음을 의미한다.

 

식물이 인간과 같은 수준에서 지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식물의 의식 능력이 희미하게나마 존재한다는 것이다.

, 식물도 희미하게 남아 경험의 흔적이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의식적인 실체와 무의식적인 실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가령 바이러스, 원자, 심지어 소립자에서도 경험의 흔적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지식 체계가 누적되었다.

 

실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속의 말을 들음으로써

혼잣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의식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인

언어적 사고가 추가된 것이다.

 

주변 세계의 본질에 대해 사유할 뿐만 아니라

사고 자체에 대해서도 사유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아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실재에 대한 착각

 

의식의 형태는 우리의 개인적 실재로

우리 각자가 알고 경험하는 실재이다.

우리는 항상 이런 개인적 실재를, 물리적 실재로 오해하여

자신이 외부 세계에 바로 접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색과 소리는

실제로 외부에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모두 마음의 상이고, 우리가 구성한 실재상이다.

이 사실이 의식과 실재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해준다.

 

영국의 철학자인 존 로크는

마음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상을 반영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각을 수동적으로 여긴 반면,

칸트는 마음이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계속 형성해 간다고 보았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실재란

우리 각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다.

 

내가 나무를 보면 나무의 상이 의식에 나타난다.

나의 신경활동이 어떻게 의식 경험을 일으키는지가

앞에서 언급한 난제이다.

 

마음의 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 과정은 일어난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는 것

즉 지각하는 모든 건, 감각 자료를 재구성한 것이다.

내가 내 주변 세계를 지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식하는 건 바로 내 마음에 나타난 색깔, 소리, 냄새일 뿐이다.

우리가 그건 꿈일 뿐이야라고 말할 때

경험이 물리적 실재에 기반을 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시에 하는 경험은

꿈에서와는 달리 일관성과 현실감이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우리가 깨어 있을 때의 실재 역시

꿈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계를 바로 지각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그럴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를 구성할 때 오류가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착시]가 좋은 예이다.

 

뇌가 감각 자료를 잘못 해석하여

실재상을 왜곡하거나

일관성 없이 구성하기 때문에 착시가 일어난다.

 

일상생활에 대한 우리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돌을 차면 발을 움직이려는 의도가 몸에 전달되고

물리세계에 있는 우리의 발이 물리적인 돌을 차려고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호작용을 바로 경험하는 게 아니다.

우리 뇌는 눈과 몸이 보낸 정보를 받아서

우리의 실재상을 적절히 구성한다.

뇌가 감각 정보를 처리하여

그에 상응하는 실재상을 구성하는 데에는 약 5분의 1초가 걸린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물리적 실재보다 약 5분의 1초 늦지만

우리는 그 지연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이유는 뇌가 영리하게도

그 지연을 보상하여

우리가 물리세계와 바로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실재의 다른 측면을

다른 동물은 감지할 수도 있다.

 

가령 개는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진동수의 소리를 탐지하고

후각은 우리보다 백만 배 이상 민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개의 마음이 되어 보면

다른 세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동물들이 구성하는 실재에는

인간의 경험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특성이 포함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우주에 있는 생명체의 종류만큼이나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우리가 실재라고 여기는 건

인간이 물리세계를 보고 해석하는 특정 방식일 뿐이다.

 

 

--우주 만물은 빛이다

 

이론물리학 덕분에

물리세계의 궁극적 진리에 근접하는가 하면

실험심리학 덕분에

의식이라는 내면세계에 진리를 밝히는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 두 분야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물리세계와 내면세계의에 진리에 더 근접해 갔다.

 

그 두 가지를 연결하는 매개체는 빛이었다.

빛은 우주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다.

그리고 빛은 어떤 면에서

시간, 공간 또는 물질보다 더 근본적이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인 본체는

감각에 의해 이해되고, 마음으로 해석되지만

결코 바로 경험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더 심오한 실재인

시공연속체의 두 가지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시공연속체란

시간과 공간 두 가지를 초월하지만

시간과 공간 둘 다로 표현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칸트의 본체와 마찬가지로

시공연속체 자체를 결코 바로 알 수는 없다.

빛 역시, 알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결코, 빛 자체를 알 수 없다.

 

눈에 닿은 빛은

빛이 방출하는 에너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 에너지는 마음에서 시각상으로 해석된다.

 

상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빛은 의식의 특성일 뿐이다.

우리는 빛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결코 알 수 없다.

저자는 내면의 빛을 탐색하면 할수록

내면의 빛이 물리적 빛과 아주 비슷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물리적 빛은 질량도 없고 물질계의 일부도 아니다.

의식의 빛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의식의 빛은 실체가 없다.

물리적 빛은 우주의 근본적인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빛도 근본적이다.

의식의 빛이 없다면 체험도 없을 것이다.

 

과연 물리적 실재와 마음의 실재는

그 본질이 빛이라는 공통점이 있을까?

 

자아를 찾는 건

어두운 방에서 빛의 근원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방에 있는 여러 가지 대상 중, 빛이 닿는 것만을 보게 된다.

이것은 모든 경험의 주체를 찾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다.

경험의 대상으로는 자아를 결코 알 수 없지만

즉각적인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알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할 때

즉 우리가 습관적으로 동일시하는 모든 사고, 감정, 지각, 기억이 사라질 때

대상은 사라지고

순수한 주체인 자아의 본질만 남는다.

그때 우리는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바로 를 발견한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은 자아의 본질을 알고

[그 본질이 순수한 의식]임을 알게 된다.

당신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임을 알게 된다.

 

당신은 의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이 의식 자체이다.]

모든 개성을 초월하고 특성이 동일하여

당신의 라는 느낌을,

나의 라는 느낌과 구분할 수 없다.

당신이 라하고

당신에게서 빛나는 의식의 빛은

내가 라하는 빛과 동일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하다.

나도 빛이고 당신도 빛이다.

 

 

--의식이 뇌에 존재한다는 착각

 

본질적 자아는 영원하여, 그런 자아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본질적 자아는 순수한 의식이고

순수한 의식은 무한하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는 건

낮과 밤의 사이클, 심장의 고동, 사고의 흐름과 같은 변화 때문이다.

깊은 명상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모든 인식이 사라지고,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면

변화와 같은 경험이나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도 사라진다.

 

우리는 절대적 고요 속에 있었음을 알지만

거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 시간이 1분일 수도 있고, 1시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은 사라지고 [현재만이 존재한다.]

본질적 자아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도 초월한다.

 

자신의 의식을 찾아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이 머릿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영상은

당신으로부터 1미터 거리 안에 있을 것이다.

당신의 팔, 몸통, 다리도 당신이 인식하는 자아가 있는 지점 가까이에 있다.

 

우리의 의식이 머리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이해가 간다.

우리 뇌는 머리 안에 있고

아무튼 의식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게 보이는 대로는 아니다.

사실 의식을 담당하는 정확한 위치는

뇌의 위치와 관련이 없다.

 

의식은 감각기관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당신의 눈과 귀를 당신의 무릎에 이식하여

이제 당신이 새로운 위치에서 세계를 관찰한다고 상상해 보자.

이때 당신은 자아를 머리에서 경험할까? 아니면 무릎일까?

 

당신의 뇌는 여전히 머리에 있지만

당신의 머리는 더 이상 인식의 중심이 아니다.

당신은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것이고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의식이 무릎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가령 유체이탈 경험자에 의하면

유체 이탈 시에는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본다.

인식의 중심점이 더 이상 신체 부위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을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애당초 우리 몸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당신의 의식이

[특정 장소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건, 의식 안에서 만들어진 구성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인식한 세계의 중심에

이런 자아상을 두어

우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세계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과학과 신의 연결고리

 

부처는 고대 인도에

예수는 2천년 전에 유대에

모하메드는 자기 시대와 문화에 적합한 용어로 자신의 통찰을 설파했다.

 

오늘날 우리는 똑같은 본질적 지혜를 재발견하여

21세기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견해가 수용되려면

합리적인 마음을 만족시키고 검증 가능해야 한다.

 

많은 과학자들은

우주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를 연구하고 있지만

신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신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우주는 신의 도움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위대한 성인과 현자의 글을 살펴보면

신의 존재를 시간과 공간 및 물질 영역에서 지지하는 주장은 거의 없다.

 

그들이 신을 말할 때

보통 심오한 개인적 체험을 일컫는다.

 

과학과 영혼의 만남은

우주를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나

우리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대한 일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영적 탐구를 정당화할 세계관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우리의 많은 위기 뒤에는

영적 빈곤이 있기 때문이다.

 

신을 발견하려면

서양 과학이 아직 탐구하지 못한

마음속 깊은 곳을 탐색해야 한다.

 

시간, 공간 및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처럼

마음의 본질을 탐색하다 보면

오랫동안 기다려온 과학과 영혼의 연결고리가

의식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